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참여와 타협의 주술에서 벗어나자! -2006년 연대운동의 확장을 위한 민중운동의 과제

293호 2006년 1월 20일(금)


참여와 타협의 주술에서 벗어나자!
-2006년 연대운동의 확장을 위한 민중운동의 과제


 

폭력의 확산과 저항의 확산

IMF 구제금융협약 이후 한국의 자유주의 정권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금융화된 초민족적 자본의 이해에 완전히 종속된 새로운 축적 체계(이는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위기에 대한 위기관리체계이기도 하다)는 경기 안정과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동시에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집행력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대중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DJ의 정권교체와 노무현 정권의 출범은 이런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IMF와 세계은행, WTO 각료회의 같은 무역·금융투자기구의 위상을 제고하는 것이었다. 또 국가들 사이의 체계를 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 세계 지배세력들은 WEF, APEC 같은 회의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공공연히 드러내며 조율했고, 이런 것들을 축제화하면서 대중들을 선동해나갔다.

노무현 정권은 번영과 사회적 갈등의 해소를 약속했다. 금융화된 초민족적 자본의 투자처를 확대하는 것만이 평화번영의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이것이 거짓말임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도 안 걸렸다. 노동의 불안정화에 따른 경제적 궁핍과 가족을 유지할 수 없는 데에 따른 공동체의 해체의 위기를 겪으면서 대중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폭력(착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평화와 번영은커녕 한반도의 위기상태는 지속할 뿐이었고, 테러와의 전쟁(인간안보)이라는 미명아래 이라크 전쟁은 오히려 확산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대중들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드러내려고 했다. 2003년 열사들의 분신·자결을 시작으로 김선일 피살 사건에 분노해서, 핵폐기장에 건설에 맞서서, 미군기지 확장에 맞서서, 노동의 불안정화와 농업말살에 맞서서 노동자 농민, 여성들은 투쟁했다.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향한 지배세력들의 공론장인 WTO각료회의와 APEC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해나갔다. 자본이 세계화되는 만큼 이에 맞서는 투쟁도 조금씩 세계화되고 있다.

 

대중운동의 정치적 후퇴

하지만 이러한 투쟁이 민중의 정치적 단결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방식으로 분리, 위계화된 노동자의 현실에서 알 수 있듯) 구체적인 현실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은 개개인으로 분리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에서 민중은 자신의 혹은 서로의 문제를 정치쟁점화 하는데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대중조작적인 인민주의적 경향이 정치지형을 지배하고 있는 데다, 대중의 정치적 권리를 몇몇 정치스타에 대한 정념적 지지로 이해하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든 운동이 자기 개발을 담보할 수 있는 이념과 결합하는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가속하는 지배세력들의 정치공세 속에서 기존에 있던 대중조직의 운동이 마땅한 대응 방법을 못 찾을 때 대중의 통념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려 들거나 이미 운동에 내재해 있는 이념으로 현실을 해석하려 드는데 이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저해하고 대중운동이 운동의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데 장애가 된다. 대중운동에서 종종 드러나는 (민족주의적 틀에 갇혀있는) 코퍼러티즘적 경향은 가장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는 지극히 수동적이며 폐쇄적인 형태로 변모한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한 민족국가의 발전전망을 불투명하게 하고 이런 상황에서 민족의 보존(통합)이 다른 문제를 압도하게 되면 민족주의 이념은 자신의 보편성을 탈각하고 고립주의적인 경향을 띠며 급격히 우경화된다. 한편 경제위기상황에서는 지배세력들의 공세만이 강화될 뿐 타협의 여지는 크게 줄어드는데 이런 상황에서 기존 대중조직의 운동은 타협을 통한 탈출구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결국 최종목표를 대중조직으로서 자신만이라도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조정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대중조직은 노동자/농민 일반이 아니라 오로지 조합원만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는 비즈니스 노선이 강화된다.

불행히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한국사회의 대중운동에서 이 같은 경향은 더욱 더 지배적인 경향이 되고 있다. 농민운동은 ‘식량주권’을 제기할 때 농민의 생존권, 농업에 대한 민중의 민주적 결정권보다는 민족국가의 안녕(식량안보)이라는 차원에서 제기하는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이 문제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고, 지배세력들에게서 농업회생의 방안을 찾을 수 없었던 농민운동은 투쟁의 응집력을 통해서 이것의 문제점을 폭로하면서도 노무현의 배신 속에서 조직력과 투쟁력을 급격히 상실하게 된다. 2005년 두 농민 열사의 죽음에서 농민운동은 노무현 정권과 지배세력들의 농업말살정책에 치를 떨어야 했지만, 응집력을 보여주는 것에서조차 어려움을 겪고 만다.

노동조합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는 조합원의 투쟁을 응집력 있게 전개하는데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몇 번의 총파업 선언은 불발로 끝나거나 몇몇 사업장의 응집력에 기댄 채로 미약하게 전개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층 사업장, 연맹에서는 투쟁의 한계라는 이유로 몇 가지는 양보하고 쟁취하는 식의 교섭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교섭은 종종 미조직노동자의 요구가 외면된 채로 진행되지만 ‘현실’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이 같은 노동조합의 비즈니스 노선(자기중심적인 실리주의) 위에서 민주노총은 ‘사회적 합의’를 수립하는데, 이런 코퍼러티즘 전략은 사실, 조합원 중심의 실리주의 노선을 방어하기 위한 제도적 표현에 불과하다. 2005년 비정규직 관련 노동법 개악저지투쟁에서도 이 같은 교섭전략(기간제 사유제한 예외를 인정한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이 문제가 된다. 단위사업장의 교섭전략이 당과 총연맹의 교섭무대에 그대로 등장한 셈이다. 2006년 국회 투쟁을 기약하는 것으로 2005년 노동법개악저지투쟁을 마무리해야 하는 현실은 결국 오늘 노동조합운동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문제의식만 앙상해진 공동투쟁, 그리고 민중운동의 분열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화한다는 목표아래 민중운동은 공동투쟁을 조직해 왔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로 전국민중연대 운동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조직 출범 3년 동안 공동투쟁이 제기했던 본래의 문제의식은 (반신자유주의 전선 강화, 운동의 외연 확대) 점점 축소되고, 대중운동들이 자체로 추진할 수 없는 투쟁들(시민운동과의 연계-외연 확장, 일정조율, 반전-반세계화운동)을 대리하는 양상이 강화된다. 이 과정에서 실용주의적 경향이 난무하고, 정치토론은 실종된 채로 기존 운동의 이념(민족주의)이 복원되면서 패권적 경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오늘 노농연대 투쟁이 안 되는 이유는 (강력한 정치조직/연대체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대중운동 내에 자기중심적 실리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해야 하지만, 공동투쟁은 계속 이런 경향아래 갇혀져 있었고(기존 대중조직 운동의 외연 확대 - 시민단체를 끌어들이기 위한 각종 대책위 남발), 위기에 대한 공동의 인식에 근거해 민중들의 유대와 공통관념(반신자유주의 문제의식)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은 조금씩 뒤로 밀려났으며, 실용주의적 경향(투쟁의 이합집산, 일정조정)만이 강화되어 왔다.

