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비연 > [퍼온글] 수전손택, 나쁜 취향은 죽지 않는다(강정)

2005. 2. 1 한국일보

수전 손택

나쁜 취향은 죽지 않는다
도덕의 이름으로 예술을 범하려 하는가
"예술작품에서 내용이란 무의미한 것
형식적 스타일의 관점에서 향유해야"

‘대중문화의 퍼스트 레이디’ ‘동시대 미국 문단의 악녀’ 등 도발적인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비평가 수전 손택이 지난해 12월 28일 뉴욕의 슬론-케터링 암센터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였다. 손택이 사망하기 1년 전 출간했던 책은 사진을 통해 전해지는 전쟁의 참상이 고통을 직접 겪지 않은 인간들로 하여금 얼마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드는지를 탐색한 ‘타인의 고통’(이재원 옮김, 이후 발행)이었다. 이 책에서 손택은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의 탁월한 이미지 분석을 통해 설파했다.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로서 일생을 보낸 그가 ‘헤게모니 독점에 온 정신이 팔린 권력자’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일침이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지속됐고, 이라크는 신자유주의 열강의 ‘공공의 밥’이 되었으며,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타인의 고통’은 수전 손택의 메아리 없는 ‘스완 송(Swan song)’이 돼버린 셈이다.

이산하 김남주 등 5명의 문인투옥사건을 탄원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수전 손택이지만, 그의 저술들이 우리나라에 제대로 소개된 건 불과 몇 년 전부터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는 도발적인 전언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해석에 반대한다’(이민아 옮김, 이후 발행)가 번역된 게 2002년의 일이다.

그리고 곧바로 ‘은유로서의 질병’(이재원 옮김, 이후 발행), ‘타인의 고통’ 등이 연이어 출간됐다. ‘캠프에 대한 단상’으로 그가 뉴욕 지성계의 백인 보수주의자들에게 신랄한 조소를 퍼부으며 등장한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런데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2000년대에 읽는 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고 문제적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주장들은 우리가 오래도록 긁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몸 안에 숨은 종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긁어주는 듯하다. 그 종기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의미론적 강박증의 더께가 아닐까 싶다.

수전 손택은 일생동안 ‘예술의 성애학’을 주장했다. 요컨대 예술작품을 억지로 발가벗겨 흠집을 내며 ‘강간’하지 말고, 그 ‘유혹’을 즐기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의 그런 주장은 19세기 말 오스카 와일드 등에 의해 주창된 유미주의에 기반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순한 호사취미나 정신의 허영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수전 손택이 궁극적으로 주장했던 건 예술을 인간의 이념과 도덕에 복무시키거나 문화를 좋은 것과 나쁜 것, 고상한 것과 천박한 것, 진지한 것과 가벼운 것 등으로 나누는 이분법에 대한 반발이었다.

소위 지식인들에 의해 ‘좋은 취향’이라 장려되는 것들이 실상은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고 도덕률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손택은 예술을 내용이 아닌 형식, 즉 스타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즐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택에 의하면 예술작품의 내용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하다.

이런 주장은 오스카 와일드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서 ‘예술이 반영하는 것은, 예술을 보는 인간이지, 인생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떤 예술 작품에 관한 의견이 여러가지인 것은 바로 그 작품이 참신한 동시에 복잡하고 생명력에 넘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손택은 실제로 자신의 글에서 오스카 와일드와 장 콕토의 예술관을 상당부분 인용하고 있다.

손택이 뉴욕 지성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1964년 발표한 ‘캠프에 대한 단상’이란 글을 통해서 였다. ‘캠프’란 소위 나쁜 것, 조잡한 것, 싸구려 같은 것에 열광하는 것을 지칭하는 일종의 은어다.

