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투스 -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도리스 메르틴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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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7년에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지성만이 무기다>를 읽으며 이 책이 자기계발서를 가장한 인문학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알라딘의 책 분류를 대체로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지성만이 무기다>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번엔 반대다. 알라딘 책 분류에 의하면 도리스 메르틴의 <아비투스>'인문학/교양인문학'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나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라고 생각한다. 미국이나 한국식 자기계발서와의 차이점이라면 조금 더 전문가(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정도겠다.

 

책날개에 의하면 도리스 메르틴은 독일 사람이다. 그런데 예로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트럼프, 오바마, 빌 게이츠와 같은 미국인이 자주 등장한다. 이 책의 초판은 독일어로 쓰였을까, 영어로 쓰였을까 몇 번이나 의심했을 정도로 잦았다. 작가는 미국에서 출간되기를 희망해서 이런 식으로 자주 미국인들을 등장시킨 걸까, 아니면 자신이 영문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익숙한 걸까 오래 생각했다. 출판사에 물어보고 싶을 만큼 궁금했는데 결론은 독일어였을 것 같다는 쪽으로 기울고 끝났다. 가끔 한국어 옆에 병기된 언어가 독일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1장 아비투스가 삶, 기회, 지위를 결정한다'에 의하면 '아비투스'(당연히) 부르디외의 용어이다. 작가는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의 중심개념인 '아비투스'를 적극적으로 변용하여 7가지로 구분한다. 심리자본, 문화자본, 지식자본, 경제자본, 신체자본, 언어자본, 사회자본로 나누어 이 책의 2장부터 8장까지를 구성한다. 그리고 각각의 자본이 어떤 의미이며,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하면 최상류층(아마도 상위 1~3%)으로 올라갈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1장을 읽으며 가장 큰 의문은 부르디외가 '아비투스'를 연구하면서 '과연 아비투스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는지였다. 그리고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중산층들에게 아비투스를 열심히 공부하여 상류층으로 갈 것을 욕망해야 한다고 했는지였다. 전자의 답은 긍정일 수도 있겠지만, 후자의 답은 부정일 것 같다. 아직 구별짓기라는 두꺼운 책을 사두고 읽진 못했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부르디외의 다른 글을 읽은 바에 의하면 부정에 가까울 것 같다.

 

두 번째 의문은 저자의 '예상독자'였다. 1장에 의하면 " 상위 3퍼센트를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다. 당신과 나 같은 보통 사람을 위해 썼다. 이런 계층 사다리의 중간에 있는 이들은 성과 지향 아비투스가 강할 것이"(34)라 한다. 당신과 나에 포함되는 계층 사다리 중간에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당신'은 짐작할 수 없으니 이 책의 "" 즉 저자를 토대로 짐작해 보려 한다. 저자는 대학에서 영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년 넘게 기업과 개인에게 컨설팅과 강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집필한 책은 전 세계 1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고도 한다. 그런 저자처럼 평범한 사람은 상위 10%부터 시작해서 (넉넉잡아도) 상위 30%일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에서의 '당신'이 아니니 이 책을 읽으며 허무맹랑하다거나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저자의 '구별짓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계속 상류층과 중산층을 구별지으며 상류층으로 가기 위한 방법을 알려 주려 한다. "중산층과 상류층의 차이는 비록 희미하지만 사라지지 않"(97)기에 "높이 오르고 싶다면 끊임없이 높은 곳의 코드를 이해하고 내면화해야 한다"(110)고 안내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저자가 구분한 심리자본, 문화자본, 지식자본, 경제자본, 신체자본, 언어자본, 사회자본에 저자의 방식처럼 순위를 매기면 가장 높은 곳에 차지하는 자본은 역시 경제자본이 아닐까. 경제자본이 없으면 나머지 자본들은 쌓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혹자는 심리자본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심리자본은 "회복탄력성"이 중요하다. 회복탄력성이란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성인이 된 후에는 어느 정도는 자본과 상관관계가 있다. 정말로 끈기 있고 열정 있는 사람이 몇 년을 열심히 아르바이트하여 모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사업의 아이디어를 비슷하게 본뜬 대기업이 유통망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바람에 사업이 완전히 망했다고 치자.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잦으니.) 그가 다시 힘을 내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 쉬울까.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다시 돈을 모으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느라 전보다 더 어려운 시간을 겪을 텐데 과연 회복탄력성을 갖기 쉬울까.

