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8년 4월 1일자

[책읽는 경향]경북에서-체 게바라 평전  
ㆍ눈을 뜨고 꾸는 꿈, 희망을 노래하다

아내와 싸웠다. 나더러 뼛속까지 보수의 냄새가 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나는 집안에서만 보수다. 집 밖으로만 나가면 누가 뭐래도 진보다. 예술은 모름지기 실험정신이 있어야 한다. 정치는 좌파가 좋다.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가난한 자와 늘 함께 한다. 나는 부자는 별로다. 언제나 톡톡 튀는 사고를 좋아한다. 이래도 진보가 아닌가.


나를 진보의 세계에 첫발을 디디게 한 책이 바로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이다. 젊은 날 소록도에 봉사활동을 갔을 때 언제나 스승이었던 분이 선물해주신 책이었다.

감동은 대단했다. 체는 결코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유머가 넘치는 휴머니즘의 전도자였다. ‘영혼의 순례자’였고, ‘전사(戰士) 그리스도’였다. 그는 꿈을 사랑하고 꿈을 말한다.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우리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눈을 뜨고 꾸는 꿈, 나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이 책이 있어서 그해 소록도의 생활은 즐거웠다. 은퇴하면 쿠바로 가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을 틀어놓고 예쁜 카페라도 하나 차려볼까 한다. 카페 이름은 ‘디어 아바나’. 나의 불가능한 꿈.

〈 노병수 | 영남사이버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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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8년 3월 22일자

참된 독서는 완독보다는 총체적 이해

장정일의 책 속 이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지음/여름언덕·9800원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모범 독서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이라는 상식을 뒤집는다. 나아가 파리 8대학교의 문학교수면서 정신분석학자이기도 한 지은이는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 보아야만 그 책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한 책들에 대해서도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독서 문화를 뿌리째 흔드는 반달리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겸손해진다면,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도 용기를 내어 말해야 할 까닭을 찾을 수 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고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극히 일부”만을 읽을 수 있을 뿐이라면, “언제라도 자신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놀랍게도 지은이가 말하는 이상적인 독서는 대충 훑어보거나 흘낏 제목만 보고 마는 일이다. 그러면서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진정한 독자라면 바로 “그 관계들을 파악”하고자 해야 하며 교양인이 알아야 하는 것은 책들간의 “소통과 연결선”이지 “특정의 어떤 책”이 아니다. 기상천외의 발언 같지만, 책들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굳이 모든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각종 서평이나 소문을 통해 또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를 통해 독서 아닌 독서를 하고 있다.


전통적인 독서인이든 간접적으로 책에 대한 정보를 얻는 비독서인이든 자신의 내면에는 한 채씩의 이상적인 도서관이 있고 거기엔 또 한 명의 이상적인 사서가 거주한다. 그래서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나 아나이스 닌의 소설을 나름으로 분류할 수 있고,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자신이 습득하고 있는 “총체적 시각” 속에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읽지 않은 저 작가들의 작품을 국가(언어권)와 장르별로 분류하고 전체성 속에서 평가하며, 자신의 호오를 발동한다. 읽지 않고서도!







 


» 장정일의 책 속 이슈
 
사람들이 보통 책 얘기를 할 때는 그 책에 대한 내용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책이 제공한 모티브를 얘기하는 것이다. 때문에 완독 여부가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장권이 아니다. 오히려 지은이는 폴 발레리가 그랬고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듯이,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자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책을 멀리 하거나 제대로 읽지 않는 것이 좋다고 유혹하기까지 한다.