한국문단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키치’나 ‘컬트’ 등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단순한 엽기 취향보다는 스타일에 열광한다는 점에서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손택은 양성애와 B급 문화, 포르노 등을 가감 없이 인용하며 당대의 문화가 직면했던 패러다임의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한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충돌이라 일컬어지던 1960년대 서구문화의 급격한 혼란을 손택은 충돌이 아닌 변화와 혼융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극심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캠프에 대한 단상’ 이후, 손택은 문학계의 숨통 터질 듯한 해석학의 수장들을 향해 본격적인 일침을 날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리얼리즘의 교주 게오르그 루ツ÷甄?

지식인들의 임의적 잣대에 반기

손택은 루카치의 주장을 ‘위대한 맑스주의자의 성과’가 아닌 ‘감수성의 총체적 부재’일 뿐이라며 반박한다. 1970,80년대 한국문학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루카치의 명성에 가해지는 손택의 비판은 그가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사랑과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손택에 의해 루카치는 예술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강간하고 매장한 가식적인 도덕군자로 전락한다. 요컨대 루카치는 문학을 도덕논쟁의 도구로 폄훼했을 뿐, 문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그 자체로 즐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루카치보다는 훨씬 감수성에 민감했던 발터 벤야민과 브레히트 등이 더욱 영민한 예술옹호자였다는 게 손택의 주장이다.

문학도 문학이지만, 손택이 가장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을 가졌던 장르는 영화였다. ‘해석에 반대한다’에는 고다르, 브레송, 레네 등의 작품에 대한 매우 정치한 글들이 손택 특유의 감수성 충만한 문장들로 쓰여져 있다. 손택에 의하면 영화는 단순히 소설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영상으로 환원한 ‘제3의 매체’가 아닌 그 자체가 독자적인 스타일로 창조되는 ‘새로운 예술’이었다. 영화와 소설은 각각의 스타일을 통해 전혀 다른 세계의 일면을 표상한다.

그런 점에서 손택이 자신의 예술론을 피력하면서 고다르와 브레송의 영화에 찬사를 보낸 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매력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증명해낸 이 두 명의 예술가는 ‘과연 영화가 어떤 것인가’, ‘영화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라는 명제 앞에서 고뇌하며 진정한 영화적 스타일을 창출해낸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화는, 지금 우리가 숱하게 접하고 있는 ‘영화의 아류’(순전히 내가 보기에)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영화의 태생적 본질을 질문하며 세계가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질서를 탐색한다.

그러나 그들은 의미를 설교하기보다는 영상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스타일을 발견함으로써 자신들의 소임을 완수한다. 카메라를 통해 그들이 완수한 소임은 다름아닌 세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투명성(Transparency)’의 재발견이었다.

손택을 얘기할 때 ‘투명성’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사실 그가 예술을 예술 자체로 바라보자고 얘기할 때에도 기저에는 ‘투명성’이 있다.

이것은 사물 자체의 본성과 역할에 충실하자는 철학적 태도이기도 하다. 실제로 암으로 투병했던 시절이 있고 어린시절 결핵으로 아버지를 잃기도 했던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소위 정치적으로 유포되는 질병의 은유(대표적인 것이 에이즈)를 통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재앙의 이미지를 발생시키고 부추긴 사회현실을 강하게 공격한 바 있다.

병을 병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은유들은 단순한 육체적 병증을 견강부회하여 사회심리학적인 공포심리와 정치적 금기사항에 대한 강박증을 초래한다.

거기에 맞서 손택은 ‘좌파든 우파든 전체주의 운동은 두드러지게? 노골적으로? 질병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예술뿐 아니라 질병에 있어서도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도덕의 장막은 여지없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도덕의 노예가 아니다

그렇다고 손택이 소위 ‘도덕 불감증에 걸린 쾌락주의자’라는 오해는 하지 마시라. ‘해석에 반대한다’의 첫 장에 실린 ‘스타일에 대하여’란 글을 보면 그가 가지고 있던 심미적 쾌락과 도덕의 연관성이 명쾌한 논리로 풀이되어 있다. 그 글에서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도덕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나는 주장해야겠다.

