아름다운 여자

                                     - 동생에게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미'(美)자는'양'(羊) '대'(大)의 회의(會意)로서 양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큼직한 양을 보고 느낀 감정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 고기를 먹고 그 털을 입는 양은 당시의 물질적 생활의 기본이었으며, 양이 커서 생활이 풍족해질 때의 그 푼푼한 마음이 곧 미였고 아름다움이었다. 이처럼 모든 미는 생활의 표현이며 구체적 현실의 정서적 정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바깥에서 미를 찾을 수는 없다. 더욱이 생활의 임자인 인간의 미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용모나 각선 등 조형상의 구도만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없음은 마치 공간을 피해서 달아나거나 시간을 떠나 존재하거나, 쉽게 말해서 밑바닥이 없는 구두를 생각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너는 먼저 그녀의 생활목표의 소재를 확인하고 그 생활의 자세를 관찰하며 나아가 너의 그것들과 비교해보야야 할 것이다. 사랑이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알 만 하다'는 숙지(熟知), 가지(可知)의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미의식의 형성과 미적 가치판단의 훌륭한 열쇠를 주고 있다. 이를테면 너의 머리 속에 들어앉은 이러저러한 여인상이 바로 너의 미녀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기실 너는 사제(私製)의 도량형기(度量衡器)로써 측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네게 아름다운(可知) 여자가 어머니께는 모름다운(不知) 여자가 되는 차이를 빚는다.

  여기서 말해두고 싶은 것은 너의 여성미 기준이 혹시 매스컴이나 부침(浮沈)하는 유형의 침윤(浸潤)을 당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의문이다. 스스로의 착소(窄小)한 시야에 대한 반성이 있다면 인생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노인들의 달관과 그 관조의 안목을 낡았다고 비양하지는 못할 것이다.

  미는 또한, 신선미 즉 미의 지속성을 그 본질로 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있거니와 부단히 자기를 갱신하지 않는 한 미는 지속되지 않는다. 정체성은 미의 반어(反語)이며 권태의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녀가 어떠한 여자로 변화·발전할 것인가를 반드시 요량(料量)해봐야 한다.

  착한 아내, 고운 며느리, 친절한 엄마, 인자한 시어머니, 자비로운 할머니 등 긍정적 미래로 열려 있는 여자인가 현재 속에 닫혀 있는 여자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은 현재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완결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연관 속에서 변화발전의 부단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철학적 태도이며, 현실성보다는 그 가능성에 눈을 모으는 열려 있는 시각이다.

   나는 이 편지로 네게 여자를 고르지 말라거나 미녀를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결혼에 임하여 미의 의미를 새로이 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잘 뿐이다. 사실이지 사람이란 사과와 같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의 반려이며 생활을 통하여 동화·형성되어 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면밀한 선택으로부터 좀 대범해져도 좋을 것이다. '부모나 형제를 선택하여 출생하는가'라는 현문(賢問) 앞에서는 답변이 없어진다.

   너는 아직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같은 가격이면 그 염색료만큼 천이 나쁜 치마이기 십상이다. 어쨌든 금년에는 네가 결혼하기 바란다.

 1975.1.13


 오가며 지하철 안에서 오랜만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꺼내들었다. 역시나 신영복 선생님의 사색의 깊이는 따를 수가 없다.

 아름다운 여자란 어떤 여자인가, 를 저리 풀어낼 수 있는 그 분의 사색 앞에 또 한 번 감탄을 한다.

 뭐, '착한 아내, 고운 며느리, 친절한 엄마, 인자한 시어머니, 자비로운 할머니' 대목에서 살짝 거슬렸지만 1975년에 쓰셨다는 것을 감안할 때 불편한 마음은 버릴 수 있겠다.

 마음을 흔드는 구절이 너무 많아 종종 멈칫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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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6-2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되는 구절이 너무 많아 읽은 책중 가장 많은 밑줄이 쳐진 책이죠. 읽자마자 바로 책의 처음으로 넘어가 다시 읽기 시작한 유일한 책이기도 하고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소장책 1호입니다.

연우주 2006-06-3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에겐 미치는(?) 코드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랍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나, 처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어요. 그때 그 깊이에 매료되었지요. 오랜만에 꺼내들었어요. <나무야 나무야>는 매년 두세번 이상 보는데 이상하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자주 안 꺼내지더라구요. 아마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해서 그럴 거예요...

