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축복의 시

축복의 시
- 마리아 에스테르 바스케스에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이 선사하네.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을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지팡이로
텅 빈 어스름을 탐문하네.

우연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필시 이를 지배하리니.
어떤 이가 또다른 희뿌연 오후에
이미 수많은 책과 어둠을 얻었지.

느릿한 복도를 헤매일 때
막연하고 성스러운 공포로 나는,
똑같은 나날, 똑같은 걸음걸음을 옮겼을
이미 죽고 없는 그라고 느낀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저주가 같을지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 중요하랴?

그루삭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 가는 것을 바라본다.
『타자, 동일자』(El otro, el mismo, 1969) 중에서 - 우석균 옮김
 

나는 보르헤스의 이 첫 구절을 읽으며 그대로 고꾸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이 무언가를 동시에 줄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그걸 보르헤스는 발견하는구나 하는 놀라움.

<스페인어의 삶>이라는 잡지의 기자인 리타 기버트(Rita Guibert)는 하버드 대학 교환 교수로 와 있던 보르헤스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청했다. 그는 보르헤스에 대한 회상에서 그를 "아르헨티나의 전통적인 군인이자 지식인 집안의 후예로서 그가 그 시대, 그 계층의 사람들에게 있어 전통적이고 특징적인 그런 예절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옷 입는 방식도 매우 보수적이었고, 연약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생기가 있었고 열정적이었으며, 목소리는 묵직하고, 쩌렁쩌렁했다고 한다. 그는 거의 장님에 가까웠지만 매우 뛰어난 기억력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찾고 싶은 책이 책장의 어느 곳에 꽂혀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전화가 걸려오거나 누가 문을 두드리면 비호같이 방을 내닫곤 했다. 보스턴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인터뷰가 있었던 어느 날 오후, 택시 운전사가 그를 찾으러 왔다가 문가에 있는 그를 보고 물었다.

"소경 한 사람을 모시러 왔는데요."

전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보르헤스가 대꾸했다.

"내가 바로 그 소경이오.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소."

보르헤스에 대해 말한다는 것, 그것은 어찌보면 시대와 관련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와 그의 작품들은 동시대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으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는 별개의 시공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보르헤스의 책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상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미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보르헤스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시력에 대해 그리고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가계 쪽에서 시력을 잃은 사람들 중 저는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세대일 겁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할머니가 장님이 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나는 시력이 좋았던 때가 전혀 없었지만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나는 1년 이상 장님의 생활을 하면서 나의 아버지가 보여준 그 온화함과 아이러니한 태도에 감탄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부드러움은 마치 귀먹은 사람들이 쉽게 화를 내는 것처럼 장님들에게 있어서 아주 전형적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장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평온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귀가 먹은 사람들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은 많지만 장님들에 대해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는 데서 증명됩니다. 장님에 대한 농담은 하나의 잔인한 죄악입니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수술을 했는지 횟수조차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1955년 페론 정권을 붕괴시킨 "자유혁명"이 나를 국립도서관장에 임명했을 때 나는 이미 책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비에 관한 시'(국내에서는 "축복의 시"로 번역되었다)라는 시 한 편을 썼지요. 나는 그 시에서 신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형용할 길 없는 아이러니와 함께/신은 내게 책들과 밤을 동시에 주었다……." 8만여 권에 달하는 국립도서관의 책들, 그 당시 나를 덮쳐오고 있던 밤. 그러나 황혼이 아주 느리게 왔기 때문에 (천천히 시력을 잃어갔기 때문에-역주) 결코 애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큰 글자로만 된 책을 잃을 수 있었던 때가 있었지요. 그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읽을 수 없게 된 때가 왔지요. 나는 지금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당신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약간 볼 수 있는 것과 완전히 보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거의 절대에 가까운 차이가 있지요. 볼 수가 없는 사람은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와도 같아요. 반대로 나는 어떤 자유의 착각과 함께 여기 케임브리지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돌아다니기에는 충분한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길을 건널 수가 없지요.

