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님 홈피서 펌. 나중에 한가해지면 읽어봐야겠다;;;

 

월간 <사회운동> 11월호에서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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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시민권의 철학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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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 | <번역>장진범 | 정책편집부장



[역주: 지난 호까지 연재한 『책 속의 책』 페미니즘 기획을 마치고, 이번 호부터 정치 비판 및 정치 이념에 관한 새로운 기획을 시작한다. 1991년 현실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몰락하면서, 지난 150여 년 동안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들의 가장 강력한 이념이었던 마르크스주의 역시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념에 대한 회의는 이념 일반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고, 자본주의의 틀을 받아들이는 한에서 실용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 이외의 모든 발본적 모색은 '거대담론'에 대한 시대착오적 집착으로 억압되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및 그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재)출현은 정치 이념 문제를 긴급한 의제로 올려 놓는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다. 한 편으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근대의 지배적 정치 형태를 근거 짓는 이념이었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모순이 낳은 결과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 원인 중 하나로서 기존 이념을 반성하고 변혁하기 위한 모색이 당면한 과제 중 하나로 나선다. 다른 한 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면적으로 벌어지는 대중 투쟁들을 더욱 확산시켜야 할 뿐 아니라, 이들을 새로운 대안 세력으로 묶어 내는 과제가 제기된다. 이는 정치 이념의 문제를 돌파하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우리가 정치 비판 및 정치 이념의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그 시작으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인간 시민권(Human Civic Rights)1)의 철학은 가능한가? 평등한 자유에 관한 새로운 반성」을 싣는다. 이 글은 근대 정치 이념의 시초가 되는 평등과 자유, 인권과 시민권의 관계에 관한 그의 기왕의 논의를 정교화하는 한편, 민주적 헌법을 기초 짓는 핵심 원리로 각각 기본권과 인민 주권을 특권화하는 지배적 논쟁 지형에 개입하여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직접적으로 유럽 헌법 조약을 둘러싼 논쟁을 겨냥한 것으로, 실제로 발리바르는 이 글 이후 유럽 헌법 조약의 문제점 및 새로운 헌법이 담아야 하는 핵심 원리를 적극적으로 발언한다(유럽 헌법 조약 당시 발리바르의 입장에 관한 소개로는, 강국, 「유럽헌법조약 부결과 정치이념 논쟁」, 월간 『사회운동』 2005. 7/8월호(통권 56호)를 참고하라.). 뿐만 아니라 이 글에서 발리바르는 근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쟁점인 '소유'와 '공동체' 문제가 항상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나타난 까닭은 각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인간학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개인'의 인간학과 '주체'의 인간학 의 이율배반에 있음을 밝히면서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배제를 배제하는' '정치적 인간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은 앞으로 정치 이념에 관한 논의를 해 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준거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1)역주 여기서 '시민(적)'이라고 새긴 'civic'은 통상 '공민(적)'이라고 번역하는데, 현재 한국어 용법에서 '공민권'이라는 말이 너무 낯설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렇게 번역했다. 최근 발리바르는 예컨대 'civil disobedience'(시민 불복종)이라는 말을 'civic disobedience'라고 바꾸어 부른 바 있고, 'civic right'라는 표현 역시 각주 2에서 보듯 토론회 제목으로 제시된 'civil right'라는 표현과 선을 긋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재 'civil'이라는 단어가 국가/시민사회, 집단/개인, 공/사 등의 이분법을 받아들인 채 후자의 영역에 국한되어 사용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즉 발리바르가 'civil right'가 아니라 'civic right'라는 표현을 통해 제기하는 것은, 시민권이 이미 구성된 체계의 일부인 시민사회 안에서 주어진 권리를 향유하는 권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새로운 체계를 (탈)구성하여 새로운 권리를 (탈)구성하는 권리라는 점이다. 이렇듯 발리바르의 '시민권' 개념이 기존의 시민권 개념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본문으로