기존 대중조직의 운동들 사이에서 조직 방어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실리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노농연대는 구호수준에만 머무를 뿐이다. 공동투쟁은 더더욱 형해화하고 그 자리에는 특정 조직의 단일사안 단일요구의 투쟁만이 남았다. 이런 가운데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이 자신의 권리를 어떻게 정치쟁점화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의 폭은 오히려 좁아졌다. 수세적인 국면에서 이루어진 의회진출은 민중운동의 국회 의존성(대정부 의존성)을 도리어 더 높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민중운동의 역량은 국회 앞으로 집중하게 되고, 결국 가을 정기국회를 전후로 각종 요구들이 나부끼는 농성투쟁이 모든 민중운동의 투쟁을 대신하게 된다. 국회 앞 투쟁은 자신의 요구도 중요하다는 식의 알리바이를 제공했고, 현 단계 정치 투쟁의 방향, 민중운동의 과제를 망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자기 조직 확장을 위한 기본목표(의식화, 조직화)마저 사라지고, 소속된 조합원들로부터 책임을 면하기 위한 요구안의 달성여부가 투쟁의 기본목표가 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신자유주의 전선 강화는 고사하고 조합원의 확보조차도 쉽지 않게 된다. 지배세력들과의 타협이 어려운 상황에서 투쟁목표는 현실화라는 미명아래 낮게 조정되고, 이렇게 낮게 조정된 투쟁목표는 지배세력들의 목표지점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결국에는 기존 조합원의 요구를 방어하는 것도 실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배세력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반발하는 운동이 이제는 국회 앞에서 관리 받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2006년 민중운동진영의 연대운동이 나아가야 할 것

오늘날 한국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중운동의 발본적인 인식과 노선의 변화 없이는 이런 상황의 타개가 매우 어렵다. 경제위기상황에서 코퍼러티즘적인 운동노선이 불가능해진데도 기존 노선을 고집하려 들고, NGO 운동에 의해 관리 받고 끝내는 배신당하는 상황(2005년 12월 1일 7개 시민단체의 노동법 개악안 지지 사태)에서도 민중운동의 정치적 단결보다도 시민단체와의 연대에 최우선적인 가치를 둔다면, 민중운동은 자신의 존립기반조차 상실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시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로 돌려야 한다. 정세인식을 위한 토론을 강화하고, 운동 내에서 어떤 요소들을 강화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인민의 권리를 자율적으로 실현하고, 사회적·경제적인 변혁을 추구하며, 사회운동과 공동체 사이의 교통과 연대를 확장하려는 운동’ 우리는 이를 대안세계화운동이라고 부른다. 공동투쟁이 무조건 만능이 아니다. 이 같은 요소들을 강화하기 위한 연대운동을 조직하면서 그 내에 다양한 물질적 장치(조직 이념, 조직 운영 원리)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연대운동의 방향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중운동은 지배세력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이에 근거하여 정치적인 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민중운동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운동의 이념으로서 대중의 공통관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조직 혁신으로 되지 않는다. 급진적이며 변혁적인 대중 운동이 일어나면서 새롭게 주체가 형성되고 이것이 대중조직의 운동과 교통할 때 혁신의 기운을 확인할 수 있다. 지배세력들과의 정치적 단절(반신자유주의)을 강조하는 것은 이 같은 운동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최소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늘 국가(및 사회체제)가 대중에게 가하는 폭력(착취, 배제)의 현주소에 대한 면밀한 인식과 이를 대중과 공유하기 위한 정치폭로가 필요하다. 자유주의들과 NGO운동이 심어놓은 ‘민주주의’의 미망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경계를 확장하고, 현존하는 사회관계의 변혁을 위한 머나먼 길에 나서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다양한 운동과 더 많은 운동이다. 대중을 분열시키려는 지배세력들의 책략에 맞서는 다양한 운동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우리는 이를 격려해야 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에 여러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운동에 노동자, 농민,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조직하며 운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시기에는 이런 다양한 운동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여러 조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다.

이렇게 등장한 다양한 운동들 사이에서 수평적인 토론이 확산되어야 한다. 공동투쟁에 참여하는 여러 운동 주체들이 자신의 경험, 자신의 이념, 자신의 전망을 놓고 평등하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운동들 사이의 교통을 통해서 대중들이 직접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확장하면서 운동 전망에 대한 공동의 관념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들이 연대운동체/공동투쟁체의 조직운영원리(의사결정기구의 민주화)에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지금 만일 우리가 민중운동의 연대운동에 대해 새롭게 토론하고자 한다면, 바로 오늘 대중운동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연대운동과 공동투쟁은 공동의 인식을 전제로 공동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이지만, 동시에 대중운동의 혁신을 위한 운동이며 변혁적인 운동 주체의 형성을 위한 운동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연대운동에서 노력과 고민을 집중해야 할 지점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발행처 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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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돌베개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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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돌베게, 1993

(괄호 속 숫자는 쪽수이고 강조는 원문, [] 표시는 인용자가 한 것.)

 

오랜만에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고 싶어졌다. 가능한 독서목록에서, 그저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온갖 철학자들의 사변도 아니고, 언젠가부터 좀처럼 잘 읽히지 않는 문학 작품들을 제하고 나니 떠오른 것이 자서전이라는 장르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었던 “소설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에서 가르쳤던 교수의 주장도 결국 모든 소설 역시 자서전이라는 큰 틀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그때의 교재가 <꽃을 잃고 나는 쓴다>라는 한국단편소설을 엮은 책이었다.) 그래서 동네 도서관의 전기 코너에서 얼쩡거리다가 결국 잡은 책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이다. 프랑스의 철학자가 쓴 자서전이라니, 철학책도 잡히지 않고, 그렇다고 문학에 몰두하지도 못하는 그런 와중에 꽤 그럴 듯한 절충이지 않은가? 라고 위로하면서.

 

 그럼 알튀세르는 어떤 사람이었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는 한 사람의 철학자였고,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페리 앤더슨 같은 사람은 그를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계보라기보다는 소련의 전통에 위치시키기도 한다는데, 그는 아마 맑스주의 역사상 누구보다도 ‘비교조적인’ 맑스주의자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사르트르가 했던 것처럼 맑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철학이라고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쓴다. 마키아벨리, 스피노자를 우회하는 이론은 그야말로 Dia-Mat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끔찍한 철학을 넘어서, 오히려 맑스주의의 공백과 한계를 가장 극단까지 몰고 간 노력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는 62세 되던 해에 자기 아내를 정신착란 상태에서 교살했으며, 그 이후 프랑스에서 그 이름은 엄청난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고, 그 이론까지도 금기시되었다.(언뜻 들은 얘기로는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의 제자 발리바르는 프랑스에서 국가박사학위를 받지 못하고 네덜란드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그 이력을 잠시만 보아도 왠만한 소설 주인공 뺨치는 굴곡 많은 인생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역시 책의 첫 번째 장은 바로 자신이 아내 엘렌느를 죽였던 바로 그 날의 기억을 기록하는 데에 할애된다. 그리고 그는 법원으로부터 면소판결(형법에서 구분하는 바처럼 정신착란 또는 강제에 의해 행위를 저지른 경우 범인의 무책임 상태를 이유로)을 받는데, 이로 인해 그는 ‘죽은 목숨’(lebenstodt), 즉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고 아직 매장되지는 않았으나, 광기를 지적하기에 매우 적절한 푸코의 표현대로 ‘저술이 없는’ 자”이자 실종자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철학자, 역시 정신분석에 관한 여러 글들을 남겼던 이 인물에게는 어떤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역시 가족 얘기를 해야만 한다. 모계 쪽의 베르제 일가와 부계 쪽의 알튀세르 일가는 알제리의 어느 삼림 지방에서 서로 알게 된다. 베르제 일가에는 알튀세르의 어머니가 될 뤼시엔느와 여동생 줄리에트가 있고, 알튀세르 일가에는 역시 아버지가 될 맏아들 샤를르와 루이가 있었다. 뤼시엔느는 조용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루이와 함께 어울려 사랑에 빠지게 되고, 집안에서는 뤼시엔느와 루이를 약혼시켰다. 그러다가 1차 대전에 각각 포병대와 공군으로 징집된 이들 형제 중 루이가 전사한다. 그리고 아버지 샤를르는  뤼시엔느에게 자신이 루이의 자리를 대신하겠다며 청혼한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이는 후에 알튀세르에게 “상처처럼 피 흘리며 수난받는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사후에 형성했다고 한다.(49) 그녀를 그녀의 수난과 남편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강박에 어린 알튀세르는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이름은 바로 그녀가 사랑했던 원래의 인물 ‘루이’로 지어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이름을 무척 혐오했다고 밝히는데 그 이름 Louis는 동일한 발음의 oui(‘예’라는 긍정의 표현)를 연상시키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어머니의 욕망에 대한 oui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이름은 lui(그 남자라는 표현)라는 익명의 제삼자를 암시하기도 하며, 물론 그의 어머니가 사랑했던 죽은 삼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인격이 박탈당했음을 느끼게 된다.