 

근래에 송영준의 <공부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2020년도 수능만점자 송영준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수능만점자 15명 중에 그가 가장 주목을 받은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에 누군가가 섣불리 송영준식 공부를 하겠다고 덤빈다면 말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학교 수석 입학자(설사 저자의 평가처럼 그 학교가 대단한 학교는 아니었어도)였고 김해외국어고등학교에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입학했던 사람이다. 외고에 추천받아 합격했을 정도면 공부 재능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송영준의 공부법을 배우기에 앞서 떠올릴 점은 그를 제외한 수능만점자 14명이다. 회복탄력성을 생각하기에 앞서 떠올릴 점은 실패했을 때 다시 기회가 생길 수 있느냐의 여부다. 내가 자기계발서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전제부터 틀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아무도 사교육을 받지 않는 사회라면, 우리 사회가 실패해도 누구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사회라면 그제서야 노력과 회복탄력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재능이 뒷받침되니 자아 성찰과 자기 이해는 필수지만 말이다. (직업에 대한 서열화와 판타지가 없다면 자아 성찰도 지금보다는 더 가능해질 텐데.)

 

다시 아비투스로 돌아가, 이 책의 예상 독자가 아닌 내가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에서 배울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전세계가 얼마나 비슷해지고 있는지(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독일 교육 판타지(?)와는 달리 독일도 대학 졸업장이 계속 인기를 누리고 있고 대학교 역시 일반 대학과 명문 대학으로 나뉘고 여전히 졸업장과 학위를 대신할 대안은 없다(127-128)고 한다. 또 독일 역시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배분해보니 노동자 계급 출신의 박사들 중에서는 10분의 1만이, 부유층 출신 중에는 5분의 1이 최고경영자가 되었다(130)고 한다) 배웠고, 판단력 있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는 내 믿음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상류층의 잘 관리된 아비투스는 역량을 깊고 넓게 확장한다. 경영학에서는 이런 사람을 T자형 인물이라고 부른다. T자의 세로 기둥은 탄탄한 전문 지식을, 가로 막대는 전문 분야와 맞닿아 있는 다른 분야에 대한 얕지만 넓은 지식을 상징한다.(138)")도 알게 되었다. (내가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려는 이유는 상류층이 되고 싶어서는 아니지만 상류층도 원한다는데 상류층이 아닌 사람이라면 더더욱 원해야 하지 않겠나.)

 

2016년 독일연방은행의 가계순자산 보고서에 의하면 가계순자산이 상위 30퍼센트에 속하려면 모든 부채를 차감한 가계순자산이 약 26천만원이 있어야 하고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려면 약 65천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검색해보니 비슷한 시기의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했다. 내가 부자의 기준을 어디에서 배우겠는가. 이외에도 상류층과 중산층에 대해 상세한 숫자들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놀랍고도 놀라웠다. 나는 이렇게 부자의 기준을 숫자로 상세히 이야기하는 책을 처음 읽었으니 이 책을 읽고 쌓은 새로운 지식은 여러 모로 많았다고 하겠다.

 

이 책을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고 서평을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오랜만에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리뷰단을 모집한 후에 기대한 서평은 이런 것은 아닐 텐데 싶어 스스로를 혼내기도 해야겠다.

 

 

- 이 리뷰는 다산북스에서 모집한 <아비투스> 리뷰단에 당첨되어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고 쓴 리뷰입니다.

 

당신의 아비투스는 당신의 과거, 가족, 교육, 경력을 통해 형성된다.(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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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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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울었다. 담론1부를 읽으며, 왜 내가 앞서 읽은 세 권의 책(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숲』: 실제로 책엔 위 세 권의 책들의 내용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내용들이 많긴 하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실까, 선생님도 이제(이 강의를 하실 당시에) 늙으셨구나. 실망스럽다 했던 나는 이 책의 마지막장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을 읽으며 울었다.

 

고등학교 때 읽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보다는 대학 새내기 때 읽은 나무야 나무야가 와닿았었다. 10년 가까이 매년 나무야 나무야를 읽으며 따라야 할 발자취를 확인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선생님의 글을 품었었지만,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괜한 고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글보다 못한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알기에 혹여나 선생님께 실망하면 어쩌나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는 선생님의 실천적이지 않은 모습에 이미 실망했었다. 왜 선생님은 출소 후 사회운동에 참여하지 않으실까. 나는 그 질문의 답을 비겁함이라 해석했었다.

 

이 책의 2부를 읽으면서야 진짜 답을 알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그 답을 사유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였었다. 어리석었다.