인간 시민권(Human Civic Rights)의 철학은 가능한가? 평등한 자유에 관한 새로운 반성

나는 여기서 평등한 자유(아이쿠아 리베르타스, aequa libertas)라는 통념에 관한 "새로운 반성들"을 제시하고 싶은데, 이 통념은 고대(키케로)부터 존 롤스와 아마르티아 센의 작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대 논쟁들에 이르는 공화주의 정치 전통 전체에 걸쳐 존속해 왔으며, 나는 이전의 연구에서 이 통념을 평등한 자유(equaliberty, galibert , igualibertad, Gleiche Freiheit, or Gleichheit/Freheit 등)라는 압축된 혼성어 형태로 제시한 바 있다.2) 이 반성들을 통해 정치 철학의 고전적 문제 곧 시민권(rights of the citizen)의 민주적 정초(定礎, foundation)를 토론하는 데 기여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다. 철학에서 정초는 원리 특히 구성(構成, constitutive) 원리의 해명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민권" 자체가 입헌(入憲, constitutional) 질서의 핵심이자 목표를 이룬다 성문적이든 불문적이든, 형상적이든 질료적이든, 규범적이든 구조적이든 고 상정할 때 여기서 문제는, 우리 역사에 깊이 뿌리박힌 철학적-정치적 언어유희를 따라 말하자면, 헌법의 구성(constitution of constitution) 같은 것이다(하지만 언어마다 외양은 다양하다: 프랑스어로는 constitution de la constitution이지만, 독일어로는 Konstitution der Verfassung이다.). 여기서 나는 이 구성의 구성을 '해체'(deconstruction, 탈-구축)의 정신에 따라 다루고 싶은데, 이는 파괴라거나 순전한 자격박탈이 아니라 탈-구축(Ab-bau)3), 전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는 문제적인 요소들과 부정적, 이율배반적 또는 아포리아적 측면들을 끌어냄으로써, 개작이나 전위 심지어 역전(나는 결론 부분에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은데, 이는 한나 아렌트의 일부 고찰에서 나름대로 영감을 얻은 것이다.)의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4)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내가 간략히(그리고 희망컨대 논란의 소지가 없는 방식으로) 상기하고 싶은 것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근대 시민권(citizenship)에 내재한 철학 혁명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원리상의 난점을 제기하는가 하는 점이다. 근대 시민권, 곧 고전주의 시기에 시작하여 17~19세기의 인민 봉기와 헌법 개혁을 통해 이루어진 정치 변혁에 의해 전진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무한한 과제를 구성한다고 널리 인정받는 근대 시민권을, 고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시민권과 구별 짓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 원리의 발명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가 이미 말했듯, 폴리테이아(polliteia, 정치체)나 키비타스(civitas, 도시국가)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이우스 코뮤니스(ius communis, 공동의 법)와 콘센수스 포풀리(consensus populi, 인민의 동의)에 준거했다. 근대 시민권을 뚜렷하게 특징짓는 것은, 적어도 권리상 또는 원리상으로 본다면, 시민 지위의 보편화다. 즉 시민 지위는 특권이기를 멈추고 대신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보편적 접근의 견지에서 파악되기에 이른다. 정치적 권리에 대한 권리(아렌트가 말했듯 "권리를 가질 권리")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권리가 바로 그것이다.5)
우리 근대인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하지만 또한 동시에 불편한, 근대성의 유산을 대표하는 이러한 관점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우선 외연적(extensive) 보편성이다. 즉 세계정치적(cosmopolitical) 지평이 그것으로, 다양한 민족적, 연방적 시민권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족적 시민권과 국제법의 절합이 상이한 정도로 이러한 지평에 근접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내포적(intensive) 보편성이라 부르려는 것이 훨씬 중요한데, 이는 공통의 인간성, 헤겔이나 포이어바흐 식으로 말하면 가퉁스베젠(Gattungswesen) 또는 "유적(類的) 존재"인 특성 없는 인간 고유성(properties)을 결여한 인간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을 정치 참여의 지주 또는 "주체/기체"(基體, subject)로 제시한다. 이 내포적 보편성은 조건이나 지위, 본성을 이유로 한 시민권의 부인을 금지하고, 배제를 배제한다. 우리는 보편성의 개념화에 본래적인 이 부정성 또는 "부정의 부정"의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적 시민권은 이상적으로(또는 이렇게 말하길 원한다면, 규범적으로) 인간성이라는 술어와 시민성이라는 술어의 동연성(同延性, coextensivity), 두 관점의 상호성, 등식을 설립한다. 유명한 철학 정식을 빌려 말하자면, 호모 시베 키비스(Homo sive Civis, 인간 즉 시민)다. 정치적 근대성을 기초 지었으며 우리의 헌법 전문 대부분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는 위대한 선언들에, 진술적이면서 동시에 수행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다른 학자들을 따라 다른 곳에서 논증한 것처럼 이들 선언의 핵심 골자는, 이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영미권의 입헌 전통에서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는 『권리 장전』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자유(equal liberty) 또는 "평등 자유"(equaliberty) 명제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진다.6) 이 명제는 특유의 이중 부정 또는 동시 부정 형태로, 평등은 자유 없이 불가능하고 자유 역시 평등 없이 불가능하다는 점, 따라서 자유와 평등은 상호 함축 관계에 있다고 정립한다. 그리하여 이 명제는 유적(類的) 인간과 시민권을 원리상 동치로 만들며, 이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법적 일치(adequation)를 함축한다. 따라서 이는 근대에 전형적인 보편주의적 관점에 따라 헌법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난점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집요하고 해결 불가능하기 십상인 난점, 민주적 보편주의를 포기하거나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되며, 민주적 보편주의의 구성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그 난점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볼 때 이러한 난점을 낳는 이유들의 원천 또는 집합을 최소한 세 가지 정도는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민주주의적 헌정을 구성하는 명제 자체를 재고하거나 재정식화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식으로 이것들을 소묘해보고 싶다.
첫째(여기서 나는 물론 독창성을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난점들은 민주주의적인 권리 구성/헌정(democratic constitution of rights)이라는 관념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나오는데, 이는 기본권(게랄트 슈트르츠(Gerald Stourzh)의 주저 제목에서 환기된 기본권 민주주의(Grundrechtsdemokratie))라는 통념과 인민 주권 또는 입법적이고 입헌적인 "일반 의지"라는 통념 사이의 경합에서 표현된다.7)
둘째 나는 이 측면이 사실 첫 번째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추상적으로 규범적인 관점과 역사적·정치적으로 구체적인 관점 간의 대립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해석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난점은 보편주의적 정초가 준거하는 인간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의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우리는 우주론적(cosmological)이거나 신학적인(또는 우주신학적인) 관점을 인간학적인 관점으로 바꾸는 역사적 대체 이는 근대성을 고유하게 특징짓는 대체다 의 결과 과거 신이나 세계로 형상화되던 최종적 준거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인간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대립된 의미작용 또는 이해방식으로 즉시 분할된다는 "형이상학적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이를 표현할 수 있다. 공동체적 인간은 소유자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으며, 내가 도입하고 싶은 용어법에 따르자면 "주체"로서의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다. 비록 양자 모두 유적이며, 둘 다 시민과 일치하고 시민의 권리 구성을 내부로부터 결정하게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이 이중성은 정치를 실질적으로 민주화하려는 또는 평등한 자유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려는, 항상 갈등적인 시도와 절차들 안에서 한 시도 그치지 않고 작동해 왔다.
셋째, 마지막으로 난점은 "정초"는 그 관념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본질적이고 돌이킬 수 없이 이율배반적이라는 사실, 즉 자기 자신과 모순을 빚고 그 자신이 설립하는 원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온다. 여기서 나는 얼마간 구성/입헌 권력(constituent power)이라는 통념의 고전적 이율배반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신학적 뿌리는 법이나 질서를 설립하는 궁극적 지점이 또한 필연적으로 모든 질서와 적법성이 해소되는 지점, 법질서의 보편성에 관한 예외 지점이자 그 법적 제약에 관한 해방의 지점 역시 표상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하지만 내가 또한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은 보편화 자체가 배제, 또는 심지어 내적 배제 절차와 분리할 수 없어 보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는 원리를 실현하는 데서 겪게 되는 우연한 난점들이나 역사적 상황에 따른 원리들의 단순한 경험적 제한 내지 특수화 같은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것을 표상한다. 이는 구성/입헌이나 [헌법의] 재정초라는 관념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용한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명백히 역설적인 것으로서, 이는 보편성 자체에 고유한 "유한성"의 종류는 무엇인지, "민주주의" 또는 "시민권"이라는 정치적 이름을 지닌 해방 과정의 무한한 또는 미완적 성격에 고유한 "유한성"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이다. 내가 방금 환기시킨 각각의 점들을 도식적이고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세 가지 경우에서 내 목표는 우리가 지도 원리로 삼는 권리의 민주적 구성/입헌이라는 관념에 본래적인 아포리아적 요소들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환기시킨 첫 번째 난점은, 모두 알다시피 정치적·철학적 담론과 분리할 수 없는 메타법적인 담론 안에서, 민주적 구성/입헌 질서의 지속적인 "정초"가 어떻게 가능한지, 따라서 그러한 질서에 대한 보증이 어떻게 제공될 수 있는지 그려볼 수 있는 두 가지 전망[기본권의 관점 대 인민 주권의 관점] 사이의 긴장과 관련된다.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이유 때문에 이 난점은 1945년 이후 독일의 상황에서 특히 뚜렷하고 명료한 형태로 정식화되었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가 오늘날 각별한 함의를 지닌다는 점 역시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권력과 공적 권위에 관한 입헌적 전망, 가능하다면 민주주의적인 구성/입헌의 전망을 탈(post)민족적이거나 상위(supra)민족적 공간, 특히 유럽 공간으로 확장하는 문제를 우리가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이 두 측면(외연적 측면 상위민족체로의 이행 과 내포적 측면 공적 권력들의 민주화)은 분리할 수 없다.
나는 두 명의 동시대 독일 저자들에게서 몇 가지 정식화를 빌려올 생각인데, 그 중 한 명은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고, 다른 한 명은 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Ernst-Wolfgang B ckenf rde)로, 이들은 이러한 난점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상당히 비슷한 용어로 이러한 난점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작인 『사실성과 타당성』의 핵심 장에서 하버마스는, 정치 질서를 내적으로 규제하는 "권리 체계"는 두 방향 중 하나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는 "실정법이라는 수단에 따라 자신들의 공동의 삶을 규제"8)할 것을 합법적으로 지향하는 시민들 사이의 상호 인정 과정 안에서 작동하는 [권리 체계의 두 방향 사이의] "내적 긴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양가적인 법적 타당성(validity)"을 한 편으로는 루소주의적인, 다른 한 편으로는 칸트주의적인 계보에 따라서 (이 점이 중요하다) 자율(성)의 원리를 이해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에 철학적으로 준거 짓는다(여기서 논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사실 이는 하버마스에게는 루소와 칸트의 담론이 서로에 대해 단순히 외재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권리 체계의 토대에 관한, 따라서 법적 측면, 도덕적 측면(주체적인 자기결정과 주체성들 사이의 상호 인정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는)과 고유하게 정치적 측면 간의 내적 관계에 관한 하버마스의 논의 전체는 그가 관점들 사이의 "암묵적인 경합" 관계라고 부르는 것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두 가지 경합하는 관점은 입헌 질서가 기본권(Grundrechte)으로 간주되는 인권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과, 인민 주권 원리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이다.9) 하버마스는 이 두 가지 관점이 "근대 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관념들"이라고 본다.10) 과연 이 두 관점은 그것을 수단으로 합의, 또는 하버마스의 인상적인 정식화를 따르자면 "일인칭 복수"(us, nous, wir)11) - 이는 자기결정이나 권리들의 상호 인정이라는 실질적 과정에 의해 전제된다 - 를 생산함과 동시에 그것에 규범을 주거나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관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관념은 보완적이기보다는 경합적인데, 특히 민주주의에 관한 "자유주의적"이고 "시민 공화주의적"(civic republican) 개념화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토론이 잘 보여주거니와, 이 두 관념은 각각 도식적으로 칸트주의적 표상(비록 나 자신은 로크주의적 요소를 강조해두고 싶지만)과 루소주의적 표상으로 귀속될 수 있다. 전자는 주관적 권리들12) 사이의 상호성과 합의, 또는 이러한 상호성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평등한 자유를 규범의 보편성 위에 기초 짓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보편 규범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법률 질서의 "상류"(upstream)에서, 즉 개인들이 이상적으로 서로서로를 대체할 수 있고 따라서 견해의 차이나 이해의 갈등을 중화할 수 있는 도덕적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후자는 보통 "일반 의지"라 불리는 평등주의적 규범을 구체적(하버마스는 이를 "실존적"이라고까지 부른다.13))인 정치 행위 안에 통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정치 행위는 개인들의 사회화를 실현한다. 즉 개인들을 역사적 사회의 제도들 안에 통합시키는데, 이 때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거나 동원하지 않으면서, 개인에게 다시 한 번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일반적인 공적 이해 안에서 사적이고 특수한 이해를 초월하도록 강제하기까지 한다.
주지하듯이 하버마스가 이 딜레마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 입헌 전통 전체와 동연적이다 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하는 해법은 초월론적 형태를 취하는데, 여기서 그는 도덕화나 정치화의 방향으로 옮겨가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권리 구성/입헌의 수준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주는 제 3의 통념을 도입한다. 하버마스는 이 용어가 "의사소통"(communicational) 영역 또는 "의사소통 행위의 영역"에서 발견된다고 보는데, 여기서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언어 사용의 발화수반적(illocutionary)인 구속력이 이성과 의지를 화합시키는 데 봉사하며," 이는 "합리적 담론의 참여자로서 공동의 법주체들은 논란이 되는 규범이 그것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이들의 합의에 부합하는지, 또는 부합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14) 따라서 평등한 자유는 단순히 강제되거나 또는 준칙화되지 않으며, 그것을 자신의 주권성의 표현으로 보는 어떤 정치체(body politic)에 의해 도구화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자연히 이러한 "해법"이 실제로는 순환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한데, 왜냐하면 의사소통 절차는 사실 상호 인정이나 "합의"의 원천이라기보다는 효과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하버마스의 해법이 실제로는 인민 주권이나 집단의 자율성이라는 견지에서 [법·정치 체계] 정초를 바라보는 공화주의적이고 루소주의적인 전망보다는, 기본권이나 개별적인 권리 보장의 보편화의 견지에서 정초를 보는 칸트주의적인 도덕적 전망에 훨씬 가깝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가 제시하는 관점에서는 사태가 사뭇 달라지고, 실천적 목적 면에서 본다면 정반대가 된다.15)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뵈켄회르데가 민주주의 전통에 본래적인(사실은 그 전통에 고유하게 속하는)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관념의 난점들과 기본권(Grundrechte) 또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차례로 검토한다는 점을 상기시켜두고 싶다(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인민 주권의 표현이 약소자들을 말살하거나 심지어 배제하게 되는 근대성의 보편주의와 합리주의에게는 치명적인 점이지만 가능성을 설명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탈(脫)전체주의 헌법들이 다시 한 번 크게 힘주어 강조했던 점이다).
구성/입헌 권력이 완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그것이 주권을 기초 지음에 있어,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특히 해방적 봉기의 고유하게 구성적/입헌적인 순간에 능동적으로 구성되는, 집합적 전체로 간주되는 "인민" 뿐만 아니라, 뵈켄회르데가 미조직 인민이라고 부르는 이들, 권리 보장 및 헌법적 통제 체계로 온전히 통합되지 못한 채,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다면 (예컨대 보통 선거권의 행사에서 볼 수 있듯이) 헌정의 단순한 한 기관으로 변형되지 못한 채 항상 그 아래에 머물러 있는 이들까지 자신의 토대로 삼는 한에서다.
다른 한 편, 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모든 시민들 사이에서 이 권리들을 분배한다는 관념, 그리고 이 분배의 실질적 실현이라는 관념과 분리할 수 없어 보인다. 나 자신은 이 후자의 관념 안에서 평등한 자유라는 관념의 강력한 표현을 읽고 싶다. 이제 이 분배라는 문제가 가동시키는 것은, 정치적 권리를 사회적 권리와 동일시하는 경향 뵈켄회르데는 이 양자 사이의 일치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같은 경향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본권에 대한 규범적 개념화가 제도에 관한 또는 가치론에 관한 이론이나 개념화를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통제할 수 없는 운동(말하자면 "전방으로의 탈출(fuite en avant)"16)이다. 뵈켄회르데는 이 과정을 "기능적 민주주의"(functional democracy)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권리 및 의무의 분배를 지배하는 것은 추상적 규범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과정으로서 민주주의적 과정 자체다.17)
결국 뵈켄회르데가 두 가지 정초 그 역시 두 가지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간 반정립의 초월을 파악하는 방식은 하버마스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니와, 이는 그가 도덕적 차원에 비해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정치적 차원을 인민의 구성/입헌 권력의 자기 규제 또는 자기 제한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 때문에 그는 "권력"(또는 "에너지"18)의 단계에서 규범(norm)과 정상성(normativity)의 단계로 이동할 수 있는데, 이는 정확히 그가 구성/입헌 권력 행사의 규칙 또는 조건에 관한 자신의 정의 안에 (그리고 그 행사 안에) "기본권"의 견지에서 정식화된 처방과 보장을 통합하는 한에서이며, 이는 최종 분석에서 보편주의적인 문화 전통에서 유래한다.19)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두 가지 원리 사이의 균형의 탐색, 또는 (인민적)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민주주의적 관념과 "기본권"이라는 (전자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 민주주의적 관념 간의 상호 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호 한정에서 구성/입헌 권력 또는 인민 주권이라는 관념은 우선권을 보유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계속하는데, 이는 시민권의 민족적 성격20), 즉 시민권과 인류 사이의 차이에 관한 그의 고찰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추상적 개인주의나 세계시민주의에서 정식화될 수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선택한 권위에 통치 받고 그 권위의 통제 아래 있겠다는 요구의 단순한 담지자로서 개인들 다수(multitude)로 인민이 해체되지 않고, "인민"이나 더 나아가 "미조직" [인민이] 계속 정치적 주체로 남아 소속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실제로 반드시 존속해야 한다.
내가 널리 알려진 이러한 입장들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이중의 가설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한 편으로, 고유하게 법적인 수준에서는 민주적 질서 또는 내가 평등한 자유라 부른 것을 일의적으로 정초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설사 평등한 자유가 의심의 여지없이 법적인 개념 내지 관념, 하나의 "권리 형태"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는 조금도 놀라운 사실은 아닌데,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법질서가 자신을 정초할 수 있을 만한 "형이상학적 점"을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자기정초는 내부로부터 불가피하게 타자성의 출현, 권리의 본질적인 불순성을 초래하거니와, 이는 반드시 도덕적이거나 역사-정치적인 기원에 따라 뒷받침되어야 하며, 양자 모두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이상화된다. 우리가 민주주의 질서를 고찰하고 있다고 해서 난점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는 이러한 난점을 순수한 형태로 제시하여 그것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뵈켄회르데처럼 "구성/입헌 권력"은 한계 개념이라고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본권" 역시 어느 모로 보나 한계 개념이며, 따라서 항상 규정된 내용과 공식화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 같은 한계들의 한계는 바로 이 두 가지 전망들의 합치 내지 일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원리의 문제로 간주될 경우 이러한 일치는 엄밀히 말해 획득할 수 없는 것이라면, 또는 무한한 탐색의 대상이라면, 귀결 문제로 간주된다면, 이는 즉각 주어진 것으로, 곧 평등한 자유 그 자체로 나타난다. 평등한 자유는 서로에 대한 배제 없는 인민 주권과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그것이 보편적 상호성의 원리 또는 규칙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함의한다.21) 평등한 자유가 요구하는 것은 정치 참여와 의사 결정에 대한 개인들의 기본권의 실현이며, 구체적으로 본다면 여기에는 바로 표현과 양심의 자유라는 권리, 법적 보장만이 아니라 심지어 교육과 직업적 지위에 대한 "사회적 권리"도 포함된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한 자유는 이중 구속의 이름이다. 평등한 자유는 해방의 관념 또는 민주주의 관념의 서로 다른 표현[곧 인민 주권과 개인의 기본권]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간의 정치적 연결을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개인과 공동체 양자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부당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류의 지평 내부에서 정립(되고 선언)된 원리들의 보편성과 동시에 "인민 주권"으로 설립된 결정의 자율성을 지칭한다.
내가 예고했던 마지막 두 가지 점에 관해서는 훨씬 소략하게, 심지어 전보를 치듯이 논해야만 할 상황이라서, 개략적인 정식화로 논의를 국한하도록 하겠다.
첫째(이것이 나의 두 번째 테제였다), 나는 이 두 가지 "정초적" 담론들의 감축할 수 없는 이원성과 근대적인 "인간" 문제의 역사 전체와 동연적인 철학적 이원성을 관련지어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최소한 우리는 두 가지 이원성을 활용하여 서로를 해명하려고 시도해 볼 수 있다. 각각의 담론들, 또는 차라리 민주주의 담론의 두 측면인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측면, 또는 원한다면 "개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측면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을 함축한다. 다시 루소가, 그리고 칸트보다는 로크가 여기서 준거점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로크는 문제의 기원에, 루소는 문제의 이행점에 각각 자리 잡고 있다. 한 편에는 주체의 인간학 쪽으로의 경향이 있는데, 그 지평은 공동체를 "간주관성"으로 구성하는 것이며, 그 중심 문제는 루소의 작업에서 눈부실 정도로 분명한 것처럼 법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서, 이는 뗄 수 없이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이고, "특수"하면서도 "일반"적인 문제다. 만일 모든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주권이라는 신학 정치적 개념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이 근대 인간학의 한 복판에 남아 있다면, 이는 정치의 내재성 안에 법의 초월성을 통합하려는 처음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획, 또는 [근대적] "주체"가 그 자신은 복종에서 면제되어 있는 외적이고 절대적이며 숭고한 권위22)에 종속된 수브옉투스(subjectus, 신민)나 수브디투스(subditus, 예속자)이길 그치고 그/녀 자신의 입법자이자 자기 자신의 구성/입헌적 권위가 되게 만든다는 기획 안에 근본 물음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루소는 권리의 공동체 또는 일반 의지를 평등주의적이고 절대적으로 상호적인 방식으로 구성함으로써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 했다. 이제 시민은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통치"와 "복종"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라23), 항상 동시에 통치하면서 복종하거니와, 민주적인 법 개념이 시민을 그/녀 자신에 대한 구성적인 "이중적 관계"에 위치 짓는 방식에 따라 "수직성의 감축"이 초래된다.24) 다른 한 편에는 개인의 인간학,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작주(動作主, agent)와 작인(作人, agency)에 관한 "개인주의적" 인간학 쪽으로의 경향이 존재한다. 개인의 자율성을 정초하려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책임성(accountability)을 동시에 정초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크, 그리고 그를 따르는 모든 전통이 이를 결정적인 방식으로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에 대한 배려"와 "보존"과 같이 오이케이오시스(oikeiosis)25)가 지닌 오래된 관념을 쇄신함으로써 "개인적 소유"(property in one's person)(훗날 자기 소유로 "번역된")라는 근대적 관념을 창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26) 로크가 창시한 인간학적 문제설정은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을 무시하지 않지만 분명 그것을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이를 본질적으로 "교류"(commerce)의 견지에서, 개인들의 자율적 사업과 이익에 기초를 둔 교환과 교통의 사회적 유대로 개념화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나의 세 번째 질문이었다), 이 두 가지 인간학적 정초 각각이 "정초" 자체의 이율배반이나 아포리아라고 불러야 할 것을 그 자신 안에서 재생산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볼 만하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며, 민주주의적 구성/입헌의 부정적 차원이라는 질문을 돌파함으로써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같은 부정적 차원 중 하나가 "저항권"이나 "봉기에 대한 권리" 같은 한계 개념의 "필연적 불가능성"으로 대변되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법적인 국가 질서 그 자체 내부에 이 질서 자체의 폐지 또는 예외의 순간을 기입한 것이다. 현 시점에서 훨씬 중요한 연구 대상은 아마 인권 보편주의의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함의를 정의하는 모든 절차에 본래적인 배제 형태(시민권에서의 배제, 심지어 "인간의 조건" 그 자체에서의 배제)일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루소에게는 "자유를 강제하기"27)라는 관념을 통해 나타나는데, 이는 분명 특정한 사회체의 정상성을 부과한다. 로크에게는 범죄자를 인류 바깥으로 배제하여 그를 시민권과 입법 권력에서 배제하려는 것이 유사한 역할을 한다. 그들의 인간 본성, 즉 그들의 인격을 저버리거나 상실하는 자들은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행위에 따라 노예 신분이나 공공의 적의 지위라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28)
아렌트가 - 『인간의 조건』보다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 제시한, "인간"과 "시민"의 역사적·이론적 관계의 역전에 기초한 권리의 무제한이라는 전망, 어떻게 인간이 시민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민권이 인간을 만드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정초라는 관념을 해소시키고, 평등한 자유(또는 역사에 의해 "내던져진" 모든 곳에서의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문제설정을 배제된 자의 포함이라는 문제설정 또는 배제의 배제라는 문제설정과 본래적으로 결합시키는 전망이 우리가 볼 때 극히 많은 면에서 결정적이고 불가피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2) 이 소론은 원래 2002년 6월 베를린의 마르크 블로흐 센터에서 "Droits de l'homme, Civil Rights, Grundrechte"[인권, 시민적 권리, 기본권]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학회 토론회에서 발표됐다. [발리바르가 평등한 자유라는 용어를 도입한 것에 관해서는, tienne Balibar, "'Rights of Man' and "Rights of the Citizen,'" in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trans. James Swenson (New York: Routledge, 1994), 39~59 [국역: 발리바르 외,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를 보라.] 본문으로

