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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단계적 이해
미셀 그리나 / 서광사 / 1989년 8월
평점 :
품절
철학입문격으로 나오는 책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는 철학사를 죽 개관하는 식으로 된 책도 있을
것이고 철학의 각 분과(인식론, 존재론, 윤리학 등)에 대한 서술을 담은 책도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나쁜 것은 이른바 다이제스트 판 철학서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한눈에 보는~,
30분만에 끝내는~, 20인의 현대사상~ 뭐 이런 식의 제목을 가진 책들 말이다. 아마도 대학입시에서
논술 열풍이 이런 책들이 인기리에 팔리는 일에 많은 기여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충족이유율이나 초월적 종합판단 같은 개념들을 무작정 외운다고 해서 실제 논술이나
대학 수업을 받을 때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칸트의 말처럼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곧 철학'함'philosophieren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축약된 논증들,
변증론적 과정이 생략된 채 주어지는 개념들, 이론적, 역사적 맥락과 분리된 공허한 주장들을
단시간에 훑는 것이란 그야말로 돌아서면 잊어버릴 앙상한 학습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위 책은 확실히 볼 만한 철학 입문서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각각 공간과 시간, 자연철학과 정신철학, 의식, 자유, 도덕의 기초, 노동, 신
이라는 제목이 붙은 장들은 제한된 분량이지만 각 주제에 대한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의들을
세밀하게 담고 있고, 고대, 중세, 근대의 주요한 철학 원전들을 오가면서 각각의 논의들을
해명하고 있다. 프랑스 그랑제꼴의 예비과정을 위한 철학개론서이기에 베르제즈, 위스망의
"새로운 철학강의"("프랑스 고교철학"이라는 이름으로도 번역되어 있다.)와 유사한 구성을
보이지만, 수준은 더 높다. 역자의 말처럼 우리로 치면 대학 3~4학년이 봐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이 책의 특징은 또한 프랑스 철학 특유의 실증주의와 합리론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인데,
책의 서두 역시 과학의 발달에 따른 철학의 지위를 묻는 물음에서 시작하고 있다.
각각의 철학적 질문이 단지 그것의 내재적 역사 속 뿐만 아니라 수학이나 물리학의 최신성과 및
정신분석학이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이른바 비제도권 학문의 성과들과의 적극적인 교류 속에서
던져지는 것은 분명히 다른 철학개론서(특히 영미적 전통에서 나온 좋은 입문서들,
예를 들어 나이절 워버턴의 책들)에서는 보기 힘든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독자들은 철학의 외부, 철학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철학이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도 더불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가벼운 뉘앙스의 제목과는 달리
별로 쉽게 읽히지는 않는 책이지만 관심있는 독자들은 읽기에 따라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론서의 역할은 철학사에 대한 개괄적인 공부와
원전 자체에 대한 공부로 더 나아갈 때 더 의미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