 

달리기 경주 때문은 아니지만 실천이 부재한 감옥 속에서 독서만으로 자기의 생각을 키워나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 그 후부터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부지런히 듣게 됩니다. 아마 수형 생활 20년 동안 책 읽는 시간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는 이를테면 그 사람이 실제로 겪은 과거의 실천입니다. 그것을 나의 목발로 삼아서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26-227)

 

학교 사택에서 태어나 줄곧 학교에서, 책에서, 교실에서 생각을 키워 왔던 나에게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함한 세상을 힘겹게 살아온 그 참혹한 실패의 경험들은 육중한 무게로 나의 사유를 견인했습니다. 발밑의 땅을 잃고 공중으로 부양하던 생각들이 이제는 발목이 빠질 정도의 진흙 위에 서게 됩니다.”(227)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고, 사회의 최말단에 밀려나 있는 자기의 처지와는 반대로 지극히 보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나를 두고도 사람은 좋은데 사상은 나쁘다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먹물들은 연설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 점을 극히 경계했습니다. 우선 그 사람의 인생사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나 자신의 생각 역시 옳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수많은 삶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승인하고 존중하는 정서를 키워 가게 됩니다.”(229-230쪽)

 

선생님의 (감옥에서의) 20년은 어땠을까. 나무야 나무야를 반복해서 읽었으면서도 짐작해보려 하지 않았다. 20대 후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무기징역수로 감옥에서 산다는 건 어떤 삶이었을까. 선생님의 삶은 이해하려 들지 않으면서 선생님의 글 속에 있는 공감 가는 사유를 내 멋대로 편집하려 든 것은 아니었을까.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라면 역사를 다시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 어쩌면 서글프고 어쩌면 당연한 이 결론이 선생님을 운동과 멀어지게 했겠구나. 이제야 깨달았다. 그렇더라도, 선생님이 자본주의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기 위한 인문학 강의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면 선생님의 삶이 최선은 아니었을까. 뒤늦게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책의 ‘221장 상품과 자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친절한 해설서 같았다. 이어지는 22장부터 25장까지 선생님은 현재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내고 계셨다. 자본주의가 망가뜨린 인간(적 삶)’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의 것도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속 질문하고 계속 사유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다름이 없습니다. 독립된 개혁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당면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공자입니다.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라는 자로의 질문과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라는 공자의 답변입니다. 궁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입니다. 독립된 공간과 집단적 지성 그리고 그러한 소통 구조를 사회화하는 일이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394)

 

이 과제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지식인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품성양심”(405)이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던 20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보적인) 사상을 버렸지만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함께한 사람들은 남았다. 양심은 사람의 얼굴”(410)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 장에서야 선생님은 감옥에서의 20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이야기한다.

 

옆방의 자살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로서는 남한산성의 혹독한 임사 체험에서부터 20년 무기징역을 살아오는 동안 수시로 고민했습니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가?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때문이었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되었다가 맞은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갑니다.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습니다. 신문지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습니다. <중략>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은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이유였습니다. 여러분의 여정에 햇볕과 함께 끊임없는 성찰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작가인 반 에덴의 동화 어린 요한의 버섯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갑니다. 산책로 길섶에 버섯 군락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버섯 중의 하나를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얘야, 이건 독버섯이야!”하고 가르쳐 줍니다. 독버섯으로 지목된 버섯이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를 위로합니다. 그가 베푼 친절과 우정을 들어 절대로 독버섯이 아님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정확하게 자기를 지목하여 독버섯이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로하다 위로하다 최후로 친구가 하는 말이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였습니다. 아마 이 말이 동화의 마지막 구절이라고 기억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424-426)

 

이 부분이 나를 울렸다. 선생님의 감옥에서의 20년이 가슴 아파서(가슴에 와닿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셔서’,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의 이유로 살아야 자유가 된다는 말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도 연관된다.

앞으로도 내 멋대로살 테고 내 가치관에 따라 살 수밖에 없겠다. 그러면서도 가끔 사람들이 하는 말에 흔들렸고 고민했다. “햇볕과 함께 끊임없는 성찰이 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왔다면 이제 그만 흔들려도 좋을 일이다.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나를 감동시켰다.

 

이제 환상과 거품을 청산”(420)하고 환상과 거품으로 가려져 있던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직시하는 일”(421)사람을 키우는 일”(422)을 통해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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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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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다. 제목과 이어보자면, '배움은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다' 가 되겠다.