 

 이후에는 어린 시절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쭉 서술된다. 사업 수완은 좋았지만 매우 엄격하고, 아들에게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말뚝과 쇠꼬챙이에 찔려 서서히 죽어가는 것에 관한 그의 ‘환상들’, 자살에 대한 갑작스런 충동, 영원한 아이나 다름없던 어머니. 누이동생과 어머니에 대한 너무나도 무거운 책임감... 특히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어머니가 지닌 병적인 공포는 내 육체와 자유를 지배했고 억눌렀다....아이들과 그토록 어울리고 싶어했던 나에게...모든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64) 그리고 청소년기에 그는 쟈끄(jacques)라는 이름을 가졌으면 하고 꿈꿨다고 말한다. 이 ㅈ 발음은 jet(정자의 사출)을 연상시켰으며, 깊은 아 발음은 ‘아버지의 이름’인 샤를르의 아와 같으며, 끄는 끄(queue 꼬리라는 뜻으로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기도 함)를 의미하고, 외할아버지가 들려준 농민봉기의 이름도 쟈끄리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죽은 자의 이름(67)을 갖게 되었고, 어떤 ‘아버지의 이름’을 갖기를 원했던 것 같다.(이런 점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그 자신 역시 남성적인 ‘힘’을 원했던 니체와 닮은 점이 아닐까? 문외한이라서 드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알튀세르의 후기의 생각들은 명시적으로 준거하지는 않지만 어떤 니체적 영감과 깊은 관련을 갖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를 둘러싼 양면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며, 어머니를 유혹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어머니를 유혹해야 했다.”(69) 그리고 그가 간절히 원한 것 또한 “죽음의 영역 안이나 죽음의 환상 속에서 살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었다.(가령 나중에 그는 어떤 명철한 여자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내가 당신에게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어떡해서든 스스로를 파괴하길 원한다는 거예요.”) 그는 자기 분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삶에서 단지 하나의 인위적 존재였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또 내가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사랑하고자 했고 또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받고자 한 사람들, 그로부터 차용한 인위적 수단과 사기라는 우회적 방법을 통해서만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죽은 자였다.”(105) “나는 과장의 의지, 말하자면 편집증적인 의지와 자멸적인 의지가 하나의 동일한 의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113)


 이어서 고등사범을 다니기 이전의 학교 생활이 다루어진다. 신체가 입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몸의 여러 근육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회고, 그리고 역시 그 근육을 다루는 것의 일종으로 외국어에 대한 재능,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와 자신이 동일시했던 선생님 이야기 등등. 그리고 그는 당시의 카톨릭학생운동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결과 육체노동, 그리고 침묵에 바쳐진 수도승들의 삶”을 동경했으며, 그럼으로써 익명성 속으로 사라지길 바랬다고 쓴다. 10장에서는 포로 생활의 일화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바람은 이 생활 가운데서 어느 정도는 채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런 노동을 하는 것이 무척 마음 편했으며 농부들인 내 동료들과 우애를 나누며 함께 지내는 것이 특히 행복했다.”(118) 그는 포로 생활들을 통해 “인위적 술수 및 기만적 술책”이 그것을 사용하는 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죄의식을 다스리는 경우, 즉 그가 자유로울 경우 그것은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후에 알튀세르가 정신분석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프로이트의 발견을 상당히 앞지른 유일한 인물, 즉 마키아벨리가 규정지었던 규칙들에 나는 다가갔던 것이다.”(120) 또한 그 경험은 가족, 그에 말에 따르면 “모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중 가장 끔직하고 가장 지독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그 가족”(121)의 세계로부터 떨어짐으로써 느끼는 행복을 가르쳐주었다. 로베르 포새르와 그람시, 레닌 이후 확립된 ‘기계’로서의 국가(그렇기 때문에 국가‘장치’이다. 아다시피 기계의 가장 큰 특징은 ‘자동성’이다)의 관념. 이 가족이라는 장치는 무엇을 하는가. 바로 “어린아이에게 그가 사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모든 높은 가치들, 즉 절대적인 모든 권력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튀세르 말마따나 인류의 3대 나르시스트적 상처(갈릴레이의 상처, 다윈의 상처, 무의식의 상처) 이후 더 치명적인 네 번째 상처는 성스러움, 권력과 종교의 장소 자체인 가족이 된다. 물론 교훈만 있었던 생활은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언제나 [모든 종류의] 예비품을 마련해 두고자 하는 강박관념...모든 지출은 깎아 내리고 반면에 저축에 저축을 더해 가는 그 강박관념”(123)을 추가로 얻게 된다. 아마 그의 생애 내내 계속되었고, 또한 혼자 있지 않기 위해 친구들, 심지어 여자들도 예비하게 된 습관이 여기서 나오게 된 것이다. 아마 글을 쓰던 당시에는 자신이 예전과 다름을 느끼고 의식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 나는 지출과 위험이 없는, 즉 돌발사건이 없는 삶이란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돌발사건과 지출(매매되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지출: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정의다)은 삶 전체의 일부분을 이룰 뿐만 아니라 삶의 그 궁극적 진리에서, 그리고 하이데거가 너무나 잘 표현했듯이 삶이라는 그 ‘사건’Ereignis에서, 즉 삶의 출현과 그 귀결에 있어서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내가 깨닫게 된 것 같다.”(124)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바로 포로생활의 탈출을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이다.(여기서 어떤 이들은 김기덕의 영화 <빈집>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포로가 탈출한 것을 확인하면 독일군은 상당히 넓은 지역의 군대와 헌병대에 경보를 울려 거의 확실하게 체포에 성공했기에 그가 생각한 탈출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선 자신이 수용소에서 사라져버려 탈출했다고 믿게 한 다음, 3~4주의 경계태세 후에 진짜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탈출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 즉 숨어버리는 것 그 안에 머무르면서 탈출하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도 후에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의 교훈>같은 책에서 그가 공산당에 계속 남아있는 일을 비판한 예를 들면서 랑시에르가 이 일을 알았더라면 여러 생각을 했으리라고 말한다.


 그는 입학하고 수용소 생활로 인해 6년만에 다시 고등사범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에 그는 거의 평생동안 고등사범에서 머물게 되는데 그는 이 곳을 “어머니의 품과 같은 진짜 둥지”(187)라고 표현하는데, 거기서 그는 철학에 관한 작업을 지속함과 동시에 엘렌느와 첫 만남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알튀세르를 만날 당시에 이미 뛰어난 공산당의 투사였다. 엘렌느는 특별히 이론적으로 정통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경험에 관해서라면 매우 뛰어났고(지나가는 길에 잠시 라캉이 등장하는데, 그는 언젠가 엘렌느에게 “당신은 매우 훌륭한 정신분석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경험들은 알튀세르에게 현실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엘렌느의 관계는 흔히 이야기하는 바처럼 ‘평탄한’ 것은 아니었으며,(그는 엘렌느의 묵인 아래 계속해서 다른 여자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우울증과 과대망상증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완전히 무능하지 않나 하는 두려움(가령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를 출간한 뒤에 찾아왔던 심각한 우울증)과, 전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인 과대망상증이 동시에 존재한 것이다.(그가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와 프로이트가 강조한 정서의 양가성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이론적 확인이다) 알튀세르의 기벽과 잦은 정신적 어려움에 대한 엘렌느의 고통에 관해서는 다음의 통렬한 구절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너무나 자랑스럽게, 그리고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 엘렌느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폐쇄된 고독에서 진정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가 침대에서건 어디서건 뭐든지 얘기 좀 해요! 라고 내게 되풀이할 때 그녀의 고통에 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얘기 좀 하라는 것은 곧 자신이 고독하게 혼자 버려진 채 영원히 끔찍하고 고약한 여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달라는 것이었다.

