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 그 사람을 가졌는가

2003년 4월 12일  조선일보

“선생님, ‘인생성공 단십백’이 뭔지 아세요?” 학생이 물었다. 모른다고 답하자 학생이 말한다. “한 평생 살다가 죽을 때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 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래요. ”

나는 재빨리 내 삶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따져 보았다. 한 명뿐 아니라 운 좋게도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대학까지 훌륭한 스승들을 여럿 만났고, 책읽는 게 업이니 내가 좋아하는 책을 백 권 아니라 이백 권도 더 댈 수 있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열 명의 진정한 친구’는 좀 무리이다. ‘진정한 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함석헌 옹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말한다.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 웃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그 사람, 온 세상 찬성보다도 ‘아니오,’ 하고 머리를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아니오, 가지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 적이 없고,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하며 구명대를 내놓기는커녕 더욱 움켜쥐고 남보다 조금 더 앞서기 위해 죽기살기로 뛰면서 주위 한 번 제대로 쳐다본 적 없이 살았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아동문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1885’은 헤밍웨이가 “모든 미국문학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나왔다”라고 단언할만큼 19세기 미국문학의 최대걸작 중 하나이다. 집도 절도 없는 13세 소년 헉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행실이 천한 악동으로 여겨져서 동네 어머니들에게는 눈엣가시요, 아무런 구속없이 자유로우니 동네 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주정뱅이 폭력꾼 아버지를 피해 미시시피강의 섬으로 도망간 헉은 그곳에서 가족을 찾기 위해 도망친 이웃집 노예 짐을 만난다. 짐의 추적자들이 닥쳐들자 둘은 함께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따라 노예제도가 없는 주로 도망가기로 한다.

뗏목 여행 중 강가의 마을에 들르며 헉이 경험하는 바깥세상은 위선과 타락,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여러 위험을 겪으며 서로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과정에서 헉은 동물처럼 취급받는 노예 짐으로부터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가족애를 느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한 구석에는 늘 노예가 도주하는 것을 돕고 있다는 죄의식이 있다. 사회인습으로부터 얻어진 편견과 자신의 순수한 동정심과 정의감 사이에서 헉은 괴로워한다.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책의 후반부에서 사기꾼들이 짐을 몰래 팔아 넘긴 것을 알고 헉이 짐을 구하러 갈 것인가 아니면 짐의 소재를 짐의 소유주에게 알릴 것인가 하는 지독한 고뇌에 빠지는 데 있다. 주위로부터 위선적이고 근본주의적 신앙을 강요받은 헉에게 짐을 구한다는 것은 아주 사악한 일이요, 문자 그대로 ‘지옥불‘에 빠질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헉은 짐의 주인 왓슨 양에게 편지를 쓰지만, 친구 짐이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고 분연히 편지를 찢으며 말한다. “차라리 내가 지옥에 가는 게 나아!” 결국 헉은 자신이 금방이라도 지옥불에 빠질 것을 각오하고 짐을 구하러 나선다.

사회인습과 기성도덕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주제로 하지만, 이 책의 진수는 짐에게서 참으로 소중한 ‘그 사람’을 발견한 헉의 도덕적 승리이다.

이제 내 삶의 중턱을 훌쩍 넘어버렸는데, 나는 “마음이 외로울 때 ‘너 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한 사람”을 가지는 게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높고 편한 자리’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여지껏 모르고 살아왔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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