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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 이 세상의 파수꾼

2003년 8월 30일  조선일보 

어느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새 자전거를 닦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을 했다. 아이는 자전거 주인에게 슬며시 물었다. “아저씨, 이 자전거 비싸요?” 그러자 자전거 주인이 대답해 주었다. “아니, 이 자전거는 우리 형님이 주신 거란다. ”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부럽다는 눈치로 “나도…”라고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자전거 주인은 당연히 아이가 자신도 그런 형이 있어서 이런 자전거를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의 말은 뜻밖이었다. “나도 그런 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 동생은 심장병이 있는데, 조금만 뛰어도 숨을 헐떡여요. 나도 내 동생에게 이런 멋진 자전거를 주고 싶은데요. ”

동생을 사랑하는 그 아이의 착함도 착함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어른과 아이의 생각의 차이를 본다. 자전거 주인이 아이의 생각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것은 늘 무엇인가를 남으로부터 획득해서 나의 소유로 만들고 싶은 어른들 생각의 자기투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이런 어린아이의 열린 마음을 점점 잃어버리고 나만의 성을 쌓아가며 하나씩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과정인 듯하다.

지난 26일자 어느 일간지에는 “장애인 학교의 직업교육 시설 이전 계획에 반발한 서울 Y초등학교 학부모들이 개학 첫날인 25일부터 다시 학생들의 무기한 등교거부에 나섰다. 교육부는 지난해 9월 서울 맹학교 시설이 낡은 데다 그 지역이 건물을 증축할 수 없는 풍치지구여서, 맹학교의 직업교육 시설을 Y초등학교 안 일부 부지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던 바 있다”는 짤막한 기사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등교하는 학생들까지도 학부모들이 학교 앞에서 가로막고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마땅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니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무조건 싫은 것이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무심히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다. 어른들의 닫힌 마음으로 아이들의 열린 마음까지 꽁꽁 걸어 잠그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 J D 샐린저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1951)’은 소위 ‘문제청소년’인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세 번째로 옮겨간 고등학교에서 다시 퇴학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사흘 동안의 행적을 기록한 1인칭 소설이다. 홀든은 뉴욕의 뒷골목을 떠돌며 오염된 현실세계를 경험하고 지독한 상실감을 맛본다. 사흘 동안 만난 사람들도 한결같이 위선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기성세대이다. 홀든은 인간 불신의 원인은 언어 자체라고 생각, 허위로 가득 찬 세상을 떠나 한적한 숲 속에서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여동생 피비의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에서 구원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피비의 질문에 홀든은 대답한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재미있게 노는 꼬마들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고 어른은 나밖에 없는.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잡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

그러나 결국 어른들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절망 끝에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을 지켜주는 것은 피비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아이러니다.

보지 못하는 학생들 가까이에서 공부할 수 없으니 학교에 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을 어린 학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이 세상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누구나 조금씩의 모자람, 불편함을 갖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곳이고, 그것만이 이 세상을 지키는 진정한 파수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을까. 사랑과 친절은 부메랑 같아서 베풀면 언젠가는 꼭 내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 살아가는 데 가장 불편한 장애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장영희·서강대 영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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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 진정한 위대함

2002년 1월 5일  조선일보

20세기 미국문학 시간에 단골로 읽히는 소설 중 학생들에게 제일 인기있는 작품은 단연 스콧 피츠제랄드 (F Scott Fir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1925)이다. 주제가 무겁지 않고 영어 문체가 비교적 쉬운데다가 무엇보다 학생들이 동감할 수 있는 ‘연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히기 전에 나는 학생들에게 제목에 있는 ‘위대한’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위대함’은 어떤 속성을 말하는가? 그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에 대해 학생들은 ‘자기를 희생하여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 ‘부, 명예, 권력에 개의치 않고 이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 등 의견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작가 피츠제랄드가 생각하는 개츠비의 ‘위대함’은 무엇일까?

작품의 화자 닉은 중서부에서 뉴욕으로 와서, 롱아일랜드 교외에 자그마한 집을 빌려 산다. 그의 이웃에는 거부라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개츠비의 저택이 있고, 그곳에서는 주말마다 성대한 파티가 열린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개츠비는 군인시절 만났던 부잣집 딸 데이지와 결혼을 약속하나 그가 떠나간 동안에 그녀는 톰 뷰캐넌이라는 재벌과 결혼한다. 개츠비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책에 확실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밀주업으로)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어, 그녀의 집 가까이에 저택을 사들이고는 매일 밤 파티를 열고 언젠가 데이지가 와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꿈꾼다.