그나저나 잉크냄새님의 댓글 너무 반갑네요!
 

사람들은 다 소통을 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생각을 교류하고 싶어하고 상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하고 지식을 나누고 싶어한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하고 함께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어한다. 사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더불어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주의, 나아가서 이기주의를 권장한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외롭다. 어딘가에서 그 외로움을 채우고 싶어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쌓여가면서 사람들은 점차 서로간의 의사소통보다는 내 이야기를 얼마나 잘 들리게 할 것인가, 혹은 내 이야기를 얼마나 잘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인터넷 문화가 바로 그런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동호회 형태의 클럽이나  카페가 아닌 블로그, 혹은 미니홈피가 인터넷 문화에 주류를 이룬 것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 혹은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에 대해 어떤 방식의 코멘트를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요즘의 소통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서글펐다.

정작 소통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고 온라인 상에 글을 쓰고 위안받기를 원하는 건,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반영은 아닐까.

사람 간에 거리를 두고 진짜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닐까. 내 일,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나와 타인을 처절하게 구분하면서도 타인에게 위로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그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상처는 받고 싶지 않지만 사랑은 받고 싶은 어린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삶은, 생각보다 공평해서 사랑이 있으면 상처가 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다. 건강함이 있으면 아픔이 있다. 강인함이 있으면 연약함이 있다. 웃음이 있으면 눈물도 있다. 그래서 상처를 받더라도 다가서야 하고 말해야 하는데, 다들 악역은 맡고 싶지 않은 거다.

아주 잠깐 어울리지 않는 악역을 맡았었다. 하지만 그 악역을 맡은 사람의 슬픔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음도 이해받을 수 없다.

잘, 모르겠다. 살면서 가끔 방향성을 잃을 때가 있다. 아니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지향점은 분명하지만 그 지향점을 향해 가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저기 고지가 보이는데, 내 바로 앞에는 뭐가 있는지 볼 수가 없어서 배를 타야 할지, 버스를 타야 할지, 걸어야 할지, 비행기를 타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고 있는 그 지향점의 동료는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을 산다는 건 그래서 즐겁다고도 말을 하지만 때때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참으로 암담하다.

나는 글쓰기보다는 말로 소통을 하고 싶고, 온라인 상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고, 때로 상처를 받더라도 정직함과 진실함으로 삶을 채워나가서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진실하게 사랑하고 싶다.

비록 내 말하기 방식이 서툴러도. 늘 그렇듯 글쓰기가 훨씬 명확하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잘 전달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글이 아닌 말로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했으면 싶고, 내가 서 있는 삶의 현장에서부터 진실을 실천해나가고 싶은 것이다.

이해(利害) 관계, 그리고 접점이 없기 때문에 쉽사리 위로하고 쉽사리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온라인 상의 관계보다는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사랑하기 힘들고 늘 부딪혀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싫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그 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면으로 돌진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은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정말 그럴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비겁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 과정 속에서 마음은 너덜너덜 다 떨어지고 찢겨져 걸레가 되어도 어느 순간은 그 찢겨진 마음 사이로 진실이 스며든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패잔병처럼 쓸쓸하고, 외롭고, 아프고, 그래서 또 어떤 방식의 위로든 친절함이든 너무 쉽게 기대고 싶을 뿐이다. 그런 나약함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희망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홀로 튼튼해져야 할 시기일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다. 그냥 사실은 잘 모르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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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당에 매달 1만원을 내면서 나는 내가 정치참여에 적극적인 인간이라 위안받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속해있는 학교의 장학회에 소속되어 매달 1만원씩 내면서 그래도 아이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위안받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노력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것은 결국 1만원 어치는 아니었을까.