복거일이나 고종석의 저작을 읽으면서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책을 온전히 읽은 게 되지 못한다. 참된 독서란 내 앞에 주어진 개별적인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생성한 유·무형의 생산 현장 전체를 읽는 일이다. 강조하기가 새삼스러울 만큼 평범한 이 교훈이야말로 피에르 바야르가 말하고자 했던 역설적인 주제라고 감히 말한다면, 지은이가 의도하지 않은 나의 오독일 것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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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칼럼]정치의 높은 차원
입력: 2008년 03월 26일 17:54:58
 



 

이라크 전쟁 초기에, 유럽에서는 한 때 세계적인 영향력을 감안하여 미국 대통령 선거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농담 비슷한 견해들이 개진된 일이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하여 현재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금융위기를 보아도 오늘의 세계에서 한 나라의 일이 그 나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지금 미국에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이 한창이다. 그런데 이번의 지명전에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나선 것은 현실 정치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것은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역사의 새로운 전기, 새로운 열림을 신호하는 것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흑인으로서 현실적 당선 가능성을 가진 최초의 대통령 입후보자가 될 수 있고, 물론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또 그의 출신과 성장 배경은 지금까지의 정치 지도자의 상례를 벗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 유학한 케냐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백인 미국인이었다. 아버지는 그 후 이혼하고 다시 케냐로 돌아갔고,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유학생과 재혼하여 자카르타로 옮겨 갔다. 이에 따라 그는 여섯 살부터 열 살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살다가 교육 때문에 하와이의 조부모께로 돌아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8년 간 백인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정치의 이상’ 보여준 오바마

자서전적 저서에서 그는 고등학교 과정 등에서 자신을 국외자로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완전한 미국인이 되는 데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던 것 같다. 대학에서 그는 인종주의의 불의에 항의한 리처드 라이트나 말콤 엑스와 같은 미국의 흑인 작가와 사상가들, 또 프란츠 파농과 같은 국제적인 민족해방 사상가들의 저작을 읽고 흑인과 진보주의 동아리에서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노력했다.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대 법률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시카고의 흑인가에 살면서 그들과 애환을 함께했다. 그가 읽고 공감한 것은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작가와 사상가의 저술이었지만 그는 반항 일변도의 입장이 피곤하고 공허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기존 사회에의 동화도 일방적 요구였다. 그가 가장 크게 공감한 것은 말콤 엑스의 ‘자아재창조’의 개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미국인으로 정체성을 구축해가면서도 케냐의 아버지를 잊지 않았다. 그가 케냐를 방문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이지만 그는 케냐에서 그의 이복형제들의 존재를 확인한 뒤 그들을 만나고 케냐에 있는 그의 뿌리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 뿌리의 다른 가지들인 그의 이복형제들은 교육이나 혼인으로 독일, 영국, 러시아 등지로 연결되었다.

이번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바마의 인종적 배경이다. 그러나 이 점은 지금까지 정식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다가 지난 18일 필라델피아에서의 연설로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가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인종 문제 자체보다 그가 속한 시카고의 트리니티 교회의 제러마이야 라이트 목사와의 관계였다. 쟁점이 된 것은 라이트 목사가 흑인들과 세계에 대하여 저지른 미국의 잘못을 언급하면서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는 애국 송가의 구절을 뒤집어, “신이여 미국을 저주하소서”라고 말한 일이었다. 오바마는 있을 수 있는 정치적 대가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목사와의 관계를 단순화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설명했다. 라이트 목사는 그를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미국 흑인의 역사적 고통을 성경에 이야기되어 있는 수난의 기록과의 관련 속에서, 더 넓은 인간적 깊이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오바마는 동시에 라이트 목사의 극단적 정치적 입장으로부터 자신의 거리를 분명히 했다. 흑인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노보다 공동의 노력으로 그들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다-그는 그의 정치적 입장을 이렇게 해명했다.

오바마의 연설에 대한 반응은 착잡할 수밖에 없겠지만 뉴욕타임스의 사설은 그의 연설이 미국의 정치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고 높이 평가했다. 현실을 인정하고 그 해결을 모색하는 생산적 토의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이 연설이 인상적인 것은 정치를 더욱 인간적인 사회의 실현이라는 이상으로 열어 놓았다는 점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한 시민적 권리” “자유, 정의 그리고 연합 또는 하나됨”은 미국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오바마는 이 사실에 언급하면서 특히 인민의 “더 완전한 연합(하나됨)”을 기하려는 것이 헌법 제정의 목적이라는 미국 헌법 전문의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언급한다.

그에게 인민의 하나됨은 더욱 자유롭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공동 노력을 통하여서만 이룰 수 있는 종착점이다. 국민의 하나됨은 당연한 현실이 아니라 부단히 근접되어야 할 이상인 것이다.