비판적 성찰은 무엇인가. 이 책의 서문에 친절하게 제시되어 있다. 우선 "무엇도 자명한 것은 없다"는 전제를 세워야 한다. 즉 "진정한 배움을 위해서는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6쪽)

전제를 세운 후 세 가지 단계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묘사적 단계, 분석적 단계, 비판적 단계"다. 스스로 묘사하고 분석한 후에야 비판이 가능하다.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사유에 근거 해 '판단'하며 그 판단이 개혁과 변화를 모색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배움이 가능하게 된다."(7쪽)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진짜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이 책은 저자의 위와 같은 생각이 담긴 91편의 에세이집이다. 1장은 "살아감, 그 배움의 여정"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계속 배울 수밖에 없다.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가.

"자신이 아닌 어떤 사람의 모조품이 되지 마라. (…) 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발자국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21쪽)

저자는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혹은 가꾸어가야 할 대상)은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대체 불가능한 유일성"을 가진 나라고 말한다. 이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다. '내가 나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를 앎으로 인해 '타자'의 존재도 배운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자기 사랑'을 배우고 연습하지 않으면, '타자 사랑'을 하는 법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자기 사랑'이란 자동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89쪽)

"자신의 주변과 연계하고 반응하는 방식이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면서, 사실상 각기 다른 모습들이 특정한 사람에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모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의 나'가 아닌 것이다."(30쪽)

'나'에게는 '타인과는 너무나도 다르고 특별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수없이 많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나'로 성장한다. 즉, 나만 사랑받을 존재라고 주장하는 나르시시즘과 다르게 '나를 배운다'는 의미는 '연대'를 가능케 한다. 

2장이 "살아 있는 텍스트, 타자의 얼굴들"이 되는 이유다. 나를 들여다 보는 과정에서 "타자의 얼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법을 배운다면" 나와 너와 다르다고 단정내릴 수만은 없게 될 것이다.

타자의 얼굴을 배우는 행위는 "사랑이 치열한 생명 긍정의 희망"(3장)임을 알게 되고 "인식의 사각 지대를 넘어"(4장) "감히 스스로 생각"(5장)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책 속에 길이 있"으니 계속 배우"려는 시도다.

"인간은 누구나 각가의 인식록적 한계는 물론 자신의 정황에 한계 지워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부단한 배움'이 없을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지게 된다. 배움을 멈춘 인간은 '나'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그만 배워라"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배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먼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276쪽)

"한 권의 '좋은' 책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맹목적 '정보'가 아닌 다층적 '세계들'이다. '나의 존재함'이란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개별적 나'는 타자와의 절대적 분리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좋은 책은 바로 나-타자-세계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담은 '다층적 세계들'과의 만남을 담고 있다. <중략> 이 점에서 인간은 '홀로'이면서 동시에 '함께 존재'라는 것, 그 '홀로-함께 존재'로서 이 세계에 개입해야 하는 책임성. '좋은' 책이 우리에게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통찰이다."(278-279쪽)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계속 배우는 과정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인식함과 동시에 나라는 존재의 한계를 깨닫기 위해서다. 한계가 있는 나는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이 세상에 책임이 있음을 배운다. 독서는 그런 과정에 이르도록 돕는 수단이다.

그러다 보면 대안"을 생각하게 된다. 나만 잘 살면 된다고 말하고, 끊임없이 타인을 배척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꿈꾸고 실천하고자 무수한 시도를 하는 '소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희망의 근거는 '성공과 승리의 보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보다 나은 대안 공동체를 위하여 씨름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과감히 해내는 바로 그 '과정' 속에 있다. 대안을 꿈꾸는 이들은 확고한 성공의 보장 때문이 아니라, 그 성공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 대안이 꿈꾸는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모험을 감행하는 이들이 꿈꾸는 대안적 세계에 대한 열정으로 변화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367-368쪽)

그 가능성을 희망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살아가는 삶은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불투명하여 수없이 좌절하게 만든다. 좌절한다 해도 멈출 수 없다. 계속 배우며 살아갈 뿐이다. 그 끝에서도 끝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저항'은 그 자체로 '대안'이다.

덧- '5장 감히 스스로 생각하라' 중에서 "정황불감증, 그 정서적 폭력성에 대하여"는,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K씨가 트위터에 올린 글에 관한 저자의 사색이 담겨 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하여 공감했다.

실제로 (그가 신영복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신영복 선생님의 죽음이라는 '정황'에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저자의 말대로 "정황불감증"은 "정서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비인간화"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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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우리가 독서에 대하여 생각했지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
탕누어 지음, 김태성.김영화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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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누구에게 권해야 하는가. 읽으며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문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책이 별로여서 그러냐고 묻는다면 정색을 하며 '그럴 리 있겠냐'고 대답할 것 같다.