그렇게 연관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술이 도덕적 쾌감을 주기도 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에서 얻을 수 있는 도덕적 쾌감은 어떤 행동을 두고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에 지적인 희열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주는 도덕적 쾌감이자 예술이 행하는 도덕적 역할이다.”

이러한 관점을 제대로 이해할 때 손택을 수식하는 두 가지 상반된 듯한 문구들이 포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행동하는 지성’을 가진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는 현실을 방관한 채 예술의 세계로 잠수한 인물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로 존재하는 예술의 세계를 통해 보다 풍부한 인간적 애정으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힌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위 ‘현실에 대한 재현과 모방’이라는 고전적 예술관이 현실과 예술을 동시에 왜곡하고 은폐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술은 인간의 관념이나 도덕률을 강조하기 위한 의식의 노예가 아니라, 심미적 쾌락을 통해 인간이 가진 ‘다정다감한 감정’을 고무시키는데 기여한다.

그럼으로써 인간본성에 대한 섬려한 이해가 〈?蠻嗤?세계를 보다 아름답게 재편할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며 병마와 씨름하던 손택이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실시간의 사진 이미지를 통해 여전히 고뇌했던 내용도 바로 그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그런 의미에서 그가 제기했던 문제의식의 본질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꼭 대답해야 줘야 할 우리 모두의 화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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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1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을 읽으면 그때그때 정리해야 하는데, 게으름을 피우다보니 지난 주에 읽은 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다리 걷어차기> 각주를 뒷편에 몰아놓아 보는데 심히 불편하고 책에 손때가 잔뜩 묻어버렸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올라간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찬다.

 

미국, 영국 현재의 선진국들은 자유무역을 부르짖지만, 불과 100 , 그들이 아직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 철저한 보호주의와 정부지원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었음을 조목조목 보여준다. 또한 현재 선진국들이 갖추고 있는 각종 경제 사회 제도들이 경제 성장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경제 발전에 따른 결과물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현재의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무역과 올바른제도를 권고하는 것은 사다리 걷어차기 다름 아니라는 .

 

스스로 성장론자임을 밝히고 있는 저자는,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의 보호주의와 올바르지 못한 제도를 당분간 참아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개발도상국들이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결국 선진국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의문 가지.

1. 선진국들이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것이 사다리 걷어차기라면, 나만 먹고 살고 싶다는 의미인데, 후발 국가들의 경제 성장이 선진국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라는 저자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2. 현재의 세계 경제 정책은 초국적 자본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데, 더더군다나 후진국의 경제 발전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것인가?

3.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현재 선진국 15~16 국과 20 개발도상국들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외에도 150 국가가 존재한다. 모든 국가들이 사다리를 올라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이 현실적으로가능한가?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이런 의문과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타이타닉호 같다. 앞에 거대한 빙산이 보이는데도 엔진을 멈출 생각은커녕 더욱 빨리 달려서 파멸을 자초한다는 것이다. 미국 선진국이 주장하는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구가 있어도 모자란다. 세계의 모든 가정이 차를 대씩 가지게 되면 지구에 매장된 석유는 불과 수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하고, 모든 인류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사람들만큼 에너지를 소모하기 위해서는 5개의 지구가 필요하단다.

 

환경적인 문제 아니라 경제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경제 성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 풍요로움이 소비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의 일이고, 그것은 식민주의-제국주의-세계화로 연결된 착취 메커니즘을 은폐하기 위한 속임수라는 주장이다.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일 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저자의 말처럼 늦기 전에 엔진을 멈출 있을까. 저자는 문제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으로 돌린다.

 

나의 . 내가 . 풍요로움과 잘 사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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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2-0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자주 써서 올려주세요.
책을 한 권 다 읽은 것 같네요.^^

2005-02-01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5-02-0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책 두 권 아닐까요? ^^;;

속삭이신 님, 미워요!!
그렇게 말만 건네놓고 사라지면, 제가 너무 섭섭하잖아요.
'곧'이 정말 '곧' 이기를...보고싶어요.