내게 뭐든지 얘기 좀 하라는 것, 그 말이 단순히 내게 모든 것을 달라는 것일 때, 즉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당신의 시선과 삶 속에서 진정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이 불안을 막아낼 만한 것을 달라, 우리 사랑이 그저 지나가는 한순간일 뿐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에는 이미 이 손상된 이 사랑으로는 부족하리라는 그 불안을 막아낼 만한 것을 달라는 의미일 때, 이 고통에 찬 요구에 이 세상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160)


 그 다음 얘기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울텐데, 그의 철학에 관한 이력, 당시에 철학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시 복귀한 학업에서 알튀세르는 바슐라르의 지도 하에 헤겔에서의 내용 개념에 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한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철학에 관한 자신의 독서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이 나온다.

“철학 서적에 대한 나의 지식은 오히려 한정되어 있었다. 나는 데카르트와 말레브랑슈는 잘 알고 있었으나, 스피노자는 조금 알고 있었을 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소피스트들, 그리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전혀 몰랐다. 또한 플라톤과 파스칼은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칸트는 전혀, 헤겔은 약간, 그리고 마르크스는 몇몇 부분만을 상세히 읽었을 뿐이다.”(190)

그는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배웠다고 말한다.(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에 나오는 표현대로라면 耳學이 될 것이다) 그는 또한 그것을 하나의 시추작업에 비유한다.(이 비유를 따온 책도 있다. 문성원의 <철학의 시추>) 그러나 아마 이러한 언급에서의 ‘약간’, ‘조금’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 것이다. 가령 그는 당시 프랑스에 헤겔을 알린 알렉산드르 코제브(라캉 역시 이 헤겔 세미나에 참석했으며 그에 대해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지젝의 헤겔 이해 역시 코제브의 헤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런지?)의 글을 모두 읽어 보았으며 그가 헤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임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고 일축한다. 대신 <정신현상학>을 번역한 장 이폴리트를 높이 평가한다. 좀 길지만 알튀세르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으면 이러하다.

“그[코제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죽음에 이르는 투쟁과 역사의 종말을 중심으로 돌아갔는데, 그 역사에 대해 그는 어이없게도 관료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역사, 즉 계급투쟁의 역사는 끝났으나 역사는 계속 진행되는데 단지 거기서는 일상적인 사물의 관리(administration)(생-시몽 만세!)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철학자로서의 자기 욕망과 고위 관료라는 직업적 조건[코제브는 재무부 고위직을 맡고 있던 러시아 출신 망명자였다]을 결합시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헤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완벽한 무지는 차치하더라도 어떻게 해서 코제브가 이 정도로 자신의 청중들, 즉 라캉과 바타이유, 크노 및 다른 수많은 이들을 현혹시킬 수 있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헤겔 자신의 책을 읽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202)

또한 당시에 활동했던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평가가 이어지는데, 이를테면 사르트르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후설, 하이데거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철학소설가”일뿐이고, 사르트르와 더불어 프랑스에 현상학을 소개한(여기서 레비나스의 몫이 빠져있다는 것은 이채로운데) 메를로 퐁티는 그와는 전혀 다른 깊이를 지닌 철학자였지만, 결국 유심론이라는 프랑스적 전통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서술된다. “메를로는 진짜 위대한 철학자로, 데리다라는 거인이 나오기 전 프랑스의 마지막 철학자였으나, 헤겔이나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주는 바가 없었다.”(204) 아마 이 현상학자들, 또한 현상학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인간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평가절하된 것은 알튀세르의 맑스주의가 구조주의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론적 반인간주의(그리고 그것이 동반하는 실천적 인간주의)의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그리 이해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강단철학자들의 이름도 언급된다. 라베송, 베르그송, 르키에, 그리고 최근에 페르디낭 알키에, 마르시알 게루 등 숱한 유심론적 주석가들. 요컨대, <맑스를 위하여>의 서문에서 그가 쓴 것처럼 철학에서도 정치에서도 스승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그의 친구 자크 마르탱을 통해 알게된 두명의 사상가 쟝 카바이예스, 조르주 캉길렘 같은 비범한 인물도 있었지만 말이다.

다소 산발적인 서술이 계속되지만 흥미있는 에피소드는 “편지는 언제나 제자리에 도착한다”라는 라캉의 테제에 대한 알튀세르의 반대에 관한 얘기다. 즉 그는 “편지는 제자리에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유물론적 테제를 제시하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라캉은 족히 10분간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그리고 라캉은 “알튀세르는 이론가이지 실천가가 아니”라고 답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알튀세르는 시인한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마르크스주의의 제일원리와 마찬가지로 ‘실천’ 그 자체이기 때문에 분석 과정에서 어떠한 미세한 효과들일지라도 무의식과의 관련 하에서 목적지에 도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라캉도 옳았지만 자신도 옳았다고 덧붙인다. 그 논쟁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으로 자신은 철학적 입장에서, 그리고 라캉은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발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사실 그가 좀더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인데, 철학과 정신분석 간의 쟁점에 관한 어떤 것을 암시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정신분석에 관한 한 알튀세르의 태도는 미묘하다. 본인이 오랜 시간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라캉 등의 이론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피분석자(요즘 식으로 말하면 분석주체, 이 책에서는 역전이가 반대-전위로 번역되어 있는 것 같다)의 한 사람으로서 정신분석에 관한 비판적인 태도가 책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그의 유고집 중 <정신분석 논집>이 번역된다면 그 사정을 파악하기 용이하겠지만 이는 국역된 알튀세르의 글들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가령 ‘프로이트와 라캉’의 논문(<아미엥서의 주장>에 수록)에서의 정신분석에 관한 긍정적 태도와는 달리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나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 같은 논문(<알튀세르와 라캉>에 수록)에서는 정신분석, 특히 라캉에 관한 강한 비판적 태도를 보인다. 사실 이것에 관해 다루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인데, 아마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이 말한 것처럼 하버마스-푸코의 모더니티 논쟁의 배후에는 훨씬 더 심오한 논쟁, 바로 알튀세르와 라캉의 논쟁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라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런지? (관심있는 독자들은 좀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진태원씨와 홍준기씨의 논쟁들(<라깡의 재탄생>과 <철학사상> 16집에 수록)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진태원씨의 논문은 연작 논문이므로 조만간 ‘알튀세르의 유령들2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철학에 관한 자신의 입장과 정치에 관한 입장들이 전개된다. 육체에 대한 열광(그가 각각 이론적, 실천적 측면에서 그것을 찾은 것은 바로 스피노자-“누구도 아직 신체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규정하지 못했다”-와 맑스였다)을 통한 맑스주의에의 입문, 철학을 뒤흔들어놓고 배후에서 공격하는 것으로서 기원, 목적, 진리보다 더욱 근본적인 ‘실천’이라는 범주, 그리고 자신이 근 30년간 보존해오고 있는 사유 즉 마주침의 유물론에 관한 간략한 설명, 공산당의 많은 과오들과 광범위한 대중운동에 관한 희망-그 유명한 의지에 대한 지성의 우위,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의 우위의 정식으로 요약되는-등등. (사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들이고, 내가 당장 쓸 역량도 되지 않아 여기서 다루기는 어렵고 만약 가능하다면 다른 기회를 빌려야 할 것 같다. 이 부분은 그의 다른 책 <철학에 대하여>의 내용과 상당히 겹치기에, 가능하면 <철학과 맑스주의> 등과 읽으면 우발성의 유물론에 대한 스케치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서전의 막바지에 가면 다시 엘렌느에 관한 회상으로 돌아간다. 거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우발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한 ‘과잉결정’이 존재했다. 며칠 전부터 급격히 심해진 그의 우울증, 상태의 악화 때문에 그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엘렌느가 그것을 만류한 점, 몇 주간 계속되었던 이 부부의 두문불출, 엘렌느가 계속해서 자살 충동을 내비쳤으며 알튀세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던 점,... 어느 날 침대 위에서 엘렌느의 목을 마사지하고 있던 도중 그는 불현듯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가 그녀의 자살을 도왔던 것일까? 아니면 평생을 정신병에 시달렸던 그의 불안, 여성에 관한 두려움-이런 표현이 감히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탓이었을까? 아니 일단 그것이 교살이기는 했을까? 어떤 의사의 말처럼 목에는 급소가 많기에, 어쩌면 교살이 아니라 마사지 도중의 사고였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송기형 교수가 쓴 한국어판 해설에서처럼 그의 생애를 단순히 하나의 스캔들로 바라본다거나, 잡담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 그리고 발리바르가 말한 것처럼 알튀세르의 책들은 읽어보지도 않고 단지 자서전의 단편적인 사실들로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프랑스 국내외의 언론들은 그 엄청난 사건 이후 온갖 선정적인 보도를 통해 그를 아내를 죽인 미치광이 공산주의자 철학자로 매장한 일이 있다. 거기에는 이미 철학=광기, 공산주의=범죄 등의 등식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 자서전을 하나의 자기 해명으로서 내놓는다. 물론 이것은 구차한 자기변명의 차원은 아니다. (“자기변명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유물론에 대한 유일한 정의이다.”) 이 책은 자신의 고통받은 삶에 대한 드문 고백이며, 하나의 비극적 문학작품일 것이고, 현대를 가로지르는 온갖 역사적 정세에 대한 비평이자 자신이 몸담았던 그 격렬한 운동과 철학에 대한 애도이자 해체, 희망의 표현이다.