기버트는 마지막으로 보르헤스에게 묻는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보르헤스는 "아니요. 그리고 저는 여타의 사람들에게 그 어떤 충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의 인생조차도 겨우 간신히 꾸려왔으니까요……. 나는 약간 표류하며 나의 삶을 살았지요."라고 답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양 사상에는 결국 사랑은 보답받을 수 없는, 일방적으로 사모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오래 되고 우울한 전통이 있다. 사랑이 보답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사랑은 방향일 뿐 공간은 아니다. 목표를 성취하면, (침대에서건 어떤 식으로건)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면 소진되어버린다. 12세기 프로방스의 음유시인들의 시는 모두 성교를 미루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시인은 되풀이하여 남자의 간절한 제안을 거절하는 여자에게 탄식을 늘어놓는다. 4백 년 뒤의 몽테뉴 역시 무엇이 사랑을 자라나게 하느냐에 대해서 그 시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몽테뉴는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니 드 루주몽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이 정열을 강하게 불태우는 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욕망을 정의상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한정시켰다.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IshaGreen 2004-08-19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만화가 강경옥님의 작품『노말시티』에서 등장인물 비너스 레이버가 한 말이 생각나네요...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서로의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말...
고등학교 때 그 대사를 보았을 때는 매우 충격적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납득이 가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되어서리..긁적...-_-a

urblue 2004-08-19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노말시티는 안 봤는데... 저도 강경옥 만화 좋아해요.
지금 읽고 있는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내용이 전부 이 모양이랍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을 분석하고 해체하고, 사랑이 진짜 사랑이냐 물으니, 참, 재미있다고 웃기도 하지만, 뭐 좀 씁쓸해요. 저도 이제는 사랑에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을 꿈꾼답니다. ^^
 

 

 

 

 

 

타스타님의 이벤트에 신청한 책과 판다님과 바꿔보기로 한 책이 오전에 모두 도착했다.

3등까지,라고 한 이벤트에서 6등 해 놓고, 참가한 사람들에게도 선물 주겠다고 타스타님이 말씀하시자마자, 냉큼 보관함으로 달려가 책을 골랐더랬다. 타스타님께는 '아아, 이래도 될까요' 어쩌고 했지만, 사실은 무지 좋았는걸.

크리스토퍼 바타이유는, <다다를 수 없는 나라>도 안 읽어서, 그걸 먼저 보고 싶었지만 품절이다. <시간의 지배자> 역시 97년 초판인데다, 몸 상태로 봐서는 창고에서 상당히 오래 구른 듯 하다. 다행이야, 품절되기 전에 손에 넣을 수 있어서. 이렇게 멋진 상품을 받으니 훨씬 기분 좋다. 타스타님, 정말 고마워요. 담에 제가 이벤트 하게 되면 님한테 제일 먼저 ~~ (아, 지난번엔 로드무비님과 판다님을 특별 게스트로 모신다고 약속해 버렸는데, 뭐냐....) 쩝, 여러분, 제가 이벤트 관련해서 하는 말은 믿지 마세요. ㅠ.ㅠ

추리소설은 초등학교 이후로 내 분야가 아니다. 그런데 올 여름은 이래저래 추리 소설이 눈에 많이 띄고, 딱 맞춰 판다님이 책 바꿔보기를 제안하셔서, 한번 뛰어들어 볼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추리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하면, 또 읽어야 할 책 목록이 엄청 길어질텐데, 과연 감당이 되려나 모르겠다. 일단 판다님이 보내주신 <방화벽>으로 시작해 보자.

인터넷에서 중고로 올라온 20여권의 추리 소설 목록을 보고는 구입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니 대개 평이 좋은 작품들이다. 아마도, 지금 팔려고 하는 주인이 추리물을 꽤 좋아하는, 안목있는 분이었나보다. 우습게도, 이거 다 사서, 서재 분들에게 나눠 드릴까, 하는 생각마저도 잠깐 했었다. 아, 자꾸 이벤트 생각만 나니, 이거야 원...