 

"명함은 없지만 누군가가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전문 독자(professional reader)'라고 대답"(485쪽)하는 탕누어가 쓴 '열독 이야기(이 책의 원제다.)'가 어떻게 별로일 수 있겠는가. 그는 내가 만난 '가장 치열한 독서가'다.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들먹이며 독서에 대해 안 들어도 되는 말(글)을 떠들지만, 탕누어는 '내공으로 증명하는 사람'이다. 그의 글에는 '독서 내공'이 촘촘하게 담겨 있다. 번역자의 말대로 "다소 뇌를 지치게 만들 수도 있"(487쪽)을 만큼 깊다. 대만에서는 10년 전(2007년)에 출간되었는데 이제서야 우리나라에 번역되는 것이 이상할 만큼 '특별한 책'이다.

 

이런 탕누어의 책을 누구에게 권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유는 이렇다.

 

이 책을 '깊이 있게' 이해 혹은 공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탕누어처럼 유년기부터 계속 치열한 독서를 이어와야 하고, 탕누어가 수도 없이 언급하는 '마르케스, 보르헤스, 벤야민, 스티븐 제이 굴드, 칼비노'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작가만큼 알기 때문에 읽는 것은 아니다. 또 작가만큼 알아야 그 책을 독해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탕누어 역시 이 책의 예상 독자를 '독서에 관해 궁금한 성인 독자면 누구나'로 잡았을 것도 같다. ("이 책을 쓰게 된 의도는 원래 사람들에게 책 읽기를 권장하면서 그 과정에서 곧잘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5쪽)이며 "도대체 독서가 필요한 것인지 필요치 않은 것인지 스스로 자세하고 분명하게 생각하는 이야기로 써낼 수 있을 뿐"(6쪽)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각장마다 마르케스의 『미로 속의 장군』이 인용하면서 글을 전개하고 보르헤스, 벤야민, 스티븐 제이 굴드, 칼비노를 수시로 호출하는 그의 글쓰기 기법은 독자를 다소 피로하게 만든다. 쉴 틈 없이 빡빡하게 들어찬 탕누어의 독서 내공은 독서 초보일수록 읽기의 피로감을 과중시킬 것 같다. 의도치 않게 '전문독자'로서의 내공이 넘치게 드러났을 뿐이다. (아마 탕누어는 이런 것이 문제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런 피로감을 이겨낼 수 있는 독자라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탕누어의 독서 내공'이 궁금한 독자라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탕누어'야말로 (연구자가 아닌) '순수 독자'가 '독서'로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토록 치열하게 읽는 독자가 말하는 독서론은 '스스로를 독서가라 칭하는 한국의 어설픈 독자 백 명'이 떠드는 이야기를 전부 가져다 조합해도,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줄 테니까.

 

이 책은 머리말과 부록을 제외하고 0장을 포함하여 총 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와 책, 독서의 지속 문제, 독서의 전체적인 이미지, 독서의 곤혹, 독서의 시작과 그 대가, 독서의 시간, 독서의 기억, 독서의 방법과 자세, 독서의 전문성, 유년의 독서, 마흔 이후의 독서, 독서의 한계와 꿈, 소설 읽기, 독자로서의 생각'이 각장의 (소)제목이다. 독서에 관하여 궁금하게 생각할 법한 이야기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는 "0장 서와 책 -벤야민적인, 정리되지 않은 방"에서 독서가 안정된 행위가 아니라 탐닉성과 도약성을 동시에 지니는 변화무쌍한 행위에 가깝다고 말한다.

 

"독서는 물이 흐르듯이 날과 달, 계절과 세월의 교체에 따라 들쭉날쭉 변화무쌍하면서도 출퇴근과 삼시 세끼 식사에 융화된다. 잠이 오지 않거나 어딘가 바삐 가야 한다면 읽던 책을 바닥에 내려두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서 자체가 탐닉성과 도약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항상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나타난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그 책으로 인해 다른 책을 펼치게 되어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게 다반사다. 매일 심경의 미묘한 변화 때문에 읽고 있던 책을 다른 것으로 바꾸기도 할 테고, 글을 쓰다가 한 가지 의문이 생겨 한꺼번에 열 권 내지 스무 권의 책을 뒤적이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독서의 상황과 유형은 한없이 다양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독서란 깨끗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22쪽) 

 

독서의 여정에서 우리가 따라갈 것은 의문이라고도 말한다.