바람구두 2005-02-01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두 사람 사이가 너무 찐뜩해보인단....

urblue 2005-02-0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찐득..?
샘나시나요, 바람구두님? 님도 해드려요? (으윽..=3=3)

urblue 2005-02-0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이 말이야..
저런 건 아무한테나 해 주는 게 아니라구요. 흥.

2005-02-02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2-02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2-02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5-02-0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사다리 걷어차기'를 읽지 않은게 매우 아쉽습니다...어쨌거나, 선진국들이 더 많은 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선진기업들이 만들어낸 물건을 소비해줄 후진국도 좀 더 잘 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들만 룰루랄라 구름 위에 있다면...아무리 착취구조라 한들, 그들의 부를 늘리는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는 후진국들도 적당히 잘 살아야 하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초국적 자본'이란 것들도..예컨대, 외환위기 이후 한국이란 나라에서 엄청난 컨설팅 비용이네 뭐네 가져갔는데요, 한국 수준이 너무나 후진적이었다면, 그 정도의 컨설팅조차 필요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며....한국이 어느 정도 사니까...자본시장도 왠만큼 성숙하여, 초국적자본들에게 더욱 좋은 먹잇감이 된게 아닐까....결국, 후진국의 경제발전은 필요하겠구나....싶은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경제는 반드시 성장해야만 한다'는 '상식'을 뒤집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인거 같슴다. 나홀로, 귀농하여 자족하고 산다는 수준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자본주의의 탐욕이 어느 수준에 오르면...'웰빙'이니 뭐니 하면서, 우아한 정신의 고결함 쪽으로 흐르면서, 풍요에 대한 욕심을 버릴려나..과연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할까요? 흠흠....

암튼, 오래간만에 블루님 서재에서 놀고 있으니, 저로선 기분좋은 밤임다. ^^

2005-02-03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2-03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2-03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5-02-04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오랫만입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나라의 경제 발전도 어느 정도까지 필요하겠죠. 그래서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 지역 등에 투자를 했다고 하지요. 아마도 딱 그 수준까지만, 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런 책들을 연이어서 보고 있으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집니다. 제가 발상의 전환에 대해 얘길 꺼냈더니, 누군가는 그런 책들 읽지 말라고도 하더군요. 그래봐야 저 사는 것만 고달파진다나요. 확실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 역시 뭔가를 할 수 있기는 한걸까 싶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저의 책읽기는 쭈~욱 하려구요. 마냐님이 좋은 책들 많이 소개해주셔야 하는데. ^^
 
 전출처 : 숨은아이 >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관한 신화학자 조현설의 해석

[조현설의 우리신화의 수수께끼]
선녀, 가정을 박차고 훨훨 날아가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마음씨 착한 노총각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준 덕분에 선녀의 깃옷을 감춰 행복하게 살다가 깃옷을 내어주는 바람에 선녀 및 자식과 헤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 동화를 한번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시 나타난 노루의 천기누설로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가족과 상봉하는 이야기, 혹은 지상에 두고 온 늙은 어머니를 뵈러 내려왔다가 천마에서 내리지 말라는 금기를 어겨 영원히 지상에 남게된 나무꾼 이야기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다양하게 변주되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에는 변주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도 나무꾼과 선녀가 지상에서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없다. 행복한 결말을 유난히 좋아한다고 소문이 자자한 한국인들은 왜 이들 부부가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이야기를 짜지 않았을까? 물론 하늘나라에서 선녀와 자식들을 만나 거기서 잘 사는 나무꾼 이야기도 있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지상에는 노모가 남아 있지 않은가.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가 숨기고 있는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한국인은 몇이나 될까? 수수께끼 풀이의 첫번째 단서는 ‘금지의 위반’이다. 나무꾼은 노루가 절대로 내줘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 선녀의 날개옷을 꺼내준다. 독자들이 혹은 청중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쯧쯧 어리석은 나무꾼 같으니라구. 나무꾼이 노루의 말을 따르지 못한 것은 금지에는 늘 위반이 뒤따르는 민담의 이야기 문법을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이 위반에는 또다른 비밀이 숨어 있다. 나무꾼이 금지를 위반할 수밖에 없는 비밀.