3) [역주] Abbau는 독일어로 "해체, 철거, 해고" 등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분철하면 Ab-bau, 곧 "탈-구축"을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 재구성하는 자신의 작업을 지칭하기 위해 이런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데리다가 사용한 "d construction"이라는 단어와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본문으로

4) [역주] 여기서 발리바르는 'foundation'(定礎, 주춧돌을 놓다), 'constitution'(構成, 얽어 이루다), 'constitutive'(入憲, 헌법을 세우다), 'construction'(構築, 얽어 쌓다) 등의 단어가 모두 '건축'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는 점을 체계적으로 활용한다. 예컨대 '헌법의 기초'를 논한다면, 헌법 자체가 법 질서를 기초짓는 법이라는 점에서, '기초짓는 것을 기초짓는 것'이 된다. 이 언어 유희를 통해 발리바르는 근원적 기초가 되는 원리(原理, 근원 이치)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무한퇴행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재치있게 표현하고 있다.본문으로

5) Hannah Arendt, Imperialism, book 2 in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2nd ed. (San Diego: Harcourt, 1968), 294를 보라.본문으로

6) [역주] 발리바르, 앞의 책 참고.본문으로

7) Gerald Stourzh, Wege zur Grundrechtsdemokratie: Studien zur Begriffs- und Institutionengeschichte des liberalen Verfassungsstaates (Vienna: B hlau Verlag, 1989)를 보라.본문으로

8) Jurgen 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Contributions to a Discourse Theory of Law and Democracy, trans. William Rehg (Cambridge: The MIT Press, 1996), 82 [국역: 나남, 2000]를 보라.본문으로