이번 연설에는 물론 더 구체적인 정치적 현실 과제에 대한 언급도 들어 있다. 흑인 그리고 모든 계층 사람들의더 인간적인 삶의 확보를 위하여 그들은 고르게 의료, 교육, 직업, 복지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기업 이익의 추구만을 생각하는 기업 문화를 바로 잡아야 하고, 그 로비 활동에 좌우되는 정치 체제를 더 민주적이고 투명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를 여는 신호될 것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오바마의 필라델피아 연설에 대한 반응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단순화된 인종주의나 애국주의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반응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긍정적인 논평 이외에도, 민주당 소속의 뉴멕시코주 지사 빌 리처드슨의 오바마 지지 선언은 그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리처드슨은 클린턴 정부에서 에너지 장관과 유엔 대사를 지냈고 힐러리 클린턴 의원이 그의 지지자로 꼽았던 사람이다. 그는 오바마 연설의 “설득력, 진지함, 예의, 낙관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힐러리 클린턴의 ‘네거티브’ 선거전에 비하여 ‘긍정적’이고 ‘희망과 기회’를 말하는 오바마의 입장을 옳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민주당의 지명에 성공하고 대통령이 되는 데까지 가야 할 길은 멀다. 그러나 그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그는 정치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이기주의의 동기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바마의 필라델피아 연설 하루 전 이스라엘을 방문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나치에 희생된 150만명의 유태인 아이들을 기념하는 지하공간을 포함하는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 시설을 찾아 헌화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 방문을 “일생의 가장 가슴 아픈 체험”이었다고 말하고, 방명록에 “독일 정부는 유태인 학살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의식하고 독일-이스라엘간의 첫 협의와 더불어 공통의 미래 건설을 다짐한다”고 적었다. 국제 관계에서도 힘과 이익을 넘어서는 양심과 화해와 하나됨의 열림은 존재한다.

〈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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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언론 10년 경향]“8년만에 만년필을 잡아보네”
입력: 2008년 03월 27일 17:45:21
 
ㆍ오리구이에 막걸리…마음 열고 4시간여 대화

리영희 선생의 말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옛날 수준의 내가 했던 말이나 글에 미치지 못하는 공허한 얘기를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스스로 사회에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된다”는 이유였다. “이제 몇 해 살지 모르는 병든 세대인데 정치가 어떻고, 국가가 어떻고 생각할 여가가 있나. 그건 다 할 사람이 하는 거지. 조용하게 생을 마감할 준비만 하는 거예요.”


리영희 선생(가운데)과 김봉선 국제부장(왼쪽)·오동근 기자가 지난 20일 경기 군포의 리 선생 자택에서 인터뷰를 한 뒤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철훈기자>

리 선생은 인터뷰를 요청하는 전화를 했을 때 “나는 쉴 권리도 없느냐”며 난색을 표했다. ‘자유’와 ‘책임’이란 말을 기둥 삼아 꼿꼿이 살아온 지식인의 분위기가 묻어났다. 리 선생은 자서전 격인 ‘대화’의 서문에서 “진정한 지식인은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적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제자들로부터 오리구이를 즐긴다는 귀띔을 받은 터라 “오리구이나 함께 들고 싶다”며 약속을 받아냈다.

쉽지 않은 인터뷰의 물꼬를 튼 것은 이라크 전쟁이었다. 선생을 찾아간 지난 20일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 5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라크 이야기가 나오자 미국 비판이 쏟아졌다. 격정적이었다. ‘열강’ 끝에 ‘강부자(강남 땅 부자들의 내각)’,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등을 거론해봤지만 “그건 모르고”라며 다시 선생의 주제로 돌아왔다. 1시간30분여. 리 선생은 “이제 끝이야”라며 ‘종강’을 선포했다. 그때 일행이 들고간 책 ‘대화’를 본 모양이다. 사인을 해주겠다며 펜을 잡았다. “8년 만에 만년필을 잡아보네”라며 적어내렸다. 떨리는 손을 부축해야 했다. ‘쓰지 못하는 손으로, 리 영 희 씀. 08. 3. 20’. 흔들림은 심했지만 글씨체는 그대로였다.(사진)