이승에서 행복한 결말 없는
민담 ‘나뭇꾼과 선녀’는
몽골 백조처녀 신화의 변주
생성을 잉태한 ‘금지의 위반’
그 속에 여성을 붙잡아 두고 싶은
남성들의 욕망 숨어있어

비밀의 문을 여는 주문은 신화 속에 있다. 비밀은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가 본래는 신화였으며 우리가 아는 상당수의 전설이나 민담은 신화의 변형이라는 사실에 있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에 사는 몽골 브리야트족은 백조를 신성하게 여기는 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옛날 어떤 사냥꾼이 새를 잡으러 갔다가 호수에서 깃옷을 벗고 여자가 되어 헤엄을 치고 있는 백조 세 마리를 본다. 사냥꾼은 한 마리의 깃을 감춘다. 날아가지 못하고 남은 여자를 붙들어 살았는데 여섯 아이가 태어난다. 어느 날 아내가 소주를 빚어 남편을 취하게 한 후 깃을 달라고 한다. 감추었던 깃을 내주자 순식간에 백조로 변한 아내는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인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백조는 바로 천신 에세게 마란의 딸이고 이 백조로부터 바이칼 지역 브리야트인들의 족보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이 백조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고 신화는 설명해준다.

이런 유형의 백조처녀 이야기는 유럽에서 몽골, 시베리아,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이 기원신화에서 우리의 눈길을 잡는 부분은 백조 역시 깃을 찾아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사냥꾼과 나무꾼, 백조와 선녀, 너무도 닮은 모습이다. 그러나 지상의 두 남자, 하늘의 두 여자 사이에는 전혀 닮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나무꾼에게는 있는 금지가 사냥꾼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노루와 같은 동물이 등장해 천기를 누설하는 일과 같은 흥미로운 행위가 신화에는 없다.

신화에서 사냥꾼이 술에 취해 깃을 내준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실수가 사냥꾼을 이별의 고통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신화에서 사냥꾼의 실수는 브리야트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생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드러난 금지는 없지만 금지가 있더라도 금지가 위반돼야 새로운 생성이 가능하다는 것이 신화가 깃옷처럼 감추고 있는 은밀한 이야기다. 이것은 에벤키족의 웅녀가 새끼를 찢어 사냥꾼과 절반씩 나누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죽어야 새로운 민족이 생성될 수 있듯이 천신의 딸과 지상의 사냥꾼이 헤어져야 브리야트족이 지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입과 귀를 드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결말이 없는 것은 이 이야기의 원천이 신화였기 때문이다. 마치 유전자와 같은 신화에 대한 기억이 행복한 결말을 원하는 한국인의 심성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화가 아닌 전설이나 민담은 선녀와의 이별을 나무꾼의 통곡으로 처리하거나 하늘나라의 재회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첫번째 수수께끼가 풀리려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머리를 든다. 우리나라에는 백조처녀가 어떤 집단의 시조가 되었다는 신화가 없는가? 없다면 몽골에는 있는 것이, 일본에도 있는 것이 왜 우리에게는 없는가? 이런 의문이다. 정답은 천신 에세게 마란만이 알고 있겠지만 두 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하나는 백조처녀 신화를 지닌 집단이 한반도로 들어왔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 자체가 중개과정을 거쳐 들어왔을 가능성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들어온 민족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집단의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에 시조신화 역시 더 이상 전승되지 못하고 전설이나 민담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처음부터 전설이나 민담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4세기 중국 동진(東晋) 사람 간보(干寶)가 기록한 <수신기(搜神記)>에도 이미 ‘모의녀(毛衣女)’라는 백조처녀 전설이 실려 있으니까.