글쎄, 그렇다고 해도 죽은지는 15년이 지났고 그가 사고했던 맑스주의는 한물 간 것처럼 보이고, 그가 밥벌이했던 철학, 이론에서의 계급 투쟁이자 과학에 대해서는 정치를, 정치에 대해서는 과학을 표상했던 바로 그 '철학' 역시 마찬가지로 찬밥 신세로 보이는 때에 알튀세르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내용을 갖춰 답하긴 이른 것 같아도 그의 유령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고,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피칠갑을 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재촉하고 있는 현실은 그에 대한 그야말로 공정한 애도와 극복으로서의 계승을 요구한다. 여러가지 좌익적 운동의 난립과 유행 속에서 알튀세르주의는 수상쩍게 억압된 것, 하나의 증상. 계속해서 회귀하는 어떤 것으로 남는다. 하나의 대중운동이라는 영원히 낡지 않는 표상으로서. 이 유령은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l'avenir dure longtem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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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벌써 쓰신지 꽤 되셨네요^^ 방선생님 수업 들으셨나보네요
점점 문학이 아니라 철학을 전공할 껄 그랬나 라는 생각이 드는데, 박사학위를 받은 선배들은 '철학에 '너무' 빠지지 마라'라고 하는데, 철학에 '너무' 빠지지 않는게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저는 '이론의 우회'가 아니라 '전공의 우회'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 여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바라님은 철학 전공이시죠?

바라 2007-02-16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리하신 기인님. 방선생님 수업들은 것도 맞고 철학 전공인 것도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둘다 매우 부실해서; 과는 한 학기밖에 안 다녔고, 그 수업은 한 세번 출석한 것 같군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별로 좋은 글도 아니고 늘 그렇듯 멋모르고 쓴 글이라 거듭 부끄럽군요. 입대전 여름방학 때 읽은 책이었는데, 보잘 것 없는 리뷰가 그 책을 읽기 싫어지게만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인데요...
 

남극일기는 지독한 영화이다. 굳이 5년간의 제작 기간, 85억원이라는 제작 액수 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임필성은 첫 장편 데뷔를 찬사와 악평의 양극화된 관중들과 함께 맞게 되었고, 송강호는 여전히 건재를 과시했다. 그의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한에서는 가장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유지태도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 배역을 맡긴 했지만, 송강호에 가려진 탓인지 또는 자신의 연기력이 덜 만개한 탓인지 어쩐지 한 끗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남극일기는 또한 숭고한 영화이다. 여기서의 숭고란 바로 ‘미’와 대비되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라고 해보자. 그것은 물론 일단 롱기누스 이래로 이해된 바와 같이 엄청난 크기, 무제한적인 대상의 ‘양’적 형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광막한 빙하, 남극. 그리고 ‘도달불능점’으로의 무한한 탐험이 주는 막막함은 그 크기(자본뿐 아니라 스펙타클 자체가 갖는)에서부터 관객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숭고는 단지 남극(실제로는 뉴질랜드이지만) 자체의 속성에서만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남극일기의 영상들이 숭고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부적합성, 우리의 이성에 온전히 현시되지 않는 이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쾌와 불쾌의 교차, 그리고 이러한 낯선 부정적 쾌를 안겨주는 영화가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만약 남극일기가 단지 수학적 숭고에 그친 것이었다면 아마 그저 그런 재난 영화의 범주에 넣는 것 정도로 지나갈 수 있는 영화라고만 하면 족할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도 크기의 숭고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이러한 할리우드적 숭고와의 단절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영화가 역학적 숭고-우리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의 차원으로 옮아가는 지점에 있다.

 

“이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파스칼이 말했던가. 남극의 공간은 절대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 마치 무 자체인 것만 같은 공간이다. 6달은 낮만 계속되고, 6달은 밤만 계속되는 곳, 하늘은 마치 이전에,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본 것만 같이 태연하고, 그 드넓은 공간을 걷고 또 걸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곳, 모든 계측기와 통신 장치가 무력화되는 곳이 바로 남극이다. 도달불능점을 향하는 6명의 대원들은 이 ‘무’와 싸워야 한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모든 가상을 걷어낸 이후 네오 앞에 펼쳐졌던 사막의 모습처럼, 남극은 모든 상징적 질서를 걷어낸 뒤에 존재하는 ‘실재’를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아까 흘리고 간 사진과 그 옆에 난 자그마한 구멍, 한참을 헤매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 지점은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또 제자리로 돌아오는 실재이다. 언제 어디서 크레바스를 숨기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실질적으로 6명의 탐험대를 떠받치고 있기에 실재이다. 그 자체 도달불능점이면서 그 안에 도달불능‘점’을 가지고 있는 ‘물 자체’로서의 남극은 실재이다. 그리고 이 실재에 온갖 환상과 의미가 덧붙여지는데, 이는 영화 종반에 80년전 영국 탐험대가 남기고 간 일지에서 나오는 말이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욕망이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무엇에 대한 욕망인가? 바로 정복과 성취와 만족을 위한 욕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욕구demand와는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정확히 욕망desire이라고 새겨져야 마땅하다. 세계최초라는 상징,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야한다는 상징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욕망 말이다.(물론 이 탐험대의 대장인 송강호, 그리고 그의 아들과도 같은 막내 유지태는 거기에 태극기 따위를 꽂으러 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사로잡혀 있는 강박증은 이 영화가 안겨주는 충격과 공포가 단지 외적 대상이 아닌 탐험대의 내부, 더 정확히는 우리의 내부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어설픈 타협을 거부하고 끝까지 간다. 이제까지의 단서에 그친다면, 남극일기는 식상한 공포 영화의 아류가 되거나, 대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그려내는 재난 영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송강호라는 캐릭터이다. 그는 대장으로서 탐험대원 6명을 이끄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라는 지위가 상당히 독특하고 애매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자식이 없는 아버지이다. 그는 피를 나눈 가족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탐험대원들이 유일한 그의 가족-아들들-일뿐이다. 그의 아들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엄마는? 아이의 엄마는 영화를 통틀어서 어디에서도 암시되지 않는다. 다만 이 죽은 아들의 환상은 탐험하는 내내, 아니 송강호가 살아있는 내내(탐험 자체가 그의 삶, 생명과 동일시되어 있으므로) 계속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추락하는 아들의 환상을 쫓아버리기 위해서, 아니면 그 환상 속으로 완전히 침잠하기 위해서 그는 탐험한다. (빗금쳐져 있지 않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도달불능점을 향해 가거나, 늘 텐트 밖에서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전진과 정지의 일치)

 