9) 위의 책, 94.본문으로

10) 위의 책, 99.본문으로

11) 위의 책, 97. 이는 Phenomenology of Spirit 4장 [국역: 한길사, 2005] 초입에 등장하는 헤겔의 놀라운 정식화를 떠오르게 한다. "'나', 곧 '우리', 그리고 '우리' 곧 '나'"[Ich, das Wir, und Wir, das Ich ist](G. W. F. Hegel, Phenomenology of Spirit, trans. A. V. Miller [Oxford: Clarendon Press, 1977], 110). 역주 "us, nous, wir"은 각각 영어, 불어, 독어의 일인칭 복수 표현이다. 본문으로

12) [역주] "주관적 권리subjective rights"란 객관적인 법체계와 구분하여 법적 주체들이 지니고 있는 권리들을 가리킨다. 때로는 정치적, 공적 권리와 구분되는 사적 개인들의 권리를 가리킬 때도 있다. 본문으로

13) Habermas, 앞의 책, 102. 본문으로

14) 위의 책, 103~4. 본문으로

15) Ernst-Wolfgang B ckenf rde, Le Droit, l'Etat et la constitution democratique: Essais de theorie juridique, politique et constitutionnelle, ed. Olivier Jouanjan (Paris: Bruylant L. G. D. J., 2000)을 보라. 본문으로

16) '전방으로의 탈출(fuite en avant)'은 "위험하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된 (정치적, 경제적) 과정을 가속화시킴"을 뜻하며, 심리학에서는 "두려워하는 위험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도록 내모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17) 위의 책, 268. 본문으로

18) 위의 책, 214. 본문으로

19) 위의 책, 222. 본문으로

20) 위의 책, 284~85. 본문으로

21) 프랑스 주권주의 전통이 평등의 이름으로 보여 준 "기본권"에 대한 경멸을 한탄할 때 게랄드 슈투르츠가 이의로 제기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본문으로

22) [역주] "그 자신은 복종에서 면제되어 있는 외적이고 절대적이며 숭고한 권위"는 근대 이전까지, 심지어 루소 이전까지 통용되던 주권 개념의 의미였다. 본문으로

23) Aristotle, The Politics and the Constitution of Athens, ed. Stephen Everson, trans. Benjamin Jowet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1277b. 본문으로

24) Jean-Jacques Rousseau, Of the Social Contract, book 1, chapter 7 in The Social Contract and Other Later Political Writings, ed. and trans. Victor Gourevitc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51 [국역: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tienne Balibar, "Apories rousseauistes: Subjectivit , Communaut , Propri t ," Les Cahiers philosophiques de Strasbourg 13 (Spring 2002): 13~36을 보라. 본문으로

25) [역주] "oikeiosis"는 "보존", "동일성", "전유"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희랍어로, 근대의 "economy" 개념의 어원을 이룬다. 본문으로

26) 자기 소유라는 표현은 로버트 노직이 Anarchy, State, and Utopia (New York: Basic Books, 1974) [국역: 문학과지성사, 1997]에서 도입했고, 그 후 G. A. 코헨이 Self-ownership, Freedom, and Equal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에서 채택했다. 반면 "소유적 개인주의"에 관한 토론을 개시한 작업인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국역: 박영사, 2002]에서, C. B. 맥퍼슨은 로크의 본래 용어법을 보존한다: "개인적 소유", "개인의 소유자." 본문으로

27) Rousseau, Of the Social Contract, book 1, chapter 7 를 보라. "따라서 사회계약은 유명무실한 형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반 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전 단체에 의해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되어야 한다는 약속을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다. 우선 이 약속이 있어야만 다른 약속들도 효력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이 자유롭게 되도록 강요한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본문으로

28) Second Treatise on Civil Government 4장(22~24절)에서 로크는 노예제를 정당화하는데 이는 기본적인 인권으로서 "자기 소유"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것은 노예의 종별적 "본성"이 아니라 범죄적 행실이다. "실로 자신의 과실로, 죽어 마땅한 어떤 행위로 자신 자신의 삶을 박탈하는 것. 그 자에게서 생명을 박탈한 자는 (그 자를 자신의 권력 아래 두고 있을 때) 그 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미룰 수 있고, 그 자가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이용할 수도 있거니와, 이런 행위는 그 자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 것이다."(John Locke, Two Treatises of Government, ed. Peter Laslet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284 [국역: 까치글방, 199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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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과 싸우며 보던 '파업전야', KBS에서 '상영'

 
 
한국 독립영화의 전설과도 같은 영화, 한국 최초의 노동영화,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팔뚝질 좀 해봤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조각의 기억 정도는 가지고 있는 영화 <파업전야>가 마침내 지상파 방송에서 상영된다.

△90년 당시 '파업전야' 상영안내 포스터. '사랑, 분노, 희망과 단결' ⓒ출처불명

KBS1TV의 독립영화 소개 프로그램인 < KBS 독립영화관>이 11월 10일 자정을 넘긴 새벽 1시 <파업전야>를 방송하기로 한 것. <독립영화관>은 11월 3일과 10일 ‘한국독립영화의 전설’을 특별히 기획했다.

3일에는 ‘독립영화 1세대 감독’이라 할 수 있는 이익태, 한옥희, 이정국 감독의 70~80년대 독립영화 <아침과 저녁 사이>, <색동>, <백일몽>을 연 이어 ‘상영’한다. 특히 이익태 감독의 <아침과 저녁 사이>는 ‘한국 최초의 독립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날 방송에서는 이익태, 한옥희 두 명의 감독이 직접 출연해 영화를 만들 당시의 이야기도 함께 들려줄 예정.

그리고 바로 10일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가 제작한 <파업전야>가 ‘상영’된다.

198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해 90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영된 <파업전야>는 영화를 틀고, 보는 과정 자체가 투쟁의 연속이었다. 당시 장산곶매의 대표로 <파업전야> 제작을 담당한 이용배 감독(현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이 기억하는 당시 ‘파업전야 상영 투쟁’의 과정을 통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잠시 살펴보자.(‘컬쳐뉴스’ 2004년 9월호 ‘파업전야 생생기’ 인용)

90년 4월 7일 혜화동 ‘예술극장 한마당’.

“형, 지금… 놈들이 쳐들어와서… 다 가져가… 영사기랑… (필름)릴까지…”

경찰 병력이 밀고 들어와 상영 중이던 <파업전야>에 대한 압수수색을 집행한 순간이다.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장산곶매’ 회원 한 명은 한쪽 구석에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꺼이꺼이’ 통곡하고 만다. 자리를 지킨 관객들은 어깨를 걸고 ‘철의 노동자’를 외쳐 부른다.

90년 4월 8, 9일(?) 연세대.

“내용이 파업을 선동하고 있으며, 노동쟁의 조정법상 제 3자 개입금지에 해당된다”는 당국의 엄포와 봉쇄에도 불구하고 <파업전야>를 보려는, 아니 지켜내려는 관객들의 줄은 정문에서 대강당까지 이어진다. 대학영화연합이 중심이 되어 짜였던 학생 사수대들은 입장 관객들의 학생증 등을 일일이 검사해서 입장시킨다. 강당 안 역시 우리의 전재산이기도 한 16mm 영사기와 필름이 있는 공간을 빙 둘러서 마스크 쓰고 쇠파이프 든 학생들이 지킨다. 비장감마저 흐르는 열기가 가득하다. 상영 도중에 경찰들이 학교 안으로 진입을 해 극장 안에 불이 켜진다. 상영 책임자들이 황급히 학생 사수대들의 보호를 받으며 영사기와 필름을 챙겨 연세대 뒷산으로 빠져나간다.

△90년 당시 '파업전야'가 상영되던 대학가의 안내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90년 4월 13일 전남대.

다연발 페퍼포그가 쏟아낸 최루가스 구름을 헤집고 천 여명의 전경(경찰 추산 1, 300여 명)이 쏟아져 들어온다. 순간 하늘에서는 요란한 소리의 헬기 한 대가 해산할 것을 알리며 선회한다. 직격 최루탄은 결국 사수대를 맡던 한 학생의 턱 뼈를 가격하고 만다.



이용배 감독의 기억처럼 당시 <파업전야>는 전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순회상영투쟁’을 벌였고, 상영장소가 된 대학들은 어김없이 경찰의 침탈을 당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도 <파업전야>를 본 인원이 30만명을 넘었다. 당시만 해도 30만명이란 숫자는 일반 상업영화의 경우에도 흥행에 성공했다고 평할 수 있는 수준.

이런 과정들을 거치며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은 <파업전야>를 ‘세계노동절 101주년 기념영화’로 선정했고,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과 대학생들 사이에는 <파업전야>를 보는 게 하나의 관행처럼 자리 잡게 된다.

한편, KBS에서 이미 16년 전에 <파업전야>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이번 <독립영화관>에서처럼 공중파를 타고 TV로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당시 ‘방송민주화 투쟁’을 하던 KBS 노동조합에서 <파업전야>를 상영했고 어김없이 경찰이 쳐들어갔다. 하지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파업전야>가 KBS의 전파를 타고 전국의 TV에서 방송되게 된 것이다.

△'파업전야'의 마지막 한 장면. ⓒ장산곶매

<파업전야>는 독립영화에 있어 ‘사실주의’ 기법을 도입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위장폐업 중이던 부평공단의 한 공장이 제작현장이 되었고 현장 노동자들이 직접 출연했다. 열악한 조건의 노동현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며, 특히 파업 조짐이 발각되어 구사대에 의해 주변 동료들이 끌려가는 것을 본 노동자들이 스패너를 들고 기계를 멈추고 마침내 ‘궐기’에 나섬과 동시에 안치환이 부르는 ‘철의 노동자’가 흘러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노동자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파업전야'의 마지막 한 장면. 작업도구를 든 노동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장산곶매

물론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단순한 이야기 구조가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당시 시대상황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할 것. 아울러 세월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의 노동현장이 당시와 비교해 근본적으로 얼마나 바뀌었는지도 <파업전야>를 보면서 한 번 되새겨 볼 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는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고, ‘노동조건 개선’, ‘주5일 근무’를 주장하며 투쟁하던 노동자가 경찰의 폭력 의해 사망하는가 하면, KTX 승무원들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200일 넘게 싸우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처지가 <파업전야>의 노동자들과 어떻게 다른지 영화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더욱 의미있는 영화 감상이 될 것이다
 
 
/ 박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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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7-01-15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방영하더니 독립영화관은 끝내 닫아버렸다...되살리기 청원운동도 있었는데
거참... 폐업전야였나;;;
 
 전출처 : Ritournelle > {자발적 가난과 코뮨}

자발적 가난, 코뮨의 현재를 살아가기
가난과 자본주의
2006년 10월 31일 (화) 02:28:40 채희철 kikibar@naver.com

[연세대 대학원신문 / 채희철 자유기고가]

“공통적인 것은 가난과 사랑의 창조적 관계로부터 탄생할 때에 활력을 띠며, 주체적 규정을 받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의 욕망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

‘자발적 가난’은 ‘성장을 멈추어라’는 무성장론과 함께 짝을 이루는, 경제제일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생태주의적 삶-담론이다. 경제적 무성장론이 자본제적 생산과정과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라면, 자발적 가난은 자본제적 소비과정과 그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다.

