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일기는 지독한 영화이다. 굳이 5년간의 제작 기간, 85억원이라는 제작 액수 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임필성은 첫 장편 데뷔를 찬사와 악평의 양극화된 관중들과 함께 맞게 되었고, 송강호는 여전히 건재를 과시했다. 그의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한에서는 가장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유지태도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 배역을 맡긴 했지만, 송강호에 가려진 탓인지 또는 자신의 연기력이 덜 만개한 탓인지 어쩐지 한 끗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남극일기는 또한 숭고한 영화이다. 여기서의 숭고란 바로 ‘미’와 대비되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라고 해보자. 그것은 물론 일단 롱기누스 이래로 이해된 바와 같이 엄청난 크기, 무제한적인 대상의 ‘양’적 형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광막한 빙하, 남극. 그리고 ‘도달불능점’으로의 무한한 탐험이 주는 막막함은 그 크기(자본뿐 아니라 스펙타클 자체가 갖는)에서부터 관객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숭고는 단지 남극(실제로는 뉴질랜드이지만) 자체의 속성에서만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남극일기의 영상들이 숭고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부적합성, 우리의 이성에 온전히 현시되지 않는 이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쾌와 불쾌의 교차, 그리고 이러한 낯선 부정적 쾌를 안겨주는 영화가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만약 남극일기가 단지 수학적 숭고에 그친 것이었다면 아마 그저 그런 재난 영화의 범주에 넣는 것 정도로 지나갈 수 있는 영화라고만 하면 족할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도 크기의 숭고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이러한 할리우드적 숭고와의 단절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영화가 역학적 숭고-우리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의 차원으로 옮아가는 지점에 있다.
“이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파스칼이 말했던가. 남극의 공간은 절대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 마치 무 자체인 것만 같은 공간이다. 6달은 낮만 계속되고, 6달은 밤만 계속되는 곳, 하늘은 마치 이전에,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본 것만 같이 태연하고, 그 드넓은 공간을 걷고 또 걸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곳, 모든 계측기와 통신 장치가 무력화되는 곳이 바로 남극이다. 도달불능점을 향하는 6명의 대원들은 이 ‘무’와 싸워야 한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모든 가상을 걷어낸 이후 네오 앞에 펼쳐졌던 사막의 모습처럼, 남극은 모든 상징적 질서를 걷어낸 뒤에 존재하는 ‘실재’를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아까 흘리고 간 사진과 그 옆에 난 자그마한 구멍, 한참을 헤매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 지점은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또 제자리로 돌아오는 실재이다. 언제 어디서 크레바스를 숨기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실질적으로 6명의 탐험대를 떠받치고 있기에 실재이다. 그 자체 도달불능점이면서 그 안에 도달불능‘점’을 가지고 있는 ‘물 자체’로서의 남극은 실재이다. 그리고 이 실재에 온갖 환상과 의미가 덧붙여지는데, 이는 영화 종반에 80년전 영국 탐험대가 남기고 간 일지에서 나오는 말이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욕망이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무엇에 대한 욕망인가? 바로 정복과 성취와 만족을 위한 욕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욕구demand와는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정확히 욕망desire이라고 새겨져야 마땅하다. 세계최초라는 상징,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야한다는 상징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욕망 말이다.(물론 이 탐험대의 대장인 송강호, 그리고 그의 아들과도 같은 막내 유지태는 거기에 태극기 따위를 꽂으러 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사로잡혀 있는 강박증은 이 영화가 안겨주는 충격과 공포가 단지 외적 대상이 아닌 탐험대의 내부, 더 정확히는 우리의 내부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어설픈 타협을 거부하고 끝까지 간다. 이제까지의 단서에 그친다면, 남극일기는 식상한 공포 영화의 아류가 되거나, 대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그려내는 재난 영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송강호라는 캐릭터이다. 그는 대장으로서 탐험대원 6명을 이끄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라는 지위가 상당히 독특하고 애매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자식이 없는 아버지이다. 그는 피를 나눈 가족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탐험대원들이 유일한 그의 가족-아들들-일뿐이다. 그의 아들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엄마는? 아이의 엄마는 영화를 통틀어서 어디에서도 암시되지 않는다. 다만 이 죽은 아들의 환상은 탐험하는 내내, 아니 송강호가 살아있는 내내(탐험 자체가 그의 삶, 생명과 동일시되어 있으므로) 계속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추락하는 아들의 환상을 쫓아버리기 위해서, 아니면 그 환상 속으로 완전히 침잠하기 위해서 그는 탐험한다. (빗금쳐져 있지 않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도달불능점을 향해 가거나, 늘 텐트 밖에서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전진과 정지의 일치)
