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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 코뮨의 현재를 살아가기
가난과 자본주의
2006년 10월 31일 (화) 02:28:40 채희철 kikibar@naver.com

[연세대 대학원신문 / 채희철 자유기고가]

“공통적인 것은 가난과 사랑의 창조적 관계로부터 탄생할 때에 활력을 띠며, 주체적 규정을 받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의 욕망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

‘자발적 가난’은 ‘성장을 멈추어라’는 무성장론과 함께 짝을 이루는, 경제제일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생태주의적 삶-담론이다. 경제적 무성장론이 자본제적 생산과정과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라면, 자발적 가난은 자본제적 소비과정과 그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다.

삶에 대한 불안을 먹고사는 자본

   
   
 
이 체제는 우리 경제가 보다 세계화되면 고용은 안정될 것이라거나, 불안정 노동과 저임금 그리고 고강도의 노동을 감수하지 않으면 세계화에 뒤쳐져 결국 경쟁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과 막연한 기대를 우리의 몸과 뇌에 주입하고 있다. ‘결핍’되어 있으니 그것을 보상받거나 채우라는 체제의 명령 앞에 누구랄 것도 없이 복종하게끔 한다. 욕망의 기능은 결핍을 채우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욕망을 하게끔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는 라캉의 언명은 정확하게 바로 자본체제의 무의식이다. 삶은 이 결핍(생산과 소비 모두에서)을 보상받으려는 자본제적 원환운동으로 전환되고야 만다.

비비안느 포레스테는 『경제적 공포』에서 자본주의는 경제제일주의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제적 공포를 심어놓음으로써 삶을 통제하는 체제라고 말한다. ‘성장이 있으면 고용이 있을 것’이라는 신화는 사실이 아니며(실제로 ‘고용 없는 성장’이 가능한 현실이 문제가 되고 있다), 모두가 완전고용의 시대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화를 믿는 척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 주체가 아니라 염려와 불안 그리고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람들은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험을 들며, 그래서 자본주의에 물을 대는 보험 산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한다. 불안한 영혼은 자본에 물을 댄다. 그렇기에 체제의 무의식을 폭로하고 원환의 고리를 깨뜨리는 것, 그것이 자발적 가난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처음 역사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2세기경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가난은 있었지만 그 가난은 특화되지 않는 가난이었다. 12세기의 가난은 십자군 전쟁, 도시의 성장과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 분열되어있던 왕국들의 통합과 국가의 성립, 유럽전역을 휩쓴 대량의 이주자들과 더불어 탄생했다. 이때 가난의 문제는 농민도 아니고, 상인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특정하게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존재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도시의 성문은 통치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공간적 배치였으며, 이에 따라 가난은 직접적으로 체제의 바깥영역으로 가시화되고 구획되었다. 말하자면 12세기는 중세시대에 불어 닥친 세계화였던 셈이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 공동체와 도미니코 수도회로 대표되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무소유’와 ‘공유’운동이 전개되었다. “가난은 모든 덕의 여왕이다(St. Francesco d’assisi).”

물론 오늘날의 가난은 도시 외곽이나 제3세계만의 문제가 아니며, 가난한 사람들이 통치체제의 바깥에 머물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이론 및 정치이론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주목받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통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산업예비군으로 개념화되거나 도시빈민이라는 주변적 이름을 가지며 ‘비생산적’인 존재로 규정된다. 어떻게 표현되든 그 주체성은 체제의 부덕한 잔여물(잉여인간)로 전락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부덕하고 체제를 위협하는 이들은 도둑, 거지, 부랑자, 매춘부, 건달, 광인들이었다.

피에르 파졸리니는 『폭력적인 삶』에서 전통적 노동계급이 아니라, 바로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보다 더 전복적이고 혁명적 주체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지배계급과 닮은꼴의 욕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더 벌거벗은 삶의 원초적 폭력에 노출돼 있지만, 화폐와 임금노동을 매개로 한 지배체제와의 공모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 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은 지배체제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잠재성과 가능성을 노동계급보다 더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의 단초를 더욱 밀어붙여 정치이론화한 것이 이탈리아의 자율주의일 것이다. 그들의 ‘노동거부’전략은 가난한 사람들의 주체성과 맞닿아있는 것이며 전통적(혹은 근대적) 노동계급과 주변적 주체성간의 탈구축적 연대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탈구축적 연대 그 자체가 새롭게 탄생할 탈근대적 프롤레타리아트인 것이며, 그 이름은 (네그리에 따르면)‘사회적 노동자’에서 ‘다중’으로 변화해왔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코뮤니즘적인 전투성의 미래 삶을 조명해 줄지도 모를 고대 전설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설이 있다. 그의 작업을 생각해보라. 다중의 빈곤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는 그러한 공통 조건을 채택했고, 거기에서 새로운 사회의 존재론적 힘을 발견했다.”

미래의 코뮨이 아니라, 코뮨의 현재를 살기

   
   
 
자발적 가난은 과연 대안적 삶의 전망을 열어갈 수 있는 것인가? 체제에 의한 훈육을 거부하고 모든 존재와 자연과 더불어 즐거운 삶을 제시하는 음유시인으로서의 존재는 가능한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무성장과 자발적 가난을 일종의 삶의 퇴행적 반동으로, 그리고 결핍의 집단적 게토로 삶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성장과 자발적 가난을 말하는 사람들의 어떤 편향과 관계되어 있다. 생태적이고 자율적 삶에 대한 전망들이 중농적 상상력에 갇혀 있거나, 이반 일리치처럼 자족적 생산(생계유지적 생산)과 기계시스템이나 작업도구의 제한이라는 원시적 상상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생산을 위한 생산’을 거부하고 무성장과 자발적 가난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욕망의 억제나 생산의 제한으로 받아들이는 전망을 거부하는 생각은 펠릭스 가타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가타리는 “자치라는 전망, 자신의 신체, 자신의 감각·감수성·성애의 재전유라는 전망은 어떤 종류의 정치적, 경제적, 생산적인 제한도 가져오지 않는다.”(『욕망과 혁명』)고 말한다. 무성장과 자발적 가난을 자족이나 퇴행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율적 생산, 대항생산의 다양성으로 인식해야 한다. 자발적 가난은 ‘필요’를 축소하거나 금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요의 화폐적 가치에 맞서 필요의 공유를 확대하고, 필요에 대한 경제적 독재에 맞서 욕망적 필요의 다양성을 증진하는 것이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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