변형의 내력이야 어쨌거나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변하는 부분도 있는 법. 신화가 전설이나 민담으로 변형되면서 사냥꾼은 나무꾼으로, 백조는 선녀로, 백조의 깃은 선녀의 날개옷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변화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 그것은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인가라는 물음과 관련있다. 두 번째 수수께끼다.

브리야트 기원신화에서 주인공은 사냥꾼이 아니다. 사냥꾼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깃을 숨겨 천신의 딸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백조의 처지에서 보면 깃은 지상의 사냥꾼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일 수도 있다. 백조는 사냥꾼을 끌어들여 여섯 자식을 낳고 결국에는 지상에 딸 하나를 남겨두고 승천하기 때문이다. 이 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브리야트족이고 그래서 백조는 이들의 신성한 어머니가 된다. 신화는 이 신성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러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주인공은 선녀가 아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마음씨 착한 노총각 나무꾼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다. 신화의 사냥꾼은 드러난 이유 없이 백조를 발견하지만 전설의 나무꾼은 노루의 목숨을 구해준 선행 덕분에 선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착한 남자는 마땅히 아름다운 선녀를 만날 자격이 있다! 물론 이 착한 노총각의 이야기는 금기를 어겨 선녀를 놓치는 결말로 풀리기도 하고,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가족이 재회하는 결말로 매듭지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결말이든 거기 숨어 있는 것은 남성들의 욕망이다. 나뭇꾼과 선녀 이야기는 선녀를 가정 안에 붙잡아 두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다.

지리산 발치에 박두규라는 시인이 있다. 그는 술이 깊어지면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데 <금강산녀>라는 노래도 레파토리 중 하나다. “내 옷은 어디로 갔나. 그 누가 가져 갔나. 오늘 꼭 올라가야 내일부터 베를 짜는데”로 이어지는 노래. 장기수들이 부르던 북한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래 속의 금강산녀가 바로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빼앗긴 <금강산 선녀>의 선녀다. 장기수들은 자신들의 신세를 옷을 잃은 선녀에 비유했겠지만, 이 애절한 노래는 지금 우리에게는 남성적 이야기의 감옥에 갇힌 여성들의 절규로 들리기도 한다.


조현설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연구교수 mytos21@hanmail.net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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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 교류전 <새로운 과거>를 보고 오다.

발칸 지역은, 최근 읽은 <전쟁이 끝난 후>를 통해 조금 알게 되었을 뿐이다. 궁금함에 다녀오긴 했는데, 여전히 낯설다. 작품만 봐서는 뭘 의미하는지 짐작하기도 힘들어서 설명이 필요하겠다 생각했다. 잠시 둘러보고 있는데 안내인이 설명을 한다길래 따라다녔는데, 열심히 설명해 준 그 젊은 여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나만큼이나 발칸의 역사와 문화에 무지했고, 겨우 한두시간 공부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품에 대해서도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제 1 전시실


제 2 전시실

제 1 전시실을 들어가면, 흰 란제리 차림의 여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커다란 화면이 제일 먼저 관객을 맞는다. 뭔가 제대로 보기도 전에 놀란다. 여자는 세르비아&몬테니그로 출신의 밀리카 토미취라는 작가 본인이다. 64개국어로 <나는 밀리카 토미취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의 몸에 나 있는 무수한 상처와 핏자국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의식하기 이전부터 만들어진 혹은 생겨난 근원적인 상처를 의미한다고 한다. 발칸 지역의 분쟁의 역사가 개인의 삶과 정신에 남겨놓은 피폐함일까.


벨그레이드는 기억한다

밀리카 토미취의 다른 작품. 1945년 5월 소비에트 병사와 미국 병사들 간에 이루어진 역사적 만남을 기리는 청동상 사이에 빠르티잔 복장을 한 작가 자신이 서 있다. 45년 당시에 파시즘에 대항해 한 목소리를 냈던 '만남'을 기념하는 작품에 작가가 개입함으로써 '대립'을 보여준다고 한다.