삶에 대한 불안을 먹고사는 자본

   
   
 
이 체제는 우리 경제가 보다 세계화되면 고용은 안정될 것이라거나, 불안정 노동과 저임금 그리고 고강도의 노동을 감수하지 않으면 세계화에 뒤쳐져 결국 경쟁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과 막연한 기대를 우리의 몸과 뇌에 주입하고 있다. ‘결핍’되어 있으니 그것을 보상받거나 채우라는 체제의 명령 앞에 누구랄 것도 없이 복종하게끔 한다. 욕망의 기능은 결핍을 채우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욕망을 하게끔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는 라캉의 언명은 정확하게 바로 자본체제의 무의식이다. 삶은 이 결핍(생산과 소비 모두에서)을 보상받으려는 자본제적 원환운동으로 전환되고야 만다.

비비안느 포레스테는 『경제적 공포』에서 자본주의는 경제제일주의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제적 공포를 심어놓음으로써 삶을 통제하는 체제라고 말한다. ‘성장이 있으면 고용이 있을 것’이라는 신화는 사실이 아니며(실제로 ‘고용 없는 성장’이 가능한 현실이 문제가 되고 있다), 모두가 완전고용의 시대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화를 믿는 척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 주체가 아니라 염려와 불안 그리고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람들은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험을 들며, 그래서 자본주의에 물을 대는 보험 산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한다. 불안한 영혼은 자본에 물을 댄다. 그렇기에 체제의 무의식을 폭로하고 원환의 고리를 깨뜨리는 것, 그것이 자발적 가난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처음 역사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2세기경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가난은 있었지만 그 가난은 특화되지 않는 가난이었다. 12세기의 가난은 십자군 전쟁, 도시의 성장과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 분열되어있던 왕국들의 통합과 국가의 성립, 유럽전역을 휩쓴 대량의 이주자들과 더불어 탄생했다. 이때 가난의 문제는 농민도 아니고, 상인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특정하게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존재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도시의 성문은 통치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공간적 배치였으며, 이에 따라 가난은 직접적으로 체제의 바깥영역으로 가시화되고 구획되었다. 말하자면 12세기는 중세시대에 불어 닥친 세계화였던 셈이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 공동체와 도미니코 수도회로 대표되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무소유’와 ‘공유’운동이 전개되었다. “가난은 모든 덕의 여왕이다(St. Francesco d’assisi).”

물론 오늘날의 가난은 도시 외곽이나 제3세계만의 문제가 아니며, 가난한 사람들이 통치체제의 바깥에 머물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이론 및 정치이론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주목받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통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산업예비군으로 개념화되거나 도시빈민이라는 주변적 이름을 가지며 ‘비생산적’인 존재로 규정된다. 어떻게 표현되든 그 주체성은 체제의 부덕한 잔여물(잉여인간)로 전락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부덕하고 체제를 위협하는 이들은 도둑, 거지, 부랑자, 매춘부, 건달, 광인들이었다.

피에르 파졸리니는 『폭력적인 삶』에서 전통적 노동계급이 아니라, 바로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보다 더 전복적이고 혁명적 주체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지배계급과 닮은꼴의 욕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더 벌거벗은 삶의 원초적 폭력에 노출돼 있지만, 화폐와 임금노동을 매개로 한 지배체제와의 공모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 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은 지배체제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잠재성과 가능성을 노동계급보다 더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의 단초를 더욱 밀어붙여 정치이론화한 것이 이탈리아의 자율주의일 것이다. 그들의 ‘노동거부’전략은 가난한 사람들의 주체성과 맞닿아있는 것이며 전통적(혹은 근대적) 노동계급과 주변적 주체성간의 탈구축적 연대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탈구축적 연대 그 자체가 새롭게 탄생할 탈근대적 프롤레타리아트인 것이며, 그 이름은 (네그리에 따르면)‘사회적 노동자’에서 ‘다중’으로 변화해왔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코뮤니즘적인 전투성의 미래 삶을 조명해 줄지도 모를 고대 전설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설이 있다. 그의 작업을 생각해보라. 다중의 빈곤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는 그러한 공통 조건을 채택했고, 거기에서 새로운 사회의 존재론적 힘을 발견했다.”

미래의 코뮨이 아니라, 코뮨의 현재를 살기

   
   
 
자발적 가난은 과연 대안적 삶의 전망을 열어갈 수 있는 것인가? 체제에 의한 훈육을 거부하고 모든 존재와 자연과 더불어 즐거운 삶을 제시하는 음유시인으로서의 존재는 가능한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무성장과 자발적 가난을 일종의 삶의 퇴행적 반동으로, 그리고 결핍의 집단적 게토로 삶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성장과 자발적 가난을 말하는 사람들의 어떤 편향과 관계되어 있다. 생태적이고 자율적 삶에 대한 전망들이 중농적 상상력에 갇혀 있거나, 이반 일리치처럼 자족적 생산(생계유지적 생산)과 기계시스템이나 작업도구의 제한이라는 원시적 상상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생산을 위한 생산’을 거부하고 무성장과 자발적 가난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욕망의 억제나 생산의 제한으로 받아들이는 전망을 거부하는 생각은 펠릭스 가타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가타리는 “자치라는 전망, 자신의 신체, 자신의 감각·감수성·성애의 재전유라는 전망은 어떤 종류의 정치적, 경제적, 생산적인 제한도 가져오지 않는다.”(『욕망과 혁명』)고 말한다. 무성장과 자발적 가난을 자족이나 퇴행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율적 생산, 대항생산의 다양성으로 인식해야 한다. 자발적 가난은 ‘필요’를 축소하거나 금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요의 화폐적 가치에 맞서 필요의 공유를 확대하고, 필요에 대한 경제적 독재에 맞서 욕망적 필요의 다양성을 증진하는 것이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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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인상깊게 읽은 책들 중 하나가 바로 김정한의 "대중과 폭력"이라는 책이다. 김지하의 악명높은 칼럼이 나왔던 91년 5월 투쟁을 다룬 저자의 석사논문을 정리한 것으로, 민중, 시민 등과 차별적인 의미에서 대중/대중들의 개념화는 어째서 필요한지, 그 당시 정세에서 연이은 분신으로 대표되는 폭력과 죽음이라는 상징이 어떻게 대중운동을 불러일으키고 또 소멸시킬 수 있는지, 또 이를 폭력과 대항폭력, 반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지.. 등을 다룬다. 조금만 더 얘기해주었으면 하는 내용들을 짤막한 서술로 마무리짓는 부분들이 곳곳에 있어 다소 아쉽긴 하지만(물론 책에서 제기되는 문제의식들은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하다)그 당시의 신문과 특히 자료로 거의 남지 않는 '찌라시' 등을 풍부하게 인용하는 저자의 정성. 그리고 그를 통해 오늘날 그 때의 운동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점만으로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 책은 출간된지 시간이 좀 흐른 책이라 읽은 분들도 많을 것 같아 좀 겸연쩍은데 책을 추천하는 김에 인권오름25호에 나온 '쟁점수다'를 퍼와 본다;

 

[쟁점수다]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서

정리/박래군
운동사회에서 종종 논쟁이 되는 폭력/비폭력 논쟁을 오늘의 수다 주제로 잡았다. 비폭력과 관련한 담론이 운동사회에 도입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에 대한 합의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비폭력 투쟁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현장에서 대면하는 각종 문제들로 인한 고민들까지 사회운동가들의 진솔한 속내를 들어보았다.

수다쟁이들
사회: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참가자: 아침(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장진범(사회진보연대 활동가), 권현태(서울청년단체협의회 활동가)




폭력투쟁의 기억

(박래군) 오늘은 운동의 실천과정에서 종종 맞부딪치는 문제인 폭력/비폭력 투쟁 문제에 대해 수다를 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엔 ‘투쟁’ 하면 폭력투쟁 밖에 몰랐죠. 폭력투쟁을 하지 않으면 싱거운 거 같고 투쟁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80년대에는.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권현태) 고백을 해야 하는 건가요?(웃음)
(아침) 과거부터 얘기해야 하나요? 누가 PC 통신 할 때 아이디를 ‘폭력투쟁’이라고 한 거예요. 다들 내가 하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못했는데 그런 거예요, 옛날에.(웃음)
(권현태) 1991년인가? 열사 투쟁 정국 때였지요. 그때 비폭력 평화투쟁을 중심으로 투쟁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학교 사노맹이 대자보를 붙였던 게 기억나요. 그때 “비폭력 평화집회는 민중에 대한 테러이다”라고 했어요. 지금은 정권 퇴진 투쟁을 해야 할 땐데, 싸우지 않고 그게 무슨 짓이냐고 질책하는 거지요.
(박래군) 예전에는 ‘투쟁’ 하면 화염병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안 그러면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지요. 그게 언제까지 그랬지요?
(권현태) 1997년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 ‘염병’(화염병)이 날아다니고 그랬어요. 그때까지는 ‘염병’을 쓰는 게 문제될 게 없었는데, DJ 들어서면서 최루탄을 쏘지 않았잖아요. 무최루탄 때부터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폭력성을 공격했던 거 같아요. 그럴 때 잠깐씩 우리도 자제하는 분위기였지만, 얼마 못 갔지.
(아침) 사실 그냥 추세라서 ‘염병’을 안 던졌던 건 아니지요. ‘염병’을 던져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니까. 그런 게 더 크지 않았나요?
(박래군) 합법 공간이 열리면서 그랬겠죠. 그러니까 80년대에는 불법집회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게 1989년인가 경실련에서 처음으로 집회신고를 했어요. 합법적인 집회신고를 절차에 따라서 처음으로 한 거예요. 불법시위라고 해도 다 폭력시위는 아니죠. 6월 항쟁이 불법시위라고 해서 폭력시위라고 하지는 않죠. 요즘은 전경들이 가하는 폭력 때문에, 비폭력시위를 하자고 하는 말이 안 먹힐 때가 있어요, 시위를 하는 사람들한테. 지난 5월 4일 평택에서 비폭력투쟁을 하던 중인데 워낙 경찰들이 강경하게 나오면서 초반부터 유혈이 낭자하니까 시위대들이 뭔가를 찾더라고, 그래서 죽봉이 나왔지요.
(아침) 저는 나중에 사람들이 죽봉을 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화가 나는 거예요. 어디 가서 집회 나갔다가 다쳤다고 하면, ‘그러게 왜 죽봉을 들었냐’는 거예요. 어이가 없었지요. 또 하나는 비폭력이라는 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잖아요. 폭력도 어떤 힘을 사용하는 거라면, 비폭력도 힘을 행사하는 건데, 서로 다치지 않고 인간성을 존중하는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너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때 다쳐서 병원에 갔는데, 우리는 그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예상은 하면서도 거기에 대한 대비는 안 하죠. 그러니까 나중에 나오는 소리가 ‘역시 우리가 뭐라도 들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거죠.