이 아버지 캐릭터는 갈수록 입체감이 증발되어 가며 그 일관된 잔혹함과 광기를 내보인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아들을 한 명 한 명 죽여 간다. 물론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달불능점을 향한 ‘불가능한’ 탐험에 내버려 둠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강렬한 생명력의 “원초적 아버지”는 그의 친아들이 죽었던 방식을 계속해서 ‘상연’해갈 뿐인지도 모른다. 균도 없는 남극에서 감기에 걸린 듯이, 환상에 사로잡혀서, 아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죽임으로써. 나약한 아들들은 하나둘 죽어간다. 아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전진할 뿐이다. 남극이라는 무대 위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혹독한 방치의 드라마. 이것은 적어도 ‘외관상으로’ 모노드라마는 아니다. 막내아들 유지태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지태 역시 친부모는 없다. 그저 송강호에게 매혹되어 탐험대에 합류했을 뿐이다. 이 ‘상상적’ 매혹은 기묘하게도 막내아들과 아버지의 동형성을 암시한다. 일례로, 처음 자신의 잘못으로 한 대원이 죽었을 때, 그리고 다른 대원들이 차례로 죽어 나갔을 때도 그는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하는 쪽을 택한다. 대장으로부터 80년 전의 영국 탐험대원들이 남기고 간 일지를 건네받은 것도 유지태이다. 이처럼 거울의 양면처럼 자기를 비추고 재인지하는 아들과 아버지는 결국 끝까지 남는다(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렇게 되도록 연극 장치가 조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틀려진 목적론).

 

이 와중에는 부대장으로 대표되는 아들들의 반란이 감초처럼 끼어든다. 어떤 주석가가 했듯이 후기 프로이트의 토픽을 비유하자면, 부대장의 반란은 자아붕괴의 은유가 되는 것은 억설일까? 이 반란에 아버지는 자아(자연의 빛을 한껏 받아 안는)의 안경을 부숴버리는 것으로 응수한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됐다. 자아는 알아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다. 동시에 초자아는 인자하게 다른 아들의 발을 자른다. 광폭한 날씨의 씬과 더불어 정신 장치에 대한 탈중심화는 보다 급진적으로 진행된다. 막내아들(이드)과 아버지(초자아)의 동형성이 보다 선명하게 발휘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부터이다. 이 둘이 사실 무의식의 상이한 두 측면이라는 점에서 사실 전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남은 의식의 아들들의 무덤을 지어준 뒤 둘 다 도달불능점으로의 행보를 계속한다. 그리고 일몰의 마지막 순간, 이 둘은 도달불능점에서 조우한다. 라캉이 “칸트와 함께 사드를”이라고 외쳤을 때 또한 이 목적론적 마주침과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유로워져라”, 아들은 “즐겨라”를 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항이 바뀌어도 별다른 상관은 없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자신의 진리는 알지 못한 채로 아들은 묻는다. 이 도달불능점이 당신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애초에 질문은 핵심을 빗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환상을 걷어내고 ‘가만히’ 그것만을 지속하는 충동drive 또는 향락jouissance. 그것은 만족과 불만족의 변증법, 상징적 의미망을 비껴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탐험은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선험적 이성의 변증론이 가리키는 이념의 세계로 외출하는 과정 자체, 그곳으로 가야 하기에 갈 수 있는 의무 자체에서 그 윤리성을 획득한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의 모티브는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죄의식을 떨쳐버리고 싶은 심리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지태는 물론 그 과정을 알지 못한 채로, 그러나 그 숙명적 매혹을 느끼면서 그 윤리적 행위에 합류했다. 마지막 대화의 와중에 “너만은 나를 말려야 했다고”라는 말 속에서 이 두 두 남자의 동근원성은 통렬하게 드러난다. 이 ‘실재의 윤리’는 새로운 주체철학의 판본을 제시한다. 이 분열증.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이 분열증의 교훈은 결국 어디서 찾아야 할까.(결국 이 교훈을 찾으라는 것이 이 새로운 계몽철학의 유언이 될 것이다)아들은 구출받고 아버지는 계속 제 갈 길을 간다.

 

마지막으로 남는 물음. 남극이라는 실재 속에서 실재의 윤리는 제 나름의 정당성을 찾기는 한다. 그러나 실재의 윤리학에 대해 적절한 ‘대상’을 찾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그 실재는 한갓 스크린 위에서, 이곳 남한이 아닌 저 멀리 뉴질랜드에서, 또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숭고를 감식하는 우리의 미감적 이념 속에서, 가상적으로만 남아있는 낭만주의적 잔재에 불과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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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기획 - 세계인권선언 뜯어보기 ②] 논쟁조항 살펴보기 - 17조 재산권 조항

 

[기획 - 세계인권선언 뜯어보기 ②] 논쟁조항 살펴보기 - 17조 재산권 조항
논쟁과 타협 속 기억해야 할 출발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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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숙 
세계인권선언 17조
1. 모든 사람은 단독으로는 물론 타인과 공동으로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세계인권선언 17조, ‘재산권’ 조항은 읽는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재산을 인권으로 인정한다고? 그러면 재산 많은 사람에게 눌리는 다른 인권은 어떡하란 말이야?” 혹은 “재산권은 세계인권선언도 보증하는 당연한 인권인데 왜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은 재산을 가지고 그리도 못마땅해 하는 거야?”, 이렇게 서로 다른 식의 이해 또는 오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계인권선언 17조는 불친절하다. ‘재산’이 ‘무엇’인지를 얘기하지 않고 ‘재산권’을 얘기하고 있고, 재산을 ‘단독’으로 가져도 ‘공동’으로 가져도 괜찮다고 하니 안 해도 그만, 해도 그만인 말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선언을 기초한 사람들의 생각은 과연 어땠을까? 17조를 구성하고 있는 생각을 크게 세 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재산의 소유는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둘째, 재산은 단독으로뿐만 아니라 타인과 공동으로 가질 수 있다. 셋째,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않는다. 이 세 요소를 차례로 살펴보자.


세계인권선언 17조의 영문본 <그림 출처 : UN Photo>


재산의 의미

재산의 소유를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것으로 여겼지만, 선언은 재산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선언을 만든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생각은 논쟁 중에 계속 변했다. 처음에 인권으로서 생각한 재산의 의미는 공익을 침해할 수 있는 ‘사적(private) 소유’가 아니라 ‘개인적 (personal) 소유’였다. 즉 사는 집, 소지품, 가구, 프라이버시를 보장받는 통신 등에 대한 개인의 소유를 생각한 것이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소유자가 될 권리를 인권으로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선언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처음 논의를 시작할 때 다뤄진 문구는 ‘존엄한 삶과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에 대한 권리’를 재산권으로 봤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개인 재산을 가질 권리를 갖는다고 본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의 조항 이전에 중간 채택했던 조항의 문구는 “모든 사람은 존엄한 삶에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개인과 가정의 존엄성 유지를 돕는 그러한 재산을 가질 권리를 가지며, 이를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곧 흔들리게 된다.

여러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개인적 재산의 개념이 나라마다 다른데,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필요나 최소한의 재산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의 개인 소유를 기본적 권리로 봐야 하느냐? 이런 문제 앞에서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를 재산으로 보는 것은 너무 막연한 표현이라 비판받았다. 인간의 존엄한 삶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재산권을 정당화하는 것이 막연한 반면에 개인 재산 외의 다른 종류의 재산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선언 기초자들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해내는 경제체제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냐를 생각하게 되자, 의견이 대립되는 건 당연했다. 재산권을 앞서 말한 개인의 소유에 국한하는 것은 협소하다는 지적과 함께 이윤창출 기업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등의 여타의 재산권도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 소유와 사적 소유 둘 다를 재산권으로 인정하는 걸 반대했다. 개인의 소유가 생산방식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일부 사람은 엄청나게 소유하는 반면 다수를 착취하고 굶주리게 하는 일은 나쁜 것이고, 광산․운송서비스․은행 등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 일이니 개인의 소유와 사적 소유는 다르다고 했다. 더 나아가 국가 경제 전체의 부에 대한 동등한 몫을 요구할 권리, 기업의 이윤에 대한 몫을 요구할 노동자의 권리를 재산권이라 주장했다.