 

"의문은 독서 전에 생긴 것이든 독서 과정에서 생긴 것이든 모두 독서를 이끌어주는 동시에 종종 독서의 여정에서 유일한 지도 역할을 한다. 책의 세계에는 이로 인해 독특한 경로가 생겨나고 책 읽는 사람은 그 경로의 부분적인 모습만 펼쳐게 된다."(30쪽)

 

굳이 0장을 넣은 이유는 이 책의 가장 큰 줄기를 설명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전문 독자 탕누어는 의문을 따라 정리되지 않은 독서의 길을 갔고, 또 그런 과정으로 독서를 안내하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1장부터는 실제로 독서에서 부딪히는 문제로 들어가 이야기한다.

 

사실 독서를 '시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독서를 지속하는 일이다.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독서가 순전히 심심풀이가 되는 시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는 과정에서 극복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없애버릴 수는 없는 어려움은 여전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문 밖에는 꽹과리 소리와 북소리가 하늘을 찌르며 사람들을 공격하는 괴로운 세계가 존재한다. 독서와 심심풀이가 서로를 배척하면서 용납하지 않고 있지만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항상 없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일부 사람은 분명하게 묘사할 수 있지만 대개는 몹시 애매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이다.

 

책을 읽는 이들은 세계와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꺼지지 않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호기심과 상상력은 지나치게 체계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혐오한다. 다시 말해 그들과 이 세계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소박한 연계, 그윽하고 미묘한 대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자 세계의 일부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수시로 회의를 품지만 시종 손을 놓치 않는다.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반드시 볼리바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세계와 사람들을 바꾸려는 큰 꿈을 추구하면서 그 해답과 방법 그리고 역사적 결함을 찾아야 한다."(61쪽, 1장 좋은 책은 갈수록 줄어드는 걸까? - 독서의 지속 문제)

 

물론 이런 독서도 "가능성이지 해답은 아니다." "이런 가능성이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하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가능성이야말로 절망의 반의어다. 가능성은 영원히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포착할 여지를 남겨준다."(62쪽)

 

그렇다면 계속 독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독자들은 책 속의 세계에서 더 큰 유혹을 받을수록 상대적으로 눈앞의 현실 세계에서 더 멀어지고, 책 속의 갖가지 훌륭한 세계를 이해하면 할수록 눈앞 세계의 빈약함과 초라함, 무미함과 불의를 더 쉽게 알아차리며, 심지어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더 자극적인 사실은, 독자들이 보고서 보물처럼 여기는 더 좋은 세계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대개 하나하나 '패배당한 세계'라는 것이다. <중략>

 

책 속의 세계가 더 훌륭하며 그 안에 사는 것들이 더 즐거울수록 혼탁하고 오염된 현실 세계의 공기 중에서는 살아가기가 더 힘들어진다. 결국 독자는 두 배의 속도로 눈앞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셈이다. <중략>

 

독자는 확실히 자연스럽게 어떤 고독감을 느끼고 좀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더 선명하고 구체적인 것을 감지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의 언어란 원래 이처럼 간단하고 초라하며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실 세계에 내놓아진 유한한 우리가 실제로 보는 풍요로운 세계를 우리는 아예 묘사할 수 없을 것이고, 설득하거나 변론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82-83쪽, 2장 의미의 바다, 가능성의 세계 - 독서의 전체적인 이미지)    

 

"남들이 지금 이 순간의 '이 세계'만 갖고 있을 때 그는 하나 또 하나 교차되고 호응하며 계속 파생되는 다른 세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주 깊고 무거운 풍요로움의 행복이지만 이렇게 많은 행복을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로서 상당한 인내력과 체력을 요구한다. 게다가 이처럼 많은 행복으로 충만한 마음과 몸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어 한밤중에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외롭고 고독하다.

 

이리하여 이렇듯 힘들고 고독한 일이 수시로 독자들 마음의 지혜와 인내심을 시험하고, 눈앞의 세계 및 사람들에 대한 독자들의 제한된 동정과 그리움을 느끼도록 시험한다. <중략> 독자는 자신의 익숙한 실존 세계에 서 있지만 자신을 이방인이라 느끼게 된다. 언어마저도 이방의 언어다."(84쪽, 2장 의미의 바다, 가능성의 세계 - 독서의 전체적인 이미지) 

 

내가 왜 항상 이방인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내 언어는 소통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명확하게 설명한 글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외로워서 시작한 독서가 끊임없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했던 내 이야기를 탕누어만큼은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나쁜 책은 왜 이렇게 많아서 나를 분노케 하는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탕누어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세계는 만신창이가 된 실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독의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책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전부 스린에 있는 폐지 공장으로 보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언젠가는 가려지지 않는 질병의 증상으로서 진실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이 세계를 얼마나 형편없는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는지를 증명하는 증거물이 될 수도 있다."(136쪽, 4장 첫번째 책은 어디에 - 독서의 시작과 그 대가)