서로 일치하지 않는 폭력/ 비폭력 투쟁의 개념

사진설명장진범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장진범) 근데, 경계선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어떤 때 폭력이고, 어떤 때 비폭력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오늘 자리에서는 주로 비폭력 담론에 관한 진보세력들의 견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사실 비폭력을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삼는 것은 법이나 국가잖아요. 그들에 따르면 자신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비폭력이라는 이상이 ‘범죄적인 위험계급’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예방폭력’ 차원이라는 겁니다. 요컨대 ‘비폭력’이라는 담론은, 모종의 폭력 및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앞에서 사태의 원인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보다 적확한 해법을 도출하기보다는, 폭력의 표출 자체를 미봉하고 결국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비폭력의 긍정성을 주장하려면, 이런 식의 비폭력과 어떤 점에서 차별성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동반되지 않은 채, ‘그러면 너희는 폭력이 좋다는 거냐, 대항폭력의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는 거냐’는 식으로 논의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권현태) 사실 넌센스인데, 이라크가 침공당할 때 거의 무장해제된 상태잖아요. 미국과 이라크는 서로 폭력을 주고받았다고 하는 게, 제가 보기에 미국과 이라크가 서로 전쟁을 한다는 거 자체가 우습죠. 이스라엘이랑 팔레스타인이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팔레스탄인인들은 거기서 데모하고 있는데, 생존권적 차원에서 싸우고 있는 거고, 먼저 인간의 권리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진행하고 있는 거죠. 그걸 가지고 폭력이라고 부르면 이거는 말이 안 되는 거죠. 이스라엘은 엄청나게 군사적 대량공세를 퍼붓잖아요. 팔레스타인은 비행기 하나 없는 나란데. 이걸 폭력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저는 평택, 5월 4일이든 그 다음이든, 이런 과정에서 공권력에 대항하는 걸 폭력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넌센스로 보여요. 그건 저항권의 문제이지요. 저항권의 문제를 가지고 폭력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정의라는 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안중근도 그런 거잖아요.
(박래군) 일상 시기와 그렇지 않을 때는 구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침) 운동사회에서 폭력투쟁을 자제한 게 합법집회가 가능해지고, 최루탄을 안 쏘고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런 걸 주장하는 이면에는 운동사회 내부의 성찰이라는 게 존재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런 게 받아들여졌던 건,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염병’도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런 길 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때는 보이는 게 너무 좁았어요. 그때는 그거 만들고 날라주고, 박수 쳐주고, 그리고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싸웠다. 그런데 그때 싸우는 건 누구인지. 예를 들어 여성이고 혹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싸움에 낄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이겼다고 하는 게 끽 해야 한 차선 점거 해봤다 정도죠. 우리끼리는 투쟁을 했지만, 우리 주장이 사람들한테 알려졌거나 아니면 걔네들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줬나, 그런 거는 하나 없다는 거죠. 저는 학교 다닐 때는 그런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걸 썼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평택이든 어디든, 다른 방법을 통해서 충분히 하고 있잖아요. 얘기 방향을 바꾸어서 폭력을 쓸까, 비폭력을 쓸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이 더 많이 같이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차원으로 접근을 하는 게 좀 더 쉽지 않을까요?

비합법시위와 폭력시위

사진설명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박래군) 비합법적인 시위를 일반적으로 폭력이라고 부르나요?
(권현태) 불법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폭력이라고 하지는 않죠.
(장진범) 누가 합법/불법을 규정하느냐가 문제인데. 국가가 합법을 규정하기 때문에 국가는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그거는 말 그대로 ‘잠재적인 폭력’이라고 주장하죠. 그렇게 규정한다고 생각해요.
(박래군) 비합법 시위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게 꼭 등치되는 건 아니잖냐는 거죠.
(아침) 비폭력 교재에서 나오는 시위는 거의 비합법이죠. 혹은 합법의 테두리를 넘나들면서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아요.
(박래군) 난 비합법 시위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장진범) 간디가 당시에 했던 것도 사실은 ‘저 사람들’이 보기에는 폭력적일 수 있는 거잖아요. 왜냐하면 파업을 하는 거고, 뭔가를 중단을 시키는 거였으니까요. 그것을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여튼 정상적인 활동을 중단을 시키는 거니까.
(박래군) 그렇게 비폭력적인 방법을 쓸 때는 정당성이 높아지는 거 아닐까요? 우리가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공격을 했다고 하는 것과 우리 몸을 던져서 비무장으로 했는데도 폭력적으로 진압 당했다고 하면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설득력이나 정당성에서 차원이 다르지 않나요?
(장진범) 저는 그 정당성이라는 게 폭력적인 수단을 썼다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폭력적인 수단을 썼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볼 때 그러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공감을 해주면 되는 거잖아요. 그건 폭력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그것 자체가 정당성이 있느냐의 문제이고, 폭력을 쓸 때는 정당성을 해치는 수준까지 폭력이 나아가느냐 안 나가느냐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하고 조절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죠. 폭력적인 수단을 썼다/안 썼다는 이분법적인 걸 가지고 판단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권현태) 전적으로 동의해요. 저도 경찰에게 맞다가 병원에 실려 간 게 한 두 번이 아닌데……. 우리가 경찰에게 맞을 때에는 거의 ‘작살나게’ 맞잖아요? 거의 죽을 정도로 맞을 수도 있고……. 그 때는 워낙 쇠파이프를 들고 싸우고 이럴 때니까 그렇지만. 그런데 사실 폭력을 쓸 때는 불의의 사고도 일어나게 되거든요. 몇 만 명이 움직이는 싸움일 때, 오천 명이 ‘빠이(쇠파이프)’ 들고 나가는데, 싸우다가 잘못 맞으면 죽는 거죠. 폭력이라는 게 불의의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전제해야 하는 건 아닌가요?
(박래군) 예를 들면 이전에 화염병이 잘못 날아가서 상가를 태울 때 이때는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변명할 거리가 없는 거고. 그때 참 곤란하지 않았어요? 쇠파이프로 한다고 하더라도 누굴 죽이려고 공격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막상 맞아서 죽을 수도 있단 말이죠. 이런 경우들이 생길 수도 있고, 이럴 때 어려운 경우를 당하잖아요. 이데올로기 공세가 막 들어오고, 비난은 우리가 다 받고 했잖아요. 그런데 영국의 트라이던트 핵잠수함 보습 만들기 투쟁에서 평화 활동가들이 핵잠수함 기지에 들어가서 핵잠수함을 다 부수고 했죠. 그런데 좁은 개념으로 폭력을 얘기하면 그것도 폭력이라고요. 더구나 망치까지 준비를 해서 핵잠수함 기지를 들어가는데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폭력을 썼다고 하지 않죠. 그런데 우리 같은 경우는 이럴 거야, 아마도. 우리가 미군기지를 뚫고 들어가서 뭔가를 파괴했다고 칩시다. 군사시설이라든지 아니면 군사장비를 파괴하면 우리 사회는 뭐라고 할까. 당장 “폭력배”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권현태) 그건 “테러”에요.(웃음)

비폭력은 수단인가? 신념인가?

(박래군) 폭력이나 비폭력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건가요?
(아침) 저에게 이전에는 ‘비폭력’이라는 게 수단이고 방법이었는데, 지금은 가치이자 신념이예요.
(권현태) 아,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게?
사진설명아침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아침)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행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거(웃음). 왜냐면 너무나 폭력적인 사회에서 물든 걸 어떻게 해. 항상 고민인 거지. 그런데 진짜 폭력을 썼을 때 그런 문제가 생기고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고, 힘들잖아요. 저 사람 때려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처럼 날뛰던 사람들이 10만 명이나 모이곤 했잖아요? 그 사람들 다 어디 갔는지 모르잖아요. 그런 게 그냥 단순히 분노라든지, 적개심과 같은 감정의 표출이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요. 제가 비폭력을 신념으로 삼는 이유 중에는 단순히 분노나 적개심 때문이 아니라 예를 들면 평택에 미군기지를 만든다고 하면 여기가 평화롭게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여기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싸우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비폭력투쟁을 제가 처음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중 하나가, 비폭력투쟁이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같이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심지어 그런 거죠. 우리가 싸워야 돼. 쟤네들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그런 생각이었던 거죠. 그런 예를 들면, 평택에서 포클레인 기사가 그냥 돌아간다든지, 아니면 용역들이 와서 이런 줄 모르고 왔다, 미안하다 얘기하는 걸 직접 경험한 적 있어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 그게 어떻게 보면 비폭력의 힘인 거 같아요.
(권현태) 비폭력적으로 하면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 그런 건가요? 제 생각에는 명령을 안 내렸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거죠. 폭력적으로 밟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죠. 저도 전경들과 함께 담배를 많이 피워 봤어요. 지휘부에서 정세 판단하면서 용역들에게 적당히 밟아라 하면 밟는 거죠. 말씀 하신대로 그럴 수는 있는데, 쟤네들이 용역 계약에 묶여 있어서 못하는 거구.
(아침) 그런 것도 있고……. 아까 말씀 드린 것 중에 예전에 폭력시위 때 흔히 얘기되는 무기, 화염병, 쇠파이프, 돌, 그런 걸 한다고 했을 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 한정적이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함께 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어주는 게 필요하고, 그게 비폭력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장진범) 폭력에 관해 말할 때 흔히 나오는 ‘적과 싸우다가 적을 닮아 버렸다’는 말처럼, 폭력에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나치의 극단적 폭력에 시달렸던 유태인들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이 같은 폭력의 비극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폭력에 관한 집단적 반성과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느냐 여부에 따라 폭력에 관한 담론들을 평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대항폭력’이라는 담론은 상대편의 폭력을 근거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본 논리를 갖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같은 정당화 때문에 자신들의 폭력의 위험성에 대한 반성과 대응이 억압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모든 저항에는 모종의 폭력적 측면이 동반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을 대항폭력이라는 ‘담론’에 따라 인식하고 대처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비폭력’이라는 담론은 대안일 수 있는가.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앞서 지적했듯, 비폭력이라는 담론은 폭력을 사고와 정치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사고나 정치와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 바깥으로 배제하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점에서 대항폭력이나 비폭력이 아닌 ‘반폭력’이라고 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폭력을 당연시하거나 혹은 ‘비인간적/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항상 동반되는 고유한 의제로 인식하고 대처하려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운동과 비폭력투쟁 관계