이 아버지 캐릭터는 갈수록 입체감이 증발되어 가며 그 일관된 잔혹함과 광기를 내보인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아들을 한 명 한 명 죽여 간다. 물론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달불능점을 향한 ‘불가능한’ 탐험에 내버려 둠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강렬한 생명력의 “원초적 아버지”는 그의 친아들이 죽었던 방식을 계속해서 ‘상연’해갈 뿐인지도 모른다. 균도 없는 남극에서 감기에 걸린 듯이, 환상에 사로잡혀서, 아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죽임으로써. 나약한 아들들은 하나둘 죽어간다. 아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전진할 뿐이다. 남극이라는 무대 위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혹독한 방치의 드라마. 이것은 적어도 ‘외관상으로’ 모노드라마는 아니다. 막내아들 유지태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지태 역시 친부모는 없다. 그저 송강호에게 매혹되어 탐험대에 합류했을 뿐이다. 이 ‘상상적’ 매혹은 기묘하게도 막내아들과 아버지의 동형성을 암시한다. 일례로, 처음 자신의 잘못으로 한 대원이 죽었을 때, 그리고 다른 대원들이 차례로 죽어 나갔을 때도 그는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하는 쪽을 택한다. 대장으로부터 80년 전의 영국 탐험대원들이 남기고 간 일지를 건네받은 것도 유지태이다. 이처럼 거울의 양면처럼 자기를 비추고 재인지하는 아들과 아버지는 결국 끝까지 남는다(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렇게 되도록 연극 장치가 조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틀려진 목적론).
이 와중에는 부대장으로 대표되는 아들들의 반란이 감초처럼 끼어든다. 어떤 주석가가 했듯이 후기 프로이트의 토픽을 비유하자면, 부대장의 반란은 자아붕괴의 은유가 되는 것은 억설일까? 이 반란에 아버지는 자아(자연의 빛을 한껏 받아 안는)의 안경을 부숴버리는 것으로 응수한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됐다. 자아는 알아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다. 동시에 초자아는 인자하게 다른 아들의 발을 자른다. 광폭한 날씨의 씬과 더불어 정신 장치에 대한 탈중심화는 보다 급진적으로 진행된다. 막내아들(이드)과 아버지(초자아)의 동형성이 보다 선명하게 발휘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부터이다. 이 둘이 사실 무의식의 상이한 두 측면이라는 점에서 사실 전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남은 의식의 아들들의 무덤을 지어준 뒤 둘 다 도달불능점으로의 행보를 계속한다. 그리고 일몰의 마지막 순간, 이 둘은 도달불능점에서 조우한다. 라캉이 “칸트와 함께 사드를”이라고 외쳤을 때 또한 이 목적론적 마주침과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유로워져라”, 아들은 “즐겨라”를 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항이 바뀌어도 별다른 상관은 없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자신의 진리는 알지 못한 채로 아들은 묻는다. 이 도달불능점이 당신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애초에 질문은 핵심을 빗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환상을 걷어내고 ‘가만히’ 그것만을 지속하는 충동drive 또는 향락jouissance. 그것은 만족과 불만족의 변증법, 상징적 의미망을 비껴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탐험은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선험적 이성의 변증론이 가리키는 이념의 세계로 외출하는 과정 자체, 그곳으로 가야 하기에 갈 수 있는 의무 자체에서 그 윤리성을 획득한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의 모티브는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죄의식을 떨쳐버리고 싶은 심리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지태는 물론 그 과정을 알지 못한 채로, 그러나 그 숙명적 매혹을 느끼면서 그 윤리적 행위에 합류했다. 마지막 대화의 와중에 “너만은 나를 말려야 했다고”라는 말 속에서 이 두 두 남자의 동근원성은 통렬하게 드러난다. 이 ‘실재의 윤리’는 새로운 주체철학의 판본을 제시한다. 이 분열증.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이 분열증의 교훈은 결국 어디서 찾아야 할까.(결국 이 교훈을 찾으라는 것이 이 새로운 계몽철학의 유언이 될 것이다)아들은 구출받고 아버지는 계속 제 갈 길을 간다.
마지막으로 남는 물음. 남극이라는 실재 속에서 실재의 윤리는 제 나름의 정당성을 찾기는 한다. 그러나 실재의 윤리학에 대해 적절한 ‘대상’을 찾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그 실재는 한갓 스크린 위에서, 이곳 남한이 아닌 저 멀리 뉴질랜드에서, 또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숭고를 감식하는 우리의 미감적 이념 속에서, 가상적으로만 남아있는 낭만주의적 잔재에 불과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