토미취의 인상적인 다른 작품은 작가 자신이 벨그레이드의 한 거리에서 목을 매단 일련의 사진들이다. 그녀가 실제로 목을 맸는데,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누구도 그녀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단다. 섬뜩하다.


세르비아&몬테니그로에서 열린 비엔날레에 출품한 코소보 출신 알버르트 헤타의 사진 작업. 이 건물은 예전에 세르비아 대사관으로 쓰였던 건물인데, 작가는 이 건물에 코소보 국기를 내걸었다. 그러나 세르비아 정당과 그리스 정교회 측은 세르비아를 대표하던 건물에 코소보의 국기가 걸린 것을 참지 못하고 작품을 훼손했다고 한다. 세르비아와 코소보 간의 분쟁은 여전히 진행중인가보다.


혁명의 재발명


크로아티아 출신 이고르 그루비취의 작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혼합한 재미있는 발상. 이 작품 앞에 주크 박스가 있었는데 혁명을 소재로 한 Rock의 명곡들을 관객이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 들어보지는 못했다.

그룹 슈카르트가 전쟁미망인들이 만든 편모협회와 협업한 <양파와 함께 한 10년>은 세르비아의 부엌에서 쓰이던 자수 타월을 활용하여, 편모협회의 회원들이 직접 도안하고 수를 놓아 만든 작품들의 모음이다. 각 자수의 제목에 재미있거나 뜨끔하거나 한 것들이 많았는데 적어놓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 하나. 램프에서 기도하듯 맞잡은 손이 나오는 타월의 제목은 <나는 나의 꿈을 팔았다. 그건 사실이다. 겨우 새로운 후추를 사기 위해서>이다.

 

1시간 정도면 충분히 볼 것으로 예상했으나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어쩌고 하다 보니 제대로 보지를 못했다. 5시부터 전시회의 부대행사로 진행하는 <발칸 영화 상상하기>를 보러 가기 위해 전시장을 그냥 나와야했다.

영화 상영은 매주 토요일인데, 29일이 마지막이었다. 상영작은 아톰 에고얀 감독의 <아라라트> 터키의 아르메니안 학살에 관한 영화로 엄밀히 따지면 발칸 지역의 작품은 아니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어 함께 상영한다고 관계자가 설명했다. 거기까지면 좋았을텐데, "주제가 무겁고 영화가 지루해서 재미없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은 왜 하는건지. 본인이 지루했던게지. 그치만 나도 친구도 꽤나 몰입해서 재미있게 봤다.

좀 더 일찍 이 행사를 기억해내서, 토요일마다 영화를 보러 갔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 역시 사람은 부지런하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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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3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나의 꿈을 팔았다..겨우 새로운 후추를 사기 위해서...
거참 타월 제목이 아침부터 사람 울리네요.
정말 울었다는 건 아니고.
아톰 에고이안 감독 영화는 기다렸다가 극장 가서 본 적이 있는데
제목이 생각 안 나네요.
한때 난리를 쳤던 영화의 제목도 생각이 안 난다니 서글퍼라.
좋은 구경 하고 왔네요.^^

2005-01-31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1-3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생각났다.
'엑조티카'.
휴, 속이 시원하네.^^;;

urblue 2005-01-3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로드무비님, 그거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hanicare 2005-01-3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엑조티카-교복차림의 여자아이-뭉크의 사춘기-에곤쉴레의 철사꽈배기 여자애들 그런 것들이 겹칩니다. (장정일은 의도적으로 뺍니다.백설왕자얼굴과 더불어 그 타입의 얼굴은 어떻게 해봐도 도저히, 취향이 아니라서.^^)
지난 주 부터 '꿈'에 대해 자꾸 잡념이 돋아나는데 인간, 아니 적어도 나라는 인간은 꿈이 있어야 생기있어지나 봅니다.사람을 열광하게 만드는 건 현실이 아니라 꿈 혹은 폄하해서 헛것.그런 생각을 합니다.