오리구이 얘기를 꺼냈다. 주섬주섬 나들이 준비를 하는 사이 선생이 몇 차례나 고쳐 물었다. “바쁘면 그냥 가도 돼.” “이미 계획을 세워 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선생은 일행을 따라 나섰다. 음식점으로 가는 길에 잠시 차를 세우게 했다. “저기 슈퍼에 가서 막걸리 몇 병 사오지.” 백미 90%짜리를 특별히 주문했다. “하나 빠트린 얘기가 있어” 하시더니 피겨 선수 김연아가 다니는 수리고등학교가 집 부근에 있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단골 오리구이집은 10여분 거리였다. “소식(小食)을 하는데 오리고기는 소화가 잘돼.” 막걸리 찬가가 나왔다. “캬”하는 소리와 함께 한 모금, 또 한 모금…. 선생은 네 잔 가까이 비웠다. 막걸리에 추억을 담아 드시는 듯했다. 불콰해진 선생은 즉석에서 촬영한 디지털 카메라의 영상을 보여주자 “나 그렇게 안 생겼는데”라며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음영이 도드라지는 바람에 더 여위어 보이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4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아니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식사가 파할 무렵 리 선생은 꼭 새겨들으라며 ‘노자’의 한 구절을 소개했다.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 김봉선·오동근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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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언론 10년 경향]“생명·자연·평화의 사회주의적 가치 받들 때”
입력: 2008년 03월 27일 17:41:10
 
ㆍ리영희 선생, 입을 열다

대담=김봉선 국제부장

지난 20일 오후 경기 군포의 산본에 있는 리영희 선생 댁을 찾았다. 2006년 9월 “이제는 지적(知的) 활동을 마감한다”고 선언한 뒤 1년6개월여 만의 인터뷰였다.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건강을 많이 회복하긴 했으나 팔과 다리가 크게 불편해 보였다. ‘선언’ 뒤 집필활동은 접었고, 산책이나 독서로 부부의 ‘건강한 삶’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리선생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러나 화제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나 영어 몰입 교육에 이르자 어조가 높아졌다. 한 평생 ‘고독한 소수자’로 살아온 그는 여전히 외로워 보였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리선생은 “내 책이 팔린다는 것은 이 사회가 아직도 내가 매진하는 것에 대해 부족하다는 뜻”이라며 “역설적으로 내 책이 안 팔린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댁 주변의 풍광이 아주 좋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최고예요. 건강할 땐 아침마다 식전에 (수리산) 산 꼭대기까지 갔다 왔어요. 지금은 수직운동은 못하고 수평운동으로 산책만 하는데 오전에도 두시간 산책했어. 산길을 걷다보면 그 정도 돼. 요즘 재미있는 건 (TV에서) 동물의 왕국, 환경 스페셜 이런 것 보는 거야. 동물의 왕국 보고 있으면 맘이 편해. 생명 중에서 인간이 제일 못나고 악하다는 걸 깨닫게 돼.”

-4월1일로 경향신문이 ‘독립언론’으로 재탄생한 지 10년을 맞습니다.

“경향신문 내용이 좋다는 말은 의식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들어요. 나도 그렇고, 기획을 잘하더라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고, 참신해요. 몇 해 보는 동안 경향이 한결 나아졌구나 하는 것을 나도 느꼈지. 난 덕담 같은 것 잘 모르지만 사명감을 갖고, 자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신문이라는 긍지를 갖고, 왜곡하지 않고, 올바른 사고와 판단을 통해 내일을 여는 국민들의 길잡이가 됐으면 해.”

-지금, 언론의 역할은 뭘까요.

“그런 종합적인 얘기는 못하겠어. 요즘은 오로지 (나와 아내) 두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서로 도우면서 마음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해요. 이제 몇 해 살지 모르는 병든 세대인데, 정치가 어떻고 국가가 어떻고 생각할 여지가 있나. 그건 다 할 사람이 하는 거지. 조용하게 생을 마감할 준비만 하는 거예요.”

