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 진정한 위대함

2002년 1월 5일  조선일보

20세기 미국문학 시간에 단골로 읽히는 소설 중 학생들에게 제일 인기있는 작품은 단연 스콧 피츠제랄드 (F Scott Fir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1925)이다. 주제가 무겁지 않고 영어 문체가 비교적 쉬운데다가 무엇보다 학생들이 동감할 수 있는 ‘연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히기 전에 나는 학생들에게 제목에 있는 ‘위대한’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위대함’은 어떤 속성을 말하는가? 그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에 대해 학생들은 ‘자기를 희생하여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 ‘부, 명예, 권력에 개의치 않고 이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 등 의견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작가 피츠제랄드가 생각하는 개츠비의 ‘위대함’은 무엇일까?

작품의 화자 닉은 중서부에서 뉴욕으로 와서, 롱아일랜드 교외에 자그마한 집을 빌려 산다. 그의 이웃에는 거부라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개츠비의 저택이 있고, 그곳에서는 주말마다 성대한 파티가 열린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개츠비는 군인시절 만났던 부잣집 딸 데이지와 결혼을 약속하나 그가 떠나간 동안에 그녀는 톰 뷰캐넌이라는 재벌과 결혼한다. 개츠비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책에 확실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밀주업으로)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어, 그녀의 집 가까이에 저택을 사들이고는 매일 밤 파티를 열고 언젠가 데이지가 와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꿈꾼다.

우연히 닉이 데이지와 육촌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안 개츠비의 부탁으로 닉은 개츠비와 데이지의 재회를 주선한다. 5년 만에 데이지를 만난 개츠비는 그녀가 이제 부자가 된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에 추호도 의심이 없다. 그러나 어느 무더운 여름 날, 뉴욕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운전하던 개츠비의 차가 톰의 정부(情婦)를 치어 죽이고 달아나자, 개츠비가 차를 몰았다고 생각한 그 여자의 남편은 개츠비를 찾아가 사살한다. 데이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편과 여행을 떠난다. 성황을 이루었던 개츠비의 파티와 달리 닉 외에 겨우 한 명의 손님만 참석한 쓸쓸한 장례식이 끝나고 닉은 환멸을 느끼고 다시 중서부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를 사랑한 개츠비의 삶은 결국 가엾고 허무한 것이었다. 그러나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학생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속성을 개츠비에게서 찾아볼 수는 없다. 그는 결국 돈 때문에 떠나간 사랑을 돈으로 찾겠다는 단세포적 발상으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불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불법축재자였으며, 이미 흘러간 과거를 되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한 비현실적 몽상가였고, 사랑의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아적 낭만주의가였을 뿐, 결코 ‘위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피츠제랄드는 책의 첫부분에서 개츠비에게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갖다 붙인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아무리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삶 속의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사랑에 실패해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낭만적 준비성’, 그리고 ‘삶의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20년대 혼돈의 시대, 미래에 대한 이상을 찾는 ‘아메리칸 드림’이 꿈과 낭만을 잃어버리고 물질만능주의와 퇴폐주의로 타락해가는 시대에 개츠비의 순수한 꿈, 순진무구한 희망은 하나의 ‘위대함’이었던 것이다.

2002년… 우리에게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새 해이다. 삶의 횡포, 혼돈의 시대에 이리저리 채이고 휘둘려도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시 한 번 희망을 꿈꾸는 개츠비의 위대함이 새삼스럽다. 젊고 순수한 우리 학생들이 꿈꾸는 ‘돈과 권력, 영웅심에 연연하지 않고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진정한 위대함을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새해였으면 좋겠다.

/장영희·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미 보스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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