 

 

그래. 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그런 책들은 계속 출간될 것이다. 그렇다면 탕누어처럼 생각하는 편이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유리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 시간에 한 권'을 읽는 '독서법'이 많이 팔리는 상황에 탕누어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죽어버린 부호를 하나하나 깨우고 그 시의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원저자가 걸었던 길을 반복하면서 그가 본 것을 보고, 그가 생각한 것을 생각하며, 그가 고민했던 것을 고민해야 한다."(187쪽, 5장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면 - 독서의 시간) 

 

"아무리 훈련이 잘되어 있고 소질이 있는 중량급 독자라 해도 갑자기 책을 펼쳐 읽으면서 처음부터 텍스트를 전체적으로 충분히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따라서 어떤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그 책과 저자로 하여금 계속 말이 없는 죽음의 상태에 남아 있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아니라면 반드시 다시 읽는 행위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준비가 자신을 정확한 사람으로 만들어 다시 책을 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르헤스의 말에 담긴 진정한 함의일 터이다. 그는 일찍이 「책」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글에서 자신의 독서와 관련하여 "나는 늘 광범위하게 책을 읽는 것보다 몇 권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 편이다. 나는 여러 권의 책을 폭넓게 읽는 것보다 몇 권의 책을 새롭게 다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시 읽기 위해서는 먼저 한 번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213쪽, 6장 외워야 할까 - 독서의 기억)

 

그렇다면 탕누어는 '재미있어서' 계속 읽는 것일까.

 

"독서에는 본질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통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중요한 것들은 곤경 속에서만 발생하고 잔존한다. 이를 일부만 조금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없다."(260쪽, 8장 왜 이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의 전문성)

 

"전문적인 독서에는 부득이하게 강제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스스로 감지한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초점과 색깔이 있다고 해도, 이는 장시간 형성된 사유의 전통에 포함된다. 이런 사유의 전통이 그 문제에 모종의 견고함과 엄숙함을 부여하기 때문에 개인의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이를 없애버릴 수 없는 것이다. 전문적인 독서에는 또 상당히 무미건조한 부분이 있다. 전문적인 독서를 위해선 사유의 전통을 충분히 이해해야 하고 이 사유의 흐름 가운데 자신은 어디쯤 서 있는지, 남들은 또 어디쯤 서 있는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긴 사유의 전통이 지니는 가설과 언어, 방법 및 역사의 연혁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과거에 실패한 사례와 그 내용도 매우 중요하다 과거의 실패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이 어떤 계시(예컨대 어떤 잠재력을 갖는 실패)이든 아니면 교훈(이 길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또다시 뼈아픈 대가를 치르지 않게 해주는 것)이든 간에, 보통 이것은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와 대등한 다른 사유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부분도 집착과 병적인 증상까지 포함하여 이 영역의 현상들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우리의 이해에서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274쪽, 8장 왜 이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의 전문성)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뒤를 돌아보면서 '학점을 보충'하는 일, 너무나 황급히 서둘러 쫒아가느라 놓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의 틈들을 견고하게 메우는 일, 과거에 다른 사람들(다른 사람들이라서 다행이다)이 처참하게 실패했던 경험을 주워 모아 가슴에 새기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타이완의 독서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다."(274쪽, 8장 왜 이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의 전문성)   - 타이완을 '한국'으로 바꿔 넣어도 될 것 같다.

 

탕누어는 "전문적인 독서"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 대신 "독서를 계속 지속해가는 것"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탕누어의 생각처럼 나 역시 애시당초 독서는 '재미'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의문'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는가. 사회는 정말 바꿀 수 없는가. 아니. 나는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 그런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서를 이어가는 힘이 되게 한다.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 것인가. 서두에서 던진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옮긴이의 말'을 포함하여 487쪽에 달하는 이 빡빡한 책을 누가 읽었으면 좋겠는가.

 

'독서'가 '자기계발'이라 믿는 사람들, 독서를 많이 하면 성공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 '지적 허영심'으로, '재미'로 책을 읽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유년기부터 독서를 했든 안 했든, 마르케스, 보르헤스, 벤야민, 스티븐 제이 굴드, 칼비노를 몰라도. 이 책이 '독서 판타지'를 깰 희망이기에 서두에 내가 쓴 모든 이야기를 지워버리고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서평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미완의 글로 남는다고 해도.