고맙게도, 판다님이 읽지 않으신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보내주셨다. 아님, 혹 그새 다 읽으셨나. -_-a (그래, 읽고 보내주셨겠지...) <내 말 좀 들어 봐> 하나 가지고는 줄리안 반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힘들다. 허니, 더욱 고마운 선물이다. 판다님, 잘 볼께요.

지난 주에 주문한 책들이 월요일에 도착했는데, 계속 비가 와서 집에 가져가지 못했다. 그런 고로, 지금 내 책상 위에는 10여 권의 책들이 쌓여 있다. 집에 쌓아 놓은 책들 무너질까 걱정했더니, 뭐냐, 다행인거냐. 

하여간 기분만은 무지 좋은 오전이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ira95 2004-08-18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방화벽 읽고 싶네요^^
 

꿈에 내가 버린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내 앞에 모니터를 들이대고 이런저런 이미지와 글을 보여주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란게 - 자, 이걸 보면서 날 떠올려, 날 잊지 말라구 - 하는 유치찬란한 대사였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 그래도 왠지 아득한 느낌으로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 남자 조만간 결혼한다고 했는데, 이게 대체 뭔 꿈이람, 쳇.

아무래도 파리의 연인 때문인가보다. '사랑하니까 보내는 거야' 하던 박신양의 대사가 나도 모르게 머리 속을 떠돌고 있었던 모양이지. 에휴...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arsta 2004-08-1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아하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후딱. 다른 사람과 결혼해 버리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흠.. 사람들이 다 행복하면 좋겠어요.

urblue 2004-08-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헤어질 땐 그만한 이유가 있는거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네, 저도 모두들 행복하면 좋겠어요. ^^

tarsta 2004-08-1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만큼 허.해서 그럴 것 같아요. 어차피 그사람과 안될바에야...!!! 하면서 말입니다.
저도 그심정 이해해요. (먼산.. 물끄러미.)

어디에도 2004-08-18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연인, 에서 박신양이 그 대사 칠 때 저도 생각했었죠.
정말로 사랑하면, 보낼 수 있는 것일까? 나 같은 인간은 수양을 더 하고 도 닦은 후에나
가능한 일은 아닐까?
흠,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님.
저는 제가 버린 사람을 주워 담으면 한 푸대가 넘을 정도로 많을지도 몰라요.
근데... 푸대 속의 인물들 아무도, 제가 버린 줄을 아마 까맣게 모를것이여요.흣흣.
님이 그런 꿈을 꾸신건 그 사람이 아직 조그맣게 남아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렇게 글을 쓰실수 있는 건, 모두 다 잊었기 때문일까요?

urblue 2004-08-1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버렸으니 뭐 미련도 아쉬움도 없어요. 다만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기억이 있기는 하죠. 그치만 이젠 생각도 안나는걸요. 갑자기 꿈에 나타나서 오히려 놀래버렸다니까요.
사랑하면 보낼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네요.
 


Red Canna, 1923

 


White Iris, 1926

 


Dark Iris Ⅱ, 1926

 


Black Iris Ⅲ, 1926

 


Morning Glory with Black, 1926

 


Pink Sweet Peas, 1927

 

Jack In The Pulpit Ⅴ, 1930

 


Yellow Cactus, 1940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panda78 2004-08-1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 멋지다! @ㅁ@ 이거 퍼 가도 될까요? (책 오늘 부쳤어요. ^^;; 무사히 잘 들어가야 할 텐데..)

urblue 2004-08-17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판다님은 뭘 그런 걸 물으세요.
책은 받으셨나요?

어디에도 2004-08-18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저 이름과 그림을 봤더라 계속 생각했는데...(네, 저 치매여요;)
다빈치 코드, 군요.^^
그것도 님의 페이퍼에서, 본.
첫번째 그림을 보고 정말 여성의 그것과 닮았다 생각했는데, 다른 것들은 더 멋지네요.
아아, 전 잠이 안와서 이러고 떠돌아다녀요. 울증이 도졌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