우연히 닉이 데이지와 육촌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안 개츠비의 부탁으로 닉은 개츠비와 데이지의 재회를 주선한다. 5년 만에 데이지를 만난 개츠비는 그녀가 이제 부자가 된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에 추호도 의심이 없다. 그러나 어느 무더운 여름 날, 뉴욕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운전하던 개츠비의 차가 톰의 정부(情婦)를 치어 죽이고 달아나자, 개츠비가 차를 몰았다고 생각한 그 여자의 남편은 개츠비를 찾아가 사살한다. 데이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편과 여행을 떠난다. 성황을 이루었던 개츠비의 파티와 달리 닉 외에 겨우 한 명의 손님만 참석한 쓸쓸한 장례식이 끝나고 닉은 환멸을 느끼고 다시 중서부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를 사랑한 개츠비의 삶은 결국 가엾고 허무한 것이었다. 그러나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학생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속성을 개츠비에게서 찾아볼 수는 없다. 그는 결국 돈 때문에 떠나간 사랑을 돈으로 찾겠다는 단세포적 발상으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불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불법축재자였으며, 이미 흘러간 과거를 되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한 비현실적 몽상가였고, 사랑의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아적 낭만주의가였을 뿐, 결코 ‘위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피츠제랄드는 책의 첫부분에서 개츠비에게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갖다 붙인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아무리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삶 속의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사랑에 실패해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낭만적 준비성’, 그리고 ‘삶의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20년대 혼돈의 시대, 미래에 대한 이상을 찾는 ‘아메리칸 드림’이 꿈과 낭만을 잃어버리고 물질만능주의와 퇴폐주의로 타락해가는 시대에 개츠비의 순수한 꿈, 순진무구한 희망은 하나의 ‘위대함’이었던 것이다.

2002년… 우리에게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새 해이다. 삶의 횡포, 혼돈의 시대에 이리저리 채이고 휘둘려도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시 한 번 희망을 꿈꾸는 개츠비의 위대함이 새삼스럽다. 젊고 순수한 우리 학생들이 꿈꾸는 ‘돈과 권력, 영웅심에 연연하지 않고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진정한 위대함을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새해였으면 좋겠다.

/장영희·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미 보스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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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촌의 헌책방을 들렸다. 마침 거기엔 뜻하지 않게  <반지의 제왕>  영문판인 The lord of the rings 시리즈 페이퍼백이 들어온 것을 발견했다. 총 3권짜리였는데 페이퍼백임에도 책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책에 주름이나 얼룩이 전혀 없는 것을 보니, 아마 한번도 안보고 그냥 내 놓은 듯하다. 그냥 새 책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중고책이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눈에 띄었다. 서점에서 페이퍼백 한 권 구입하는 가격으로 3권 모두를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구입하게 된 2권과 3권의 표지 디자인은 위 사진의 두번째, 세번째 것과 동일하다. 1권의 표지 디자인도 2,3권과 색깔만 차이가 날뿐 동일한데, 그 디자인은 알라딘에서 찾을 수 없어서 조금 다른 사진을 첫번째에 올렸다. (책을 중고서점에서 싸게 샀다는 이야기를 하려니 알라딘社에 참 미안하다고 느낀다. 규모가 큰 인터넷 서점이니 아마도 무한히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                

 그 책들은 Harper Collins社의 2001년도 판이었다. 바로 이 Harper Collins社의 2001년도 판이, 게중에서 번역이 잘 되었다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 社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텍스트였다는 것이 기억났다. 사고 싶은 충동이 드는 와중에 떠오르는 생각 한가지. 저거 사 놓으면 과연 다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문제는 나의 영어 실력은 차치하고라도, 그 엄청난 분량을 독파해 내기 위한 인내심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런 생각 끝에 이 시리즈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각오하고 정말 싼맛(^^)에 사버리고 집 책장에 끼워두니 보기는 참 좋았다.

자그마한 영문소설 페이퍼백은 디자인에서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나 두고 보기에 참으로 예쁜 악세서리와 같은 느낌이 강하다. 오늘 구입한  The lord of the rings  페이퍼백 시리즈도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예쁘고 뽀대가 나더라~~^^.  이제 함 읽어보세~~~. 인내심을 기르면서 제대로 읽고 있다면, 간간히 그 감상을 마이페이퍼에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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