 

덧- 옮기고 싶은 구절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줄이고 줄였다. 탕누어라는 전문 독자가 있는 한 그가 멈추지 않고 계속 읽는 한, 나는 조금 덜 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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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17-07-22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엔 글이 안 붙어 있는데 책으로 가면 왜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ㅜㅜ

cyrus 2017-07-23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는 이의 뇌를 지치게 만들고 싶을 정도의 좋은 글을 쓰고 싶군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쓰면 읽기 힘들어서 안 읽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연우주 2017-09-06 14:34   좋아요 0 | URL
너무 늦게 답변을 답니다. ^^;;; 뇌를 지치게 하는 글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글 같아요. 다만 그럼에도 좋은 글은 읽히는 것 같습니다. ^^
 
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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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자살은 왜 이토록 흔한 죽음이 되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이 고통스러울 때 자살을 생각해봤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자살을 실행할 세부적인 계획을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관념 속에서 막연하게 죽어버리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죽음이 구체적인 옷을 입고 나타난 건 몇 년 전 한 분의 죽음을 가까이서 목도했던 때부터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죽음은 복잡했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죽은 사람과 관계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고통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오래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어쩔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남는 자들의 고통이 이토록 큰데, ‘선택한 죽음을 대할 때의 고통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10년 넘게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인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천정환의 <자살론>은 그런 고민들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자살은 고통과 해석 사이에 있는 무엇이다. 고통과 해석은 자살과 관계하는 주체성의 두 계기, 즉 경험과 인식을 뜻한다. 또는 자살의 실재표상된 것에 대응한다. 인간은 자살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서 고통을 경험하며, 고통을 회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자살한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의 죽음과 죽음에의 의지를 해석하며 삶의 의미를 성찰한다.”(26)

 

이 책에서 다루는 자살은 한국인의자살이 아니라 한국에서의자살이다. ‘한국인의가 아닌, ‘한국에서의라는 관형구는 자살하는 사람이 놓이는 삶의 구체적인 조건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중략> ‘한국인 고유의심성과 그 집단적 발현태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특정한 시대의 사회문화정치경제의 상황과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집합적 심성의 구조가 있을 뿐이다.”(36)

 

작가는 한국에서의자살을 계보학적인 관찰을 통해 한국 사회/문화의 어떤 문제점과 자살이 연관되어 있는지 살피는 한편, 자살행동에 연루된 여러 가지 문제상황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계층젠더 주체들에 작용하는지도 서술”(34-35)한다.

 

조선 시대부터 식민지 시기, 그리고 현대의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사례를 정리하고 제시하며 해석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런 시도들은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말로 타인의 자살을 막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또한 자살이 자살자의 개인적이거나 내면적인 문제나 정신질환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인 변인들과 맞물려 일어나는 일임을 지적한다.

 

“(대부분의) 자살자들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진정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최후의 궁지에 몰려,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최후로 타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자살한다. 자살생각을 하는 순간 그가 누구든 일종의 사회적 약자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자살 원인을 제공한 상황과 구조가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그리고 자살은 대부분 일종의 차악의 선택이다. 또한 모든 자살에는 반드시 원인을 야기한 복잡하고 구체적인 관계의 상황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 우울과 고립을 줄여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고, ‘미래를 살아갈 용기를 줄 수 있다.”(285)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자살은 늘 타인의 문제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 용기로 살지같은 말로 자살자를 루저로 인식하는 시선은 폭력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유 없이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폄하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없다.

 

어쩌면 삶을 사랑했을 자살자들을 위해(혹은 앞으로 자살을 선택하고 싶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자살예방법이나 자살예방센터, 혹은 자살예방핫라인과 같은 전화 상담이 아니다. 자살을 야기하는 복잡하고 구체적인 원인에 대한 대책이다.

 

자살이 만연한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중략> 즉 자살을 야기하는 사회구조를 고치고 삶의 질행복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을 고쳐나가는 것, 특히 학교나 직장에서 경쟁으로 야기되는 소위와 폭력의 상황을 줄이는 것, 자살위험군에 속하는 노인과 빈곤층 및 정신장애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물질적정신적 지원을 확충하는 것, 그리고 종합적인 긴급구제를 행할 수 있는 예방센터를 전문적인 인력의 힘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물론 자살에 대한 바람직한 앎을 증대시키는 것도 선행과제다.”(325)

 

여기, 지금 한국에서의 자살은 흔한 죽음이다. 흔해질수록 자살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도 점차 줄어드는 것 같다. 왜 자살은 이토록 흔한 죽음이 되었는가. 이런 현상을 마냥 지켜봐도 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 책을 읽으며 같이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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