이런 대립 속에서 선언 기초자들은 경쟁하는 경제체제에 대해 뭔가 말해야 하는 곤란에 부딪쳤다.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인권선언이 어떤 체제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서로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단독’으로나 ‘타인과 공동으로’

그래서 선언은 “단독으로는 물론 타인과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라고 말한다. 어느 하나가 아닌 둘 다를 허용하는 혼합 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단독”이라는 말은 개인 소유와 사적 소유 둘 다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당시 소련은 우려를 표했다. 그래서 “그 재산이 위치한 국가의 법률에 따라서”를 덧붙이자고 주장했다. ‘단독’이냐 ‘공동’이냐의 소유형태의 선택을 국가가 할 수 있어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가능성을 불허할 수 있고, 그래야만 사회주의 체제가 세계인권선언에 의해 배제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단독으로”란 말은 개인적 재산에 대한 권리뿐만 아니라 기업에 대한 사적 소유도 포함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식 경제 방식을 배제한다고 봤다. 선언의 취지를 따져보면 ‘단독’의 소유가 사적 소유만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그것을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에 영국과 미국은 국가가 자본주의를 불법화하고 사적기업소유를 금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소련안을 반대했다. 개인소유냐 공동소유냐를 결정하는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소련의 제안대로 하면 선언과 같은 보편적 문서에서의 재산권이 무의미해진다고 했다. 다른 여러 국가들도 국가 법률을 언급하면 선언의 도덕적 탁월성이 손상되고,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기존의 재산관련 법률을 승인하게 된다는 이유 등으로 반대했다. 결론적으로 “그 재산이 위치한 국가의 법률에 따라서”란 소련안은 거부되었다.

사유형태든 공유형태든 둘의 혼합이든 어느 쪽을 선호하든지 선언 기초자들이 ‘무제한적’인 재산 소유권을 옹호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재산권에 대한 ‘제한 요건’을 충족시킨다는 조건 하에서 자본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 간에 중도를 유지하려 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들조차 순수자본주의 체제란 게 설령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의 관점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언 기초자 중 그 누구도 시장의 자유로운 흐름이 인간 존엄성에 요구되는 재화를 전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선언 29조에 권리의 제한과 규제를 둔 이유이다.

한때 제한 요건을 17조 자체에 두느냐, 딴 조항에 별도로 두느냐도 또 하나의 논쟁거리였다. 결론은 별도의 조항인 29조에 “공동체에 대한 의무”,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란 제한에 모아졌다. 선언 29조에 있는 제한 요건이 재산권 조항만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재산권 조항이 그것의 구속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29조에 덧붙여 더 중요한 제한 요건은 노동권 관련 조항이다. 재산을 만들어내는 노동자의 권리에 의해 기업의 재산권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 기초자들은 분명히 인식했다.

재산을 무엇으로 보고, 어떤 재산에 대해 얼마만큼 제한을 두어야 하느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다. 한 예로, 세계인권선언을 모태로 한 양대 국제인권규약(약칭 자유권 규약, 사회권 규약)에는 재산권 조항이 없다. 그 이유는 재산권은 인권이 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 아니라 재산권을 어느 정도 어떻게 제한해야 하는가에 대해 국가들이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의적 박탈 금지

재산권에는 재산을 획득할 권리와 재산을 획득한 후에 그것을 이용하고 향유할 권리가 포함된다. ‘자의적 박탈 금지’는 획득한 재산에 대한 사후 보호를 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논쟁의 핵심은 ‘자의적’이란 단어의 의미이다. ‘불법적’이란 단어를 더 선호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거부됐다. 선언 기초자들은 ‘자의적’이라는 것이 곧 ‘불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국가는 법률로써 얼마든지 자의적일 수 있기 때문에, 법률로 행해진 일이라 할지라도 모두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재산의 박탈은 자의적인 박탈과 법률에 의한 박탈 둘 다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자의적이란 말은 불법이 아닌 오히려 불의하고 정당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이해됐다.


모아 읽기

선언에서 재산권 조항만 따로 떼어서 읽는 것은 안 될 일이다. 다른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재산권 조항은 홀로 있는 ‘섬’이 아니라 다른 여러 권리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권리이고, 그것이 위치한 더 큰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할 권리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권 등 경제사회적 권리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재산권 조항은 선언에서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구분되는 권리군의 중간에 놓여있다. 어떤 국가는 재산권을 자유권으로 읽고, 어떤 국가는 모든 사람의 생명, 노동, 주거, 교육, 의료 등에 관계된 권리와 같이 고려하지 않으면 재산권을 권리로 고려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그래서 국가의 자의적 개입이나 간섭을 배제하기만 하면 보장될 수 있는 권리로 재산권을 바라보는 국가가 있는 반면에,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의무가 요구되는 사회권으로 취급하는 국가가 있다.

유엔은 어떤 식이냐 하면, 재산권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이란 주제 속에서 다뤄왔다. 그 속에서 주된 논의는 재산권을 여타 인권과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재산권에 대한 논의를 돕기 위해 90년대에 독립전문가(Mr. Uis Valencia Rodriguez)를 임명한 일이 있다. 그는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개인의 사적 소유를 보편적 인권으로 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사적 소유의 이용은 소수의 손에 생산수단의 집중을 촉진해왔을 뿐 아니라 소수가 무제한으로 부를 축적하게끔 했다. 이는 엄청난 부의 소유자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 간의 계급 분화의 근본원인이다. 집단적 재산이 이런 결점들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 왔으며 재산의 사적 이용은 국가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지금껏 알려진 어떤 경제체제에서도 절대적으로 사적인 생산수단의 소유 현상은 결코 없으며, 공공의 이용․안보․건강보호 등의 필요성에 법으로 제한돼왔다”고 말한다.

이처럼 선언의 기초과정에서 불거졌던 문제들은 여전한 논쟁거리이다. 눈에 보이는 명시적 문구는 없지만, 인간의 존엄성 실현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를 누릴 권리로서의 재산권이 17조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권오름 제 7 호 [입력] 2006년06월08일 0: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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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벼리 1] 춤추는 경찰폭력, 가속페달을 멈춰라

 

 

[벼리 1] 춤추는 경찰폭력, 가속페달을 멈춰라

 

신자유주의시대 경찰폭력의 작동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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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 
우리 사회는 80년대의 투쟁을 통해 군사정권을 극복하고, 형식적이나마 민주적 진전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이후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져온 소위 문민정부들 하에서도 경찰의 폭력은 끊이질 않았다. 2001년 인천 부평의 대우노동자들에 대한 탄압, 2002년 롯데호텔 파업에 대한 폭력 진압, 2004년 부안 핵폐기장 반대운동에 대한 경찰폭력, 2005년 농민집회 당시 경찰에 의한 두 명의 농민 살해사건, 최근의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과 경북지역 건설 노동자 파업에 대한 탄압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파업과 집회/시위 현장에서 문민 정권들은 과거 군사정권과 다를 바 없이 폭력적으로 경찰력을 사용해 왔다.