-오늘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지 만 5년이 됐습니다.

“한국의 지식인은 전혀 지식인이 아니야.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할 때 침략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미국인보다 더 미국을 사랑하고, 마치 미국인들을 세계를 구제하는 평화의 사도로 착각하는 인간들이지. 이라크 전쟁을 시작할 때 얼마나 요란하게 떠들었나. 돈 가진 자들은 이라크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후에 무슨 이권을 놓친다는 식으로, 국가의 이권을 위해서 가야 한다고…. 그래서 한국이 무슨 이권을 얻었나. 베트남 전쟁에서도 그렇고, 이란이나 아프간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학살을…. 미국 제국주의의 본 목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끌려 들어가서, 뭔가 그것을 하는 게 도의적이나 당위적으로 실리가 되고 국익이 된다는 한심한 소리를 했잖아요. 지난 대통령 선거를 이겼다는 당사자나 정당, 지지세력은 전부 그런 식으로 미국의 종 노릇을 자원한 사람들이 아닌가. 난 50년 동안 국제관계를 보면서 꽤나 노력해왔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어. 동남아나 중남미를 봐도 주체적인 주장이 나오는데, 남한 같은 곳은 내가 알기론 없어요. 반공주의는 그 자체가 창조적 사상을 갖는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 사고의 명석함이나 건전한 세계관, 인류의 평화 등을 전부 거부하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돈 많은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힘 있는 깡패나 군대, 폭력지배집단이 지배하는 국가예요. 난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이제는 눈을 뜨게 되지 않았나 싶은데 어림 없는 것 같아. 거대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신문, 수구가 지배하는 신문이 사회의 평화적 생존에 역행하고 있어. 그건 선전 ‘삐라’(유인물)야.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 피지배자들의 두뇌를 마비시키는….”

-CNN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의 76%는 이라크 군비가 미국 경제난 중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답했습니다.

“1961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임하면서 (취임하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조언했어. 미국이라는 국가는 군대를 지탱하면서 돈을 버는 군수산업체들의 합작품이라고.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을 했지. 미국은 전쟁을 안 하면 못 사는 나라야. 그 전쟁을 위해 상시적으로 세계 유수 국가들의 군사비를 합한 규모와 맞먹는 지출을 하니 국내 경제시설, 하드웨어는 다 망가지지. 금융 제도도 저렇게 됐고. 군사적으로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금융적으로 채무국가가 아닌가. 빚투성이 국가야. 말하자면 덩치는 크고 막강한데 실제 이것을 움직일 만한 건전한 정신적·육체적 기능은 다 무너진 거지.”

-한국 신문이 ‘신문다운 신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려울 거예요. 미국의 노예 상태로 있는 한. 지금 이라크 상황도 부시 정권이 들어서서 네오콘들의 계획에 따라 남한의 언론 지식인, 사회적 지도층을 미국식 처리 방향으로 세뇌하고 있어. 남북 문제도 마찬가지야. 그 예산을 ‘데모크라틱 펀드’라고 하지. 의회 승인을 얻어 3~4년 전 300만달러를 남한에 들여왔어요.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미국이 전세계 약소국가들의 노동운동, 좌파 단체, 혁신세력을 내부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해 그런 돈을 썼어. 그때 미국 대사가 공언했지. 그 결과로 가장 폭력적인, 다시 말해 미국의 식민지 제국주의 정책에 하수인처럼 행동하는 그런 세력들을 내부에 만들어 낸 거지. 미국에 유학한 많은 지식인들, 한국 사회 모든 분야에서 최상에 있는 부류들이 미국 숭배의 기본적 체험에 마취당하고 있는 거지. 이명박 정부의 주요 세력, 각료, 인수위원회를 지휘했던 숙명여대 총장…. 전 국민 대상으로 영어 교육을 한다니 큰 문젯거리야. 미국의 사회, 문화, 교육, 돈, 경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 아닌가. 국민을 전부 미국화하기 위한 노력이지. 뉴스에 무슨 영어교육 광란증 같은 문제를 놓고 이명박이라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정부 주요 인사, 매스컴, 지식인, 학부형 자신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정신을 잃는 것을 보면서 맹자의 말이 생각나. 무릇 남이 나를 업신여길 때는 내가 먼저 나를 업신여긴 연후에 남이 나를 업신여긴다. 어느 가문이 기울 때에는 그 가문의 형제들이 밖에서의 업신여김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이 스스로 그런 후에 남이 자기 가문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먼저 그 백성이 스스로의 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그 연후 남이 그 나라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뼈아프게 반성하고 자기는 어떤가 스스로 뼈아프게 비판해야 내일이 있지 않나 싶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사회적 책임)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때입니다.