2005-01-31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5-01-31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엑조티카는 보지 않았는데, 그런 이미지인가요?
ㅎㅎ 하니님이 도저히, 취향이 아닌 얼굴이군요, 장정일은. 뭐 저도 그닥 좋아하는 얼굴은 아닙니다만.
헛것이라고 폄하할 필요까지야. '꿈'이 좋아요. 전 더불어 몽상도 즐기는 것 같습니다. ^^
 

조승우의 영화는 편도 보지 않았다. 친구들이 호들갑스럽게, 오로지 조승우 때문에 <후아유> <클래식> 번씩 보았다고 말할 때에도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내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 배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뮤지컬 <지킬 하이드> 보고 나서 나도 조승우의 팬을 하기로 했다. 그러니 <말아톤> 촬영 중이라는 소식이 들릴 때부터 친구들과 개봉하자마자 봐야 영화 1순위로 꼽으며 기다린 당연지사다.

 

일찌감치 예매를 놓고 있다가 영화를 때가 가까이 되어서야, 내가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보면, 감동하기보다는 닭살이 돋고, 같은 얘기냐, 싶은 마음이 먼저 든다. 인간이 못돼먹어서겠지만, 헐리우드의 문법이 지겨워서다, 라고 나름 항변한다. 그런데, 5 지능을 가진 자폐아의 마라톤 도전기라니, 이거야말로 진짜 휴먼 드라마아닌가. 갑자기 밀려드는 불안감. 그래도 , 조승우를 보기 위한 거다, 라고 위안한다. 사실 그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생각 따위 전혀 했을 테니까.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변한다. 엄마는 아이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어떤지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던 엄마는 아이의 기분을 있다면 당장 죽어도 좋겠다고 소리치고, 엄마에게 버림받을까 듣던 착한 아이는 엄마의 손에서 벗어나 달리기를 선택하고, 술로 나태로 그냥저냥 살아가던 코치는 뛰기 좋아하는 아이를 보며 예전의 달리는 기쁨을 되찾고, 형에게만 집착하는 엄마에게 질려있던 동생은 어느 순간 엄마도 형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변하는게 그렇게 쉬운가. 영화가 내가 말한 것들을 그저 직선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때론 안타깝고 아프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런 것들이 거슬린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니까.

 

마지막쯤 삽입된 생뚱맞은 장면들. 자폐아는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계속 설명하다가 어째서 사람들과 교감(?)하는 상상인지 환상인지 하는 장면들을 집어넣은 건지 이해가 된다. 어울려 사는 세상이라고? 자폐아도 정상인들과 다를 없다고? 그래, 역시 사람이고, 감정이 있고,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하는 것도 하는 것도 있다. 초원이가 자신을 느끼고 알게 되는 지점에서, 관객들이 그걸 공감하게 되는 지점에서 그치면 안되나? 반드시 세상과 정상인들과 화해시켜야 하나? 그쯤 되면 영화를 만든 사람의 강박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조승우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자폐아 초원이의 맑은 기운과 발설하지 않는 미묘한 감정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곳에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는 눈동자와 맹한 듯한 표정과 끊임없이 까딱대는 손가락마저 사랑스럽다. 마지막의 환히 웃는 얼굴, 얼굴을 것만으로 영화의 모든 단점을 용서할 있다. 같은 다시 하기 싫다는 어린 배우를 앞으로도 좋아하게 같다.

 

가지 , 춘천마라톤 코스 예쁘더라. 가을에는 경춘국도를 따라 춘천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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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5-01-29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배우 가슴팍에 '조선일보'... 왜 이런 것만 눈에 보이는 지... ㅜㅜ

urblue 2005-01-2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님, 저도 그게 영 맘에 안 들어서 사진 바꿨습니다. ㅎㅎ
영화 보면서도 내내 거슬렸다니까요, 조선일보.

로드무비 2005-01-2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가족도 내일 보러갑니다.
블루님, 책 다음주 주고받을까요?^^

하얀마녀 2005-01-3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 조선일보는 날이 갈수록 점점 싫어지는 것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