(박래군) 비폭력 투쟁의 방식은 알겠는데요. 비폭력투쟁의 준비는 어떤 게 있나요?
(아침) 비폭력직접행동을 준비할 때는 매우 긴 시간 동안 준비를 해요. 토론만도 몇 개월이 걸리면서 이 투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논의하고요. 상당히 여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죠. 각 그룹들이 있으면 얘기를 해서 그룹에서 얘기가 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비폭력 직접행동을 하는데 그전에 또 훈련을 몇 개월씩 해요. 열 사람이 뭘 하기로 했는데, 한 명이 같이 하는 것이 곤란하다면, 이 사람은 거기서 빠지고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치를 하고, 다른 식으로 끊임없이 토론하고. 행동을 직접 하겠다고 하면 모두가 다 깊이 논의하고, 명확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각각의 경우에 대비해서 아주 치밀하게 준비를 하는 거죠.
(박래군) 시애틀 세계화 반대 시위 할 때 사람들이 되게 준비를 많이 하더라고요. 치밀하게 훈련도 같이 하고.
사진설명권현태 서울청년단체협의회 활동가
(권현태) 폭력/비폭력이라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가 비폭력 집회라고 규정을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잖아요. ‘효순이, 미선이 집회’ 때 우리가 비폭력집회를 주장했다가 처음에는 많이 맞았잖아요. 그런데도 저들은 폭력집회라고 한단 말예요. 폭력/비폭력은 법과 제도를 장악하고 있는 힘을 가진 저들이 규정하는 것이지, 우리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죠. 이것은 법과 제도가 보장하는 규정성이라고 봐요. 어차피 한국 사회에서 살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구조적, 제도적 장치를 날려버리지 않는 한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폭력에 길들어 있다는 것 자체는 운동사회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대중들 속에서 폭력은 적당한 선에서 제어가 된다고 봐요.
(아침) 그러니까 첫 번째 얘기한 것 있잖아요. 구조적 폭력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새롭고, 재미나고, 다른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힘도 나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죠. 사실 비폭력 역사에서는 한번 썼던 것을 또 써 먹는 것이 아니라 투쟁에 필요한 것을 새롭게 만드는 거거든요. 촛불집회라는 것도 일반사람들의 분노를, 일반사람들이 희망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어떤 수단 중에 가능한 것을 찾은 것이었던 거고, 삼보일배도 처음엔 좋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별로고…외국에서나 각광을 받는다고요. 그리고 비폭력투쟁을 통해서 명망가들 중심에서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방향을 틀었잖아요. 그런 것에서도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장진범) 그런데 비폭력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사실과 다를 수 있어요. 시위를 할 때 사수대를 꾸려서 보내면 많은 사람들이 더 안전하게 함께 할 수 있잖아요. 저는 비폭력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은 훨씬 훈련도 많이 되어야 되고, 결의수준도 높아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비폭력이라는 걸 강조하게 되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게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삼보일배나 단식 같은 거, 농성…비폭력이라고 얘기하면 선도투쟁 중심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훈련된 활동가들만 할 수 있는 방식. 저는 이건 평가를 한번 해봐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거죠. 간디 같은 경우에도 끊임없이 강조한 게 비폭력이라는 게 비겁한 게 아니고, 만약에 비겁함과 폭력이라는 두 경우밖에 없다면 폭력을 선택하겠다고 말했죠. 왜냐면 자기가 생각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비겁함이고, 스스로가 도덕적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점점 더 기존 상황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상실하는 걸 제일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훈련도 필요하고, 준비도 필요하고, 사고도 필요하고.

대중운동을 세우는 일이 더 중요?

(아침) 만약에 폭력이라는 게 들어가게 되면, 예를 들면 평택투쟁에서 폭력을 쓸 수 있는 인원을 준비할 수 있고, 그것을 동원할 수 있는 단체가 그 투쟁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고, 그 쪽에서 제안한 일정과 계획대로만 갈 수 있다는 거죠. 만약에 비폭력으로 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느냐. 거기에 들어가서 계속 농사를 짓는 등의 일상을 이어가는 거, 그것을 우리가 높이 사는 거죠. 비폭력적으로 만들고 싶은 것을 하면서 거기에 초점을 두고 하면서 알려나가는 거, 그런 게 더 맞다고 생각을 해요.
(장진범) 그런데 역도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비폭력 투쟁을 했을 때도, 예를 들어 내가 조직에 있는데, 우리 회원들이 대부분 직장인들이면 기존의 합법 공간을 넘는 경계를 넘는 비합법 투쟁을 하고 그래서 연행이 되고, 구속이 되는 상황이면 그럴 수 있는 활동가들을 많이 갖고 있는 조직이 주도권을 잡는 거죠. 오히려 대중조직들이 여기서는 소외될 수 있죠. 대중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도, 비폭력만이 아니라 비폭력 플러스 합법 활동일 경우에 대중들이 잘 참여할 수 있지, 비폭력인데 반합법투쟁처럼 법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이미 그 순간부터 대중의 참여는 쉽지가 않아요.
(권현태) 폭력투쟁이냐 비폭력투쟁이냐는 건 투쟁 주체들이 선택하는 거죠. 자기조건과 신념과 고민에 맞게 활동하면 된다고 보고요. 이게 서로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봐요. 여기서 일반적으로 폭력을 주장하는 건 아니죠. 폭력투쟁이나 비폭력투쟁이 서로 따로 분리되어 있거나 떨어진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광주와 같이 시대가 원하고 상황이 원해서 피를 원한다면 피를 흘리고 싸워야죠. 지금 오히려 고민해야 할 지점은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런 문제들이 계속 쟁점화되어서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운동의 대중화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거든요. 운동이 대중들과 거리가 있게 만들어지고, 새로운 방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긴 하지만, 대중을 가진 단체들이 힘있게 일체성을 담보하고 자기 단체를 유지한다거나 이런 게 많이 침체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요.
(박래군) 바꿔 말하면 폭력투쟁, 비폭력투쟁 이런 말이 자꾸 나오는 것은 대중운동이 약해져서다 이런 말이네요.
(권현태) 그런데 비폭력투쟁을 수단과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로 보게 되면 폭력투쟁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는 거죠. 저는 폭력투쟁이라도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실천하는 경우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목을 죄는 기본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실은 정의라고 볼 수 있다는 거죠.
(아침) 그런데 그것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앞으로 다른 방식을 고민해 보자는 거 아닌가요?
(권현태) 그렇기 때문에 비폭력투쟁과 폭력투쟁이 대립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폭력투쟁과 비폭력투쟁은 자기 처지와 조건에 맞게 전개하면 되는, 전술적인 문제지 결코 전략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거죠. 대중을 어떻게 전취하고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문제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일상적 폭력이 증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FTA 체결되어 봐요. 일상적인 폭력은 극단적 폭력을 부릅니다. 이 폭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대항권리들이 더 중요하죠. 중요한 것은 대중운동을 어떻게 다시 세우느냐에 있다는 겁니다.
(박래군) 오랜 시간 같이 수다를 떨어봤는데, 의견들이 좁혀지지 않네요. 오늘 수다가 무엇을 합의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폭력/비폭력 문제를 갖고 이렇게 대중운동과 관련해서 어느 정도 각자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운동사회에서 폭력, 비폭력 투쟁과 관련해서 더 깊은 논의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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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페드로 알모도바르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롤라 두에냐스, 블랑카 포르티요, 요아나 코보, 츄스 람프레아베
120분
스페인어
2006-09-21
http://cafe.naver.com/spongehouse.cafe

 

 

 

 

[시놉시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 잃어버린 어머니가 찾아왔다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라이문다는 한없이 거칠고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녀는 기둥서방과 다름없는 남편과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둔 실질적 가장으로 모든 현실이 짐스럽기만 하지만, 뭐든지 해내는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녀의 딸 파울라가 성추행 하려는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날 밤, 라이문다의 동생 쏠레에게도 비밀스런 사건이 시작된다. 열정적이고 거친 라이문다와는 다소 다른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의 쏠레는 고향인 라 만차에 다녀오는 길에 엄마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 쏠레는 불법 미용실을 운영하며, 미용실 손님과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홀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라이문다에게 숨긴 채, 미용실 손님들에게 엄마를 러시아 노숙자라고 소개한다. 엄마는 미용실 손님들과 차츰 어울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쏠레의 현실에 적응해가지만, 정작 가장 만나고 싶었던 라이문다에게는 나타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데..
[Character] <귀향>속 다섯 명의 ‘그녀’들…
라이문다 _ 거칠고 억척스런 겉모습, 하지만 마음속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여인’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 억척 엄마 라이문다. 요리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소리도 잘 지른다. 아직 한참이나 뒷바라지 해야 하는 사춘기 딸 파울라와 게으르고 무책임한 ‘인간쓰레기’같은 남편을 부양한다. 버럭버럭 화도 잘 내고 억새 보이지만, 딸 파울라를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드는 강인한 모성애를 가진 여자. 마음 한 켠엔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동시에 묻고 산다.

이렌느 _ 귀엽고 사랑스런 ‘우리 모두의 엄마’
유령의 모습으로 돌아온 엄마. 사랑스럽고 다정한 그녀와 대화 하다 보면, 어느새 그녀가 유령이기 때문에 가졌던 두려움 따윈 잊게 된다. 딸들의 밑반찬을 몰래 챙겨주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는 그녀의 행동은 항상 옆에 있어왔던 것처럼 너무나 익숙해서 더 아련하게 느껴진다. 라이문다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가슴 아프게 살아왔던 엄마. 이제 라이문다에게 용서를 빌고 그 동안 말 할 수 없었던 비밀을 털어 놓으려 하는데….

쏠레 _ 수다스럽고 엉뚱하며 ‘정 많~은 그녀’
라이문다의 동생. 동네 ‘야매 미용실’을 운영하며 혼자 살고 있다. 비록 야매 미용실이지만 일에 있어선 프로페셔널. 미용보조로 일하게 된 엄마에게 타올 쓰는 법부터 샤워기 두는 위치까지 챙겨주는 세심함을 보인다. 걸핏하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억척스런 라이문다와는 달리 감수성이 풍부하고 동정심이 강하다. 그녀는 엄마가 돌아와 요즘 너무나 행복하다. 단지 라이문다가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할까 조바심이 날 뿐….