“난 영어 몰입교육 논란을 보면서 꼭 영어를 다 알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요. 난 1960년대에 5개 국어를 했어요. 영어, 일본어, 중국어, 불어, 한국어. 언어라는 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를 지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언어는 그 인간의 철학, 사상, 문화, 심리, 정서 이런 것들을 지배하게 돼. 언어는 단순히 수단이 아니지. 의사 표시와 회의에서뿐만 아니라 언어에 지배 당하는 것이니까. 언어라는 것은 음의 발성학적 구성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그 언어를 만들어내고 사용한 민족의 역사적 배경, 그 언어가 지금까지 오게 된 과정에서의 사회·인간 경험의 총체, 내포하고 있는 철학, 심리 이런 게 언어 속에 들어가 있어. 한국의 지식인들은 언어를 실용주의의 도구로 착각하는데, 그게 자기에게 돌아와 자신의 모든 생각을 정하지. 재미나는 건 한국 사람이 미국 가서 노동을 하고 아르바이트할 때 영어를 모르면, 영어 하는 미국인들을 뭔가 우수하고 탁월한 족속으로 생각한다 말이야. 노동판에서도 식당에서도 그들에게 지배받는 거지. 그러다보면 ‘아, 난 이들에게 지배당하는 민족이구나’라고 생각해. 그 언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절박한 욕구와 이런 것이 패배의식, 자기모멸 이런 걸 만들어 버리지. 우리 사회를 보세요. 전부 미국 미국 하면서 미국인을 보면 뭔가 우리 한국인보다 월등한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착각하고 그 밑에서 어쩔 줄 몰라해요. 그것이 커지면 자기 민족, 문화, 국가, 국민적 자존심을 다 버리게 되지. 지금 우리에게 뭐가 있나. 군사력이 막강해져야 하지 않나 하는데 우리 군대는 우리 군대가 아니야. 이제 북한이 전쟁할 상대가 되나. 우리가 자꾸 미국 무기를 사고 군대를 늘리고 하는 것은 미국과의 공개 조약이나 비밀 협정을 통해 한국의 군사력이 미군의 용병으로 쓰이게 돼 있기 때문이야. 남한의 군사력을 마치 남한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무력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런 목적으로 쓸 데가 없어. 앞으로 미국이 동북아에서 중국과 싸워야 하는데, 그 때 남한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지요. 미국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식인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안됐지만 거의 절망적이에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슨 기능적인 지식인을 지식인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적어도 어떤 보편적 인류·사회에 대한 생존적 가치를 위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악을 구분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이른바 언론인이라고 하는 신문 만들고 방송하고 그런 사람도 지식인이지. 그런 걸 생각하면 퍽 실망스러워. 앞으로 나아질 가능성을 보기 힘들다는 게 더 문제지.”