십일조를 하기 때문에 나머지 90%는 어떻게 써도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처럼 나 역시 1만원을 기부(?)하고 있기에 나머지 99만원은 마음대로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내 사랑의 깊이도 결국은 만원 어치는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만원을 내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치 않다. 나는 위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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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6-2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 보다는 나아요. ^^

waits 2006-06-23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비, 후원금으로 자기위안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 가치를 부러 절하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필요도 없다는 건, 우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
나머지 99만원이라니, 부럽습니다..;; 전 그냥 즐겁게 욕심껏 냅니다만, 거지랍니다. ㅎㅎ

연우주 2006-06-2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그렇게 위안을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었어요. 쨌든 감사한 댓글입니다. ^^

나어릴때님/ 음, 그냥 왜 사람들은 더 애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나 봅니다.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들,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런 식으로 사고를 확대해나가다보면 바로 그런 무관심이 사회를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두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적 차원에서 사랑해야 한다, 라는 원론적인 생각, 그걸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함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하고 있는 건 역시 만원어치는 아니었을까 싶었답니다. 그리고 99만원이라는 건 그냥 100%를 기준으로 한 은유법이었답니다. ^^
 

 

 

 

 

별로 재미가 없었다. 이제 성석제에게도 웃음을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성석제는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박장대소를 하게 한 인물이었기에 기대하는 바가 컸었으나 이제 그 박장대소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냥 음식에 대한 추억담 정도를 풀어놓은 이야기다.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소박한 이야기였고 무엇보다 성석제 이야기투가 배어나오긴 했지만 그다지 우스꽝스럽진 않았다.

그냥 심심풀이로나마 읽으면 좋을 법한 글이다. 간혹 심심할 때 읽거나 화장실에다 갖다놓고 읽으면 좋을 법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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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6-2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다고 생각해서 보관함에 넣어두었어요. 그에게 실망할 때도 있지만 포기할만큼의 실망은 아직 안줬거든요...

Volkswagen 2006-06-2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석제가 재밌니? 오~난 성석제 별루야!

연우주 2006-06-23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성석제에 대한 제 실망은 사실 성석제를 직접 만난 후에 더 심해졌어요. 쨌든 저는 이제 별로 재미없네요.^^
뽁/ 요상한 이름 적응 안 됨. 성석제가 처음 문단에 등장(?)했을 때 얼마나 웃겼는데.. 내가 무릎을 치면서 박장대소했다. 요새야 소설이 가볍고도 가볍지만 성석제가 처음 산문을 쓸 때는 그렇지 않았다구. 그러니 당연 성석제의 소설이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근데 요새 소설은 모두 너무 가볍고 다들 자기 얘기만 해대서 짜증난다. 한국 소설 안 본다니까...

기인 2006-07-01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성석제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요즘 소설과 이 <<소풍>> 또한 참 실망이었어요. ㅎㅎ 저는 현대문학 전공자이기는 하지만, 정말 요즘 소설 중 상당수는 지겨워 죽겠답니다 ^^;

연우주 2006-07-0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현대문학 전공자라니 너무 부럽습니다. 저도 한때 문학 전공자를 꿈꾸었지만 지금은 좀 다른 삶을 살고 있거든요. 언젠가 다시 문학 공부를 하게 될 날이 올지, 안 올지 모르겠군요.^^

그.런.데 저는 요즘 한국 현대 소설은 안 봐요. 아무리 봐도 배울 게 별로 없더라구요.^^ 오히려 외국 소설을 많이 본답니다. ^^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정현종 옮김 / 물병자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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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대한, 믿음에 대한 총체적 난국에 직면해 있다. 무식하게도 믿음은 실천이라고 생각했고 실천은 행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배운대로 믿었고 믿은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그 결과 나는 지쳐버렸고 총체적 난국에 진면하게 된 것이다.

과연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람은 이기적인 자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절망으로 가득 채워놓았을 즈음 이 책을 만났다. 우연이란 결국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게 읽으면서 나는 지금 이 책을 너무 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결국은 '자기 포기'가 사랑을 아름다움을 완성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아름다움은 있다고 말한다. 관찰자인 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사물을 그저 존재함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충분히 동의하지만 실천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절망이 아니다. 다시금 희망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 희망할 수 있음은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음도 말이다. 사랑은 의미있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오늘 이 책을 알게 한 인연에 감사한다.

덧붙임- 리뷰를 검색해보니 어떤 분께서 번역이 엉망이라고 지적하셨던데, 반대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만한 번역은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을 한다는 게 역시 뛰어난 재능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또 역시 문학을 하는 사람이 번역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한 문장을 번역할 때 이토록 정성이 들어간, 어휘가 풍부한, 한국말다운 번역은 쉽게 볼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왜 번역이 엉망이라고 하셨을까. 그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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