아구스티나 _ 라 만차의 ‘비밀을 간직한 그녀’
라이문다와 쏠레가 자라난 동네 라 만차에서 평생을 사는 ‘진정한 라 만차인’.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라이문다의 고모 파울라를 가족처럼 돌보았다. 오래 전 동네에 큰 불이 나던 날, 어머니를 잃었으며, 그 불로 인해 라이문다 부모님 역시 돌아가셨다. 동네에 떠도는 라이문다의 엄마유령에 관한 소문을 쏠레에게 맨 먼저 전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엄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간절히 듣고 싶어한다.

파울라 _ 저도 이제 어른이거든요?! 누구보다 ‘속 깊은 딸내미’
라이문다의 어린 딸 파울라. 늘 전화기를 끼고 살아 엄마한테 꾸중을 듣는다. 멋모르고 철없어 보이지만 눈치 빠르고 속도 깊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할뻔한 위기의 순간에서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일을 저지른 그녀지만 파울라 역시 라이문다처럼 씩씩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엄마와 할머니와 이모를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PEDRO ALMODÓVAR
1951년 9월 25일생. 라 만차의 중심부인 시우다드레알지방의 칼자다 드 칼라트라바에서 태어났으며, 여덟 살에 가족들과 함께 에르뜨레마두라로 이주, 그곳에서 살레시안 신부들과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가르치는 학교를 다녔다. 16살에 영화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무일푼으로 마드리드로 온다. 그러나 프랑코 정권 하에 영화 학교는 폐쇄되었고, 때문에 학교에서 형식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대신 내용을 채워넣기로 했다. 그 내용이란 곧 ‘삶’ 자체였다. 당시 나라를 옭아매던 독재에도 불구, 시골 출신의 이 청년에게 있어 마드리드란 문화와 독립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여러 가지 잡일을 하다가 스페인 전화국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게 되자 수퍼 8미리 카메라를 샀다. 그 후 전화국에서 사무 보조로 12년 동안 일을 했고 그 12년 동안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를 완성시켜줄 다양한 활동에 매진했다. 아침에는 전화국에서 스페인 중산층의 소문과 스캔들 등 미래의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금광과도 같은 소중한 지식을 얻었고 저녁이면 글을 쓰고 연애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신화가 된 독립 단체인 Los Goliardos와 함께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또 자신의 수퍼 8미리 비디오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었고, 단편을 기고하는 등 다양한 소규모 잡지들과 협력하기도 했으며 그 단편들 중 일부는 출판이 되기도 했다. 한편 그는 ‘Almódovar and McNamara’ 라는 풍자적인 펑크 락 그룹의 멤버이기도 했다.

1980년에 일년 반 동안 16미리로 힘들게 작업한 <산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많은 여자들>(80)이라는 영화를 개봉했고, 이 첫 번째 상업영화는 성공적이었으며 우연히도 스페인의 민주주의와 그 시작을 함께 했다. 배우와 스탭들의 협조로 만들어진 전위 영화였던 이 영화에서 카르멘 마우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영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1986년, 동생 아구스틴과 함께 그는 El Deseo S.A 라는 제작사를 차렸고 그들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욕망의 법칙>(86)이었다.

1988년 그는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87)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영화들은 전 세계에 개봉되었다. 1999년에는 그에게 다시 한번 화려한 명성을 안겨준 작품 <내 어머니의 모든 것>(99)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과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세자르, 유러피안 필름 어워드, 다비드 디 도나텔로, BAFTA, 고야 어워드를 휩쓸며 45개상 수상을 기록했다. 3년 뒤, <그녀에게>(01)로 돌아온 그에게 또다시 아카데미 각본상, 유러피안 필름 어워드에서 5관왕, BAFTA에서 2관왕, 세자르 영화제를 비롯 유수의 영화제에서 열띤 찬사와 수상의 영광이 이어졌다. 2004년에는 <나쁜 교육>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하였다.



필모그래피
<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많은 여자들>(80) <열정의 미로>(82)
<어둠 속에서>(83) <내가 뭘 잘못 했길래>(84) <욕망의 법칙>, <마타도르>(86)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87) *토론토 영화제 관객상, 베니스 영화제 각본상 수상
<나를 묶어줘>(89) <하이힐>(91)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
<키카>(93) <내 비밀의 꽃>(95) <라이브 플래시>(97)
<내 어머니의 모든 것>(99) *칸 영화제 감독상,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 <그녀에게>(01)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
<나쁜 교육>(04) *칸 영화제 개막작 <귀향>(06)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각본상 수상




[Introduction]
가슴을 울리는 위대한 모성!!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바치는 헌사


욕망에 희생된 어긋난 사랑, 지독하고도 강렬한 옴므파탈 느와르였던 <나쁜 교육>에 이어 코믹하고 아기자기하면서도 섬세하고 감동적인 여성의 이야기로, 어머니의 이야기로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돌아왔다. 거칠고 질퍽한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죽은 엄마의 유령이 찾아온다는 판타지적 요소가 매력적으로 살아나는 아름다운 영화 <귀향>은 알모도바르 감독과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와의 재회만으로도 많은 화제를 모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억척스런 엄마 역의 페넬로페 크루즈의 생생한 연기는 이제 명실공히 그녀를 스페인 최고의 여배우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칸 영화제에서 평단의 극찬과 가장 높은 데일리 점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되었던 <귀향>은 여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프랑스에서 200만 명 이상의 관객동원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강인한 생명력, 그들끼리의 따뜻한 우정과 연대감, 무엇보다 자식으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받고 자식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심지어 유령이 되어서까지 딸에게 나타나는 어머니의 감동적인 사랑이 알모도바르의 기상천외한 유머와 판타지 속에 녹아 들어 이 가을,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준비를 하고 있다.


열정과 관능, 유머와 감동이 넘치는 알모도바르식 팜므 판타지
<귀향>의 대본을 읽으면서 소설 <페드로 파라모 (Pedro Páramo)>가 떠올랐습니다. 룰포(Rulfo)의 소설과 페드로의 대본은 죽은 자와 산 자, 현실과 비현실, 환상과 일상, 경험과 경험하지 못한 것, 잠듦과 깨어있음의 공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다는 점 외에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요. 룰포의 소설과 <귀향>의 대본을 읽을 때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물론 깨어있지만 그 두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꿈에 사로 잡힙니다. 룰포의 소설은 굉장히 ‘멕시코’적이고 페드로의 각본은 매우 ‘만차’스럽다는 것도 독특한 공통점이랄 수 있겠죠.
-후안 호세 미야스 (Juan José Millás)

<귀향>은 알모도바르 감독의 장기를 살린 드라마틱한 코미디다. 이야기는 거칠고 절망적일정도로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결코 관습적이지 않다. 가장 지독한 현실의 이면에 초현실적인 마법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알모도바르 감독이 만들어낸 이 아름다운 판타지는 절망의 끝에서 딸을 찾아온 어머니의 유령이라는 소재로 더욱 치밀하고 완벽하게 관객을 사로잡는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장르의 교합을 즐기는 감독으로 이 영화 역시 교묘한 마술과 생생한 현실의 지속적인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누구도 알모도바르 감독이 쳐놓은 그 교묘함을 절대 간파할 수 없을 것. 그는 줄타기 곡예사와 같이 생사를 넘나들고 내러티브적인 요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요소를 자연스럽게 융합함으로써 환상적이고 뛰어난 각본이라는 찬사와 함께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유령이 찾아온다는 판타지적인 요소는 코믹함을 부각시키는 데도 일조한다. 쏠레가 라이문다 몰래 엄마의 유령을 숨기고, 미용실 고객들과 유령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리는 장면은 스릴까지 선사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또한 남편의 죽음, 그것도 딸에 의한 살인이라는 지독히 절망적이고 끔찍한 사건 다음에 보여지는 시체를 처리하려 고군 분투 하는 라이문다의 모습 또한 코믹한 상황을 연출한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의 유령이 왜 라이문다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며, 딸의 미래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엄마의 무섭고도 강인한 모습은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웃음은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판타지는 단지 판타지만이 아니다. 코미디와 여성, 열정과 감동이라는 알모도바르의 모든 장기가 어우러진 <귀향>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장르를 혼합 한다는 것은 나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건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다. 장르 사이를 오가거나, 바로 이야기의 톤을 바꿀 때 해야 할 일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그럴싸하게 연출해 자연스러운 스타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묘한 작업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배우들이다. 이 영화에선 특히 여배우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어머니에게서 딸로, 다시 딸에게로 전해지는 여자들만의 비밀 이야기

“<귀향>은 가족에 관한 영화이고 나의 가족과 함께 한 영화이다. 나의 가족은 쏠레와 라이문다처럼 성공을 위해 촌에서 도시로 왔다. 내 여동생은 다행히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어머니의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 집에서 나와 도시인이 되었다. 라 만차의 관습과 문화로 돌아 갔을 때 그러한 경험이 나의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귀향>의 가족은 여성들로 이루어졌다. 돌아온 할머니는 바로 카르멘 마우라였고 그녀의 두 딸은 바로 롤라 두에냐스와 페넬로페 크루즈였다. 요아나 코보는 손녀였고 츄스 람프레아베는 아직 마을에 남아있던 파울라 숙모였다. 그리고 이웃인 아구스티나가 있다. 그녀는 라이문다 가족의 수많은 비밀을 알고 있고, 고향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라 만차에 남아 라이문다 대신 파울라 숙모를 돌보았다. 일어나자마자 파울라 숙모가 대답할 때까지 집 창가를 두드리며 매일 빵을 가지고 왔으며, 숙모가 죽은 걸 발견하고 마드리드에 있는 쏠레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또한 유령에게 문을 열어 줘 조카가 도착하기 전에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아구스티나는 라이문다 가족의 일원이나 다름 없다.

드러나지도 돋보이지도 않는 캐릭터일수도 있지만, 사실 아구스티나는 여성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다. 그건 바로 이웃 여성들간의 연대이다. 마을의 여자들은 문젯거리를 함께 공유하고 고통을 좀 더 잘 견디기 위해 함께 해결해 나간다. 물론 그 반대의 일도 일어난다. 이웃에 대한 증오는 결정적 사건이 터질 때까지 몇 세대를 내려오며 풀리지 않는다. 감독은 어린 시절 경험한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있었던 긍정적인 사건들만을 기억했다고 한다. <귀향>은 홀로 살거나 홀로 된 여인들과 함께 하며 도움을 주는 이웃들,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 감독의 어머니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웃들은 아구스티나의 캐릭터에 영감이 되었다. <귀향>에서 보여지는 여성들끼리의 강인한 연대감, 그것은 모성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족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여성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그 무엇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힘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어떤 힘겨운 상황에서도 우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존재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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