잠들지 않은 경찰폭력

물론 경찰이 과거 군사정권 시절과 비교해 전혀 달라진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람들을 납치/감금하고 고문을 하는 등 무소불위의 불법적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하게 되었으며, 공권력의 행사에 있어 최소한의 합법적 모양새는 갖추려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 진전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의 현장이나 집회/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폭력은 끊이질 않고 있으며,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경찰 폭력은 위험수위를 넘은 지 오래이다. <사진 출처: 노동자 미디어 광장>


2005년 쌀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 집회에서 경찰은 처음부터 작정한 듯 공격적인 진압 작전을 펼쳤고, 수백 명의 집회 참가자들에게 부상을 입히며 심지어 치료를 받던 부상자에게까지 방패를 내리찍는 등의 폭력을 휘두른 끝에, 두 명의 농민 참가자 전용철, 홍덕표 씨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로 경찰청장까지 사퇴를 했지만, 경찰의 폭력 진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얼마 전 7월 16일에도 포항의 건설노동자 집회에서 한 노동자가 경찰의 방패에 머리를 맞아 심각한 뇌출혈로 생명이 위독한 상태다. 7월 9일 평택에서는 미군기지에 공생하는 상인들의 테러를 방조하고, 불법 검문으로 사람들의 통행을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경찰에게 항의하는 긴급집회를 가진 행진단에 대해,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새벽임을 이용하여 이미 해산 중이던 이들에게 집단 린치를 가하고 머리채를 잡아 연행하는 등의 폭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경찰의 폭력은 집회 현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4월 경찰은 순천 하이스코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대테러 작전에나 투입되어야 할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은 노동자를 향해 전기충격으로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전자총까지 사용하였다. 경북지역 건설 노동자들이 파업을 조직하자, 노조 지도부에 대해 ‘협박공갈죄’ 등 말도 안되는 혐의를 적용하여 검거하는 등 노조에 대한 탄압을 가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인권경찰, 뒤로는 인권탄압

위의 사례들에서 보듯, 경찰폭력은 주로 강압적인 정부정책에 저항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불안정 노동과 착취에 저항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이에 연대하는 인권, 사회단체들을 겨냥하고 있다. 부안 핵폐기장 유치 반대, 농민들의 쌀개방 반대, 평택미군기지의 토지강제수용 반대, 최근의 한미 FTA 저지 등에서, 그리고 울산 건설플랜트, 청주 하이닉스, 기륭전자, 코오롱, KTX 여승무원, 경북 건설 노동자 등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 경찰은 늘 공격적인 진압 작전과 함께 폭력을 휘둘러왔다.

'인권경찰'의 전시장에서 인권단체들이 연 경찰폭력 규탄 기자회견


그런데 이러한 경찰의 폭력은 과거와는 달리 합법성을 가장하고 있다. 오늘날 이른바 문민정부들은 민중의 삶에 적대적인 정책들을 수립하고 추진하면서도, 형식적으로나마 획득한 절차적 정당성을 활용하고 있다. 쌀 개방이나 평택미군기지 확장 등은 형식적이나마 국회의 동의를 얻은 것이다. 상시적인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대 등 더욱더 불안정해진 노동 역시 97년 국회에서 통과된 노동법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민주성을 앞세우고, 경찰은 정부 정책과 노동 착취에 반발하는 민중들의 저항을 진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으로, 경찰은 인권을 내세우며 자신들을 ‘인권 경찰’로 포장하고 있다. 2005년 10월 4일 경찰은 ‘과거의 잘못된 모습을 바로잡아 인권 경찰로 거듭나겠다’며 남영동 대공분실을 폐지하고 경찰청 인권센터로 만드는 ‘인권경찰 비전선포식’을 가졌다.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허구적인 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은, 실제론 남영동 대공분실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다른 부서로 통합 이전되었을 뿐이며, 심지어 이 행사가 있고나서 불과 한달 후에 전용철/홍덕표 살인 진압 사건이 발생했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또한 경찰이 인권을 내세우는 것은 단지 자신들의 폭력적 실체를 가리려는 의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에는 생존을 걸고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을 폭력 시위로 매도하여 탄압을 정당화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대표적인 예가 폴리스 라인이다. 경찰은 집회에 폴리스 라인을 설치한 뒤, 그 선을 넘어오지만 않으면 진압하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경찰은 합법적인 집회 시위를 보장한다는 인권 친화적 모양새와 함께, 이를 지키지 않는 시위대를 불법 폭력 시위대로 탄압할 명분까지 얻는 것이다.


교묘해지는 경찰 폭력 - 사적 폭력의 방조와 묵인

경찰이 용역 깡패들의 폭력과 평화 행진에 가해진 상인들의 테러 등 사적 폭력을 묵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최근 레이크사이드CC 골프장에서는 사측 구사대와 용역이 노동자들에게 초산이 담긴 비닐봉지를 투척하여 한 노동자가 실명위기에 처해있는 실정이다. 평택에서는 미군기지를 위한 토지강제수용에 반대해 평화롭게 행진하던 '평화야 걷자‘ 행진단이, 기지 확장에 찬성하는 상인들에게 각목과 돌멩이 등으로 한밤중에 테러를 당했다. 두 사례 모두 경찰은 현장에 있었으나 폭력 사태를 방관하기만 했을 뿐, 현행범 체포는커녕 이들을 제지하거나 해산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다.

지난 1월 병원측에서 동원한 용역업체 직원들이 현관에서 세종병원 조합원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사진 출처: 보건의료노조 부천세종병원지부>


이렇게 경찰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사적 폭력을 용인함으로써, 자신들 스스로는 부담을 덜고 ‘인권경찰’이라는 세련된 이미지를 구기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저항 세력에게는 더욱 악랄한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 폭력은 경찰이 직접 수행하거나 지시한 것은 아닐지라도, 경찰 폭력이 교묘해지고 세련화되는 경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사회 협약’의 탈을 쓴 기만적 선전

이렇게 허구적인 합법적/인권적 이미지를 구축하고 활용해온 경찰은, 최근에는 소위 ‘평화적 집회시위 문화 정착을 위한 민관공동위원회’(아래 민관공동위원회)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이 민관공동위원회는 농민 집회에서 농민 참가자가 사망하는 등 집회/시위에서의 폭력 충돌이 사회문제가 되자 정부와 몇몇 시민단체 인사들이 이를 일종의 “사회적 협약”을 통해 해결해보겠다며 꾸린 국무총리실 산하의 조직이다.

그러나 애초에 갈등의 근본 원인인 수탈적인 정부 정책은 젖혀놓고, 시위대에게만 폭력 사용의 책임을 묻는 이 위원회의 접근 방식은 그 자체로 기만적이고 폭력적이다. 실제로 이 위원회는 경찰청 내의 태스크 포스 팀이 만든 방안들을 민간위원들이 제대로 검토해보지도 못한 채 승인해서 발표하는 식으로 운영되며, 이곳에서 발표한 대책안을 살펴보면 △강화된 소음기준과 폴리스라인의 엄격한 적용 △특정인에 대한 집회 참가 차단 △형벌의 상향 조정 △민사상 배상 청구 활용 등 철저히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약하고, 정부 정책에 저항하는 이들의 합법적 공간을 줄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경찰의 폭력을 통제하는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식으로 추진되는 정부와 경찰의 “사회적 협약”은 갈등과 충돌의 책임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기는 선전 도구로서, 이를 빌미로 저항하는 이들을 더욱 탄압하려는 정부와 경찰의 수법에 불과하다.


경찰폭력 없는 세상을 위하여

이렇듯 날이 갈수록 세련화되고 교묘해지는 국가와 경찰의 폭력은 제도적으로 견제될 필요가 있다. 우선 경찰이 진압작전을 수행할 때는 반드시 개인 식별 표지를 부착하고,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진압작전의 세부 내용을 공개하여 공권력 행사에 책임이 뒤따르도록 해야 한다. 한 집회에서 농민이 두 명이나 사망했는데도 아무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분명 잘못된 것으로,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막강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그만큼 엄격한 책임을 지워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시위진압만을 전담으로 맡는 준군사조직인 경찰기동대가 축소 내지 폐지되어야 하며, 위헌 논란과 함께 그 자체로 인권침해의 소지가 많은 전의경의 시위 진압 동원이 금지되어야 한다. ‘대간첩작전’이라는 전투경찰설치법의 목적이 사실상 불필요해진 상황에서, 과거 민주화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전의경들을 동원하던 일을 아직도 계속하는 것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

또한 날로 심해져가는 구사대와 용역 깡패들의 폭력과, 이를 방조하는 경찰의 직무유기를 견제하기 위해 용역경비업법이나 경찰관 직무집행법 등 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집회나 파업 현장에는 국가인권위 등의 인권 감시 기구에서 상시적으로 감시단을 파견하여 공권력의 폭력적인 행사를 감시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결국은 문제해결의 뿌리까지, 곧 정부로 하여금 민중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적대적인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권오름 제 13 호 [입력] 2006년07월19일 5: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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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6-08-0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 12일. 내려다 본 광화문의 풍경에 가슴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