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과 싸우며 보던 '파업전야', KBS에서 '상영'

 
 
한국 독립영화의 전설과도 같은 영화, 한국 최초의 노동영화,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팔뚝질 좀 해봤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조각의 기억 정도는 가지고 있는 영화 <파업전야>가 마침내 지상파 방송에서 상영된다.

△90년 당시 '파업전야' 상영안내 포스터. '사랑, 분노, 희망과 단결' ⓒ출처불명

KBS1TV의 독립영화 소개 프로그램인 < KBS 독립영화관>이 11월 10일 자정을 넘긴 새벽 1시 <파업전야>를 방송하기로 한 것. <독립영화관>은 11월 3일과 10일 ‘한국독립영화의 전설’을 특별히 기획했다.

3일에는 ‘독립영화 1세대 감독’이라 할 수 있는 이익태, 한옥희, 이정국 감독의 70~80년대 독립영화 <아침과 저녁 사이>, <색동>, <백일몽>을 연 이어 ‘상영’한다. 특히 이익태 감독의 <아침과 저녁 사이>는 ‘한국 최초의 독립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날 방송에서는 이익태, 한옥희 두 명의 감독이 직접 출연해 영화를 만들 당시의 이야기도 함께 들려줄 예정.

그리고 바로 10일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가 제작한 <파업전야>가 ‘상영’된다.

198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해 90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영된 <파업전야>는 영화를 틀고, 보는 과정 자체가 투쟁의 연속이었다. 당시 장산곶매의 대표로 <파업전야> 제작을 담당한 이용배 감독(현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이 기억하는 당시 ‘파업전야 상영 투쟁’의 과정을 통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잠시 살펴보자.(‘컬쳐뉴스’ 2004년 9월호 ‘파업전야 생생기’ 인용)

90년 4월 7일 혜화동 ‘예술극장 한마당’.

“형, 지금… 놈들이 쳐들어와서… 다 가져가… 영사기랑… (필름)릴까지…”

경찰 병력이 밀고 들어와 상영 중이던 <파업전야>에 대한 압수수색을 집행한 순간이다.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장산곶매’ 회원 한 명은 한쪽 구석에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꺼이꺼이’ 통곡하고 만다. 자리를 지킨 관객들은 어깨를 걸고 ‘철의 노동자’를 외쳐 부른다.

90년 4월 8, 9일(?) 연세대.

“내용이 파업을 선동하고 있으며, 노동쟁의 조정법상 제 3자 개입금지에 해당된다”는 당국의 엄포와 봉쇄에도 불구하고 <파업전야>를 보려는, 아니 지켜내려는 관객들의 줄은 정문에서 대강당까지 이어진다. 대학영화연합이 중심이 되어 짜였던 학생 사수대들은 입장 관객들의 학생증 등을 일일이 검사해서 입장시킨다. 강당 안 역시 우리의 전재산이기도 한 16mm 영사기와 필름이 있는 공간을 빙 둘러서 마스크 쓰고 쇠파이프 든 학생들이 지킨다. 비장감마저 흐르는 열기가 가득하다. 상영 도중에 경찰들이 학교 안으로 진입을 해 극장 안에 불이 켜진다. 상영 책임자들이 황급히 학생 사수대들의 보호를 받으며 영사기와 필름을 챙겨 연세대 뒷산으로 빠져나간다.

△90년 당시 '파업전야'가 상영되던 대학가의 안내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90년 4월 13일 전남대.

다연발 페퍼포그가 쏟아낸 최루가스 구름을 헤집고 천 여명의 전경(경찰 추산 1, 300여 명)이 쏟아져 들어온다. 순간 하늘에서는 요란한 소리의 헬기 한 대가 해산할 것을 알리며 선회한다. 직격 최루탄은 결국 사수대를 맡던 한 학생의 턱 뼈를 가격하고 만다.



이용배 감독의 기억처럼 당시 <파업전야>는 전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순회상영투쟁’을 벌였고, 상영장소가 된 대학들은 어김없이 경찰의 침탈을 당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도 <파업전야>를 본 인원이 30만명을 넘었다. 당시만 해도 30만명이란 숫자는 일반 상업영화의 경우에도 흥행에 성공했다고 평할 수 있는 수준.

이런 과정들을 거치며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은 <파업전야>를 ‘세계노동절 101주년 기념영화’로 선정했고,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과 대학생들 사이에는 <파업전야>를 보는 게 하나의 관행처럼 자리 잡게 된다.

한편, KBS에서 이미 16년 전에 <파업전야>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이번 <독립영화관>에서처럼 공중파를 타고 TV로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당시 ‘방송민주화 투쟁’을 하던 KBS 노동조합에서 <파업전야>를 상영했고 어김없이 경찰이 쳐들어갔다. 하지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파업전야>가 KBS의 전파를 타고 전국의 TV에서 방송되게 된 것이다.

△'파업전야'의 마지막 한 장면. ⓒ장산곶매

<파업전야>는 독립영화에 있어 ‘사실주의’ 기법을 도입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위장폐업 중이던 부평공단의 한 공장이 제작현장이 되었고 현장 노동자들이 직접 출연했다. 열악한 조건의 노동현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며, 특히 파업 조짐이 발각되어 구사대에 의해 주변 동료들이 끌려가는 것을 본 노동자들이 스패너를 들고 기계를 멈추고 마침내 ‘궐기’에 나섬과 동시에 안치환이 부르는 ‘철의 노동자’가 흘러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노동자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파업전야'의 마지막 한 장면. 작업도구를 든 노동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장산곶매

물론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단순한 이야기 구조가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당시 시대상황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할 것. 아울러 세월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의 노동현장이 당시와 비교해 근본적으로 얼마나 바뀌었는지도 <파업전야>를 보면서 한 번 되새겨 볼 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는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고, ‘노동조건 개선’, ‘주5일 근무’를 주장하며 투쟁하던 노동자가 경찰의 폭력 의해 사망하는가 하면, KTX 승무원들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200일 넘게 싸우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처지가 <파업전야>의 노동자들과 어떻게 다른지 영화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더욱 의미있는 영화 감상이 될 것이다
 
 
/ 박진형 기자


※진보언론 최초의 1인 미디어 '민중의소리 블로그' blog.voiceofpeople.org
'현장의 감동 살아있는 뉴스' ⓒ민중의소리 www.vop.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라 2007-01-15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방영하더니 독립영화관은 끝내 닫아버렸다...되살리기 청원운동도 있었는데
거참... 폐업전야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