-‘폴리페서’(정치에 뛰어든 대학교수), ‘폴리널리스트’(정치에 뛰어든 언론인)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식인이라는 개념으로 포괄되는 개인이 여러가지 기능에 종사할 수는 있지요. 자기의 지식을 이용해서. 다만 그때의 지식인이라는 것은 진정한 지식인이 아닌 기능적 지식인일 뿐이야. 시장경제와 미국식 자본주의, 미국적 생활양식, 미국적 가치관에 푹 젖어버린 지식인에게 (올바른) 행동양식을 기대할 수 있나. 무한경쟁에서 이긴 자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로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력이나 상호 부조, 평화와 같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더 높은 가치가 가능하겠나.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런 형태의 사회 규범 속에서는 지식인이라는 것이 미국식 지식인이 되고 말아요. 지식인을 기대하려면 미국식 개인주의·물질주의·이기주의 등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 있어야 해요. 미국식 자본주의의 물질 생산에 치중하는 환경 파괴나 비인간적 생존 양식, 이런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거든. 지식인들이 자기희생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오늘 10개 먹는 것을 5개만 먹고 오늘 10가지 즐기는 것을 5가지만 즐기고, 이렇게 해야 그에 필요한 물품 생산이 줄어들고, 자연을 덜 파괴하게 되지. 자전거를 타는 풍습을 일반화하면 휘발유 수입을 덜하고 공기 오염도 덜하지. 모든 문화에서 그래요. 점점 사치화하고, 남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거, 더 예쁜 거, 더 편한 거 이런 물질주의적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경제가 돌아간다는 사회 자체가 문제인 거지. 북유럽만 해도 안 그래요. 거기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있었거든. 북유럽에는 100년 넘는 사회주의 전통이 있어요. 물질도 소중하지만 인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생명과 자연을 생각하고, 조화의 정치철학과 사회철학이 오랜 사회주의적 사상과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얼마나 잘 이뤄지나요…. 세계에서 보건, 의료 등 복지·행복을 위한 지출과 정책이 제일 뒤떨어진 게 미국이라고 했지만 이제 우리 의료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 아니에요? 우리의 사회주의적 사상과 교육, 가치관과 정당, 이것이 떳떳하게 우리 국민 생활의 당연한 부분으로 자리잡을 때 변화가 올 겁니다. 제도적·사회적·사상적으로 물질주의와 균형을 이루게 될 때 훨씬 나아지겠지요.”

-언론인으로서 무엇을 가장 갖춰야 할까요.

“첫째,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외무부에 출입하던 시절 무슨 정책이 나오면 항상 도서관에서 책을 먼저 빌렸지. 둘째로는, 인간적인 성실성을 갖춰야 해요. 기자라고 거들먹거리고 그러면 안돼요. 그리고 검소하게, 가난하게 사는 데 만족해야 돼. 돈이 흔해지면 권력에 붙게 마련이니까. 정치권력, 경제권력, 사법권력… 이런 것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해요.”

-티베트의 독립·자치 요구가 높습니다. 티베트와 중국이 공존할 수는 없을까요.

“내가 국제부장 할 때처럼 소상한 움직임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달라이 라마의 제안이 좋은 것 같아요. 일정기간 동안 자치를 하면서 새로운 방법이 창출될 수도 있지.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간디를 연상케 해. 이번에 달라이 라마를 보고 간디를 연상하면서 비폭력 평화, 이 도덕주의적인 평화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티베트인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중국에 대항하라고 선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게 좋은 해법이겠나.”

-리 선생님의 저서 가운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우편향되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영향이지. 자꾸 오른쪽으로만 날개를 펴려고 하는 거지. 노동자 시위를 엄단한다고 하고. 그렇게 되면 사회 모순이 커져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올 거야.”

-저서에 대한 인세는 계속 들어오는지요.

“내 인지세는 이제 다 끝났어. 지금은 거의 없고. 내 인세가 제로가 될 때가 내가 기쁠 때지. 내 책이 팔린다는 것은 이 사회가 아직도 내가 매진하는 것에 대해 부족하다는 뜻이니까. 이 사회가 리영희의 주장을 다 안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역설적으로 내 책이 안 팔린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험이 없다, 그게 내 삶의 신조야. 감투 쓰고 나서 자기 아니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휘젓고 다니는 사람들, 학계·정치·언론계 모두, 그런 인간들이 멈출 줄 모르는 것이거든. 우리 동양철학이 중요한 점은, 삶의 지혜 즉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가르침을 준다는 거야. 노자의 가르침이 얼마나 좋아. 내가 할 것은 이 정도면 됐다, 스스로 자기 역할과 능력에 대해 이제 그만하면 됐다, 더이상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청산과 무릉도원에 사는 것 아닌가.”

〈 글 | 오동근·사진 | 우철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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