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북한체제 붕괴 노리는 북한인권법

 

 

북한체제 붕괴 노리는 북한인권법
대량 정치망명 유도… 정작 인권문제에 관심없어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지난 9월 28일 미상원은 ‘북한인권법’을 통과시켰다. 북한 체제에 반대하는 대량 정치 망명을 유도해,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표면화한 것이다.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라면 이른바 ‘탈북자’ 문제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탈북자 문제를 취재해온 필자는 미국의 의도가 그대로 관철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조중 국경을 넘어선 북조선 사람들을 과연 ‘정치적 망명객’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조차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중국 내에서 활동 중인 각종 NGO나 선교단체, 그리고 탈북 브로커들의 실체를 조명해봤다. 이들은 탈북자를 양산하겠다는 미국의 이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북한인권법’을 통해 미국의 재정적 수혜를 입게 될 대상도, 다름 아닌 이들 탈북지원 단체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탈북 문제가 인권개선의 의도가 아닌 다분히 ‘정치적 기회주의’의 소산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조천현 비디오 저널리스트 vjcho@hotmail.com


탈북자 문제가 외교적인 현안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1월, 중국 연길에서 생활하던 탈북자 7명이 중국 흑룡강성 밀산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갔다가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된 사건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 7명은 모스크바의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실(UNHCR)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결국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이후 국내 몇몇 NGO 단체들이 나서 ‘북한 인권과 난민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를 개최하여 탈북자 문제를 국제사회의 이슈로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유엔 등 국제기구의 의제로 다룰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정작 EU(유럽연합)가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보이자, 이들 NGO 단체들은 북한으로 송환된 7명 중 1명이 중국으로 탈출했다는 정보를 흘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해, 이 사건은 NGO와 탈북자가 꾸민 연극에 불과했다.

가짜 김운철’이 탈북자 문제를 키웠다

김운철씨가 그 주인공이다. 김씨는 “북으로 송환된 후, 지하 고문실에서 쇠줄이나 가죽벨트, 각종 전기봉 등으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국내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그는 “북으로 송환당할 때 48Kg이었던 몸무게가 병보석으로 나올 때는 28kg으로 줄었다”며 자필수기를 『월간 조선』에 건네기도 했다.

이후 김씨는 한국과 일본 NGO 단체들의 도움으로 태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김씨는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으로 송환된 후 혓바닥으로 변기를 핥고 팔과 성기에 담뱃불로 지짐을 당했다”고 밝히는 등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한국정부는 2001년 6월 26일 김씨를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같은 날 장길수군 일가족 7명은 치밀한 준비를 마친 한국과 일본 NGO 단체의 도움으로 중국 베이징 주재 유엔 고등판무관실에 진입했다. 다음날 27일 프랑스의 대표적 일간지 『르몽드』는 장길수군 사건과 함께 김씨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 강제수용소의 집단 처형과 굶주림'이란 기사를 내보냈다. 김씨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3일 전에 이루어진 인터뷰 기사였다.

김씨는 “1000명의 처형을 목격했으며 그 중 15차례는 교수형이었고 2차례는 산채로 화형하는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또한 “희생자의 95%는 죄가 없었으며, 처형장에서 개들이 인육을 먹고 해골을 굴리는 것을 봤다”는 엽기적 잔혹행위를 증언했다.

그러나 정작 김운철은 가짜였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박충일’이라는 사람이 한국에 가기위해 ‘가짜 김운철’ 행세를 한 것이었다. 한국에 데려가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탈북자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탈북관련 NGO의 비도덕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EU(유럽연합)와 UN 인권위원회에 보고된 ‘가짜 김운철’의 증언은 수정조차 되지 않았다. 때마침 장길수군 가족 망명 사건이 터지고 여론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리자 ‘가짜 김운철’과 그를 연출했던 NGO관계자들은 기사회생한 듯 숨을 죽이고 어떤 공식논평이나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박충일이 자신이라고 주장한 김운철씨는 러시아에서 체포되었을 당시, 국내신문과 방송에 얼굴과 이름이 보도되었기에 누구나 얼굴을 분간할 수 있었다.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이후 국제 여론을 등에 업은 NGO단체들은 EU(유럽연합)가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 정식으로 북한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인권문제를 매우 정치적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들 NGO들은 ‘인권단체’라기 보다 차라리 ‘정치단체’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그 서막은 2002년 3월 14일, 주중 스페인 대사관에 탈북자 33명을 진입시킨 사건이었다. 당시 스페인이 유럽연합의 의장국이었기 때문에 진입장소를 스페인 대사관으로 택했다. 유럽연합 회의일정은 2002년 3월 14일부터 15일까지였다. 그들의 의도는 적중하는 듯 보였다.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탈북자 33명을 계기로 유럽연합은 3월 16일에 북한 결의안을 채택하려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했던 독일인 활동가 폴러첸의 적절치 못한 행동 때문에 중국 당국은 대사관에 진입한 탈북자들을 27시간 만에 제3국으로 추방시켰고, 결국 결의안이 채택되지 않은 채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공안 당국에서는 탈북자 검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와는 별도로 스페인 대사관 사건 이후 탈북자들은 각국 대사관에 진입만 하면 무난히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이때부터 브로커들의 금기시해왔던 대사관 진입 사건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브로커들은 그 대가로 탈북자 1인당 300만 원을 받아 챙겼다. 10여 차례의 대사관 진입사건이 더 있었지만 중국정부와 한국정부는 협상을 통해, 각국 대사관에 진입한 탈북자들을 조용히 제 3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탈북자 문제는 더 이상 부각되지 않았다.

“NGO, 그들은 책임지지 않는다”

여론이 잠잠해지자 NGO들은 탈북자 문제를 다시 이슈화하기 위해 이른바 ‘엔타이항 사건’을 기획하였다. 이 사건은 2003년 1월 20일, 탈북자 80여명이 중국 산동성 엔타이 항에서 보트를 타고 한국과 일본으로 건너가려다 실패한 사건이었다. 기획망명이란 성공하든 실패하든 국제이슈화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치밀한 사전 준비 없이도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기획망명을 밀어 붙일 수 있다는 ‘주먹구구식’의 결정판이 이 ‘엔타이항 사건’이었다. 국내외 7개 NGO 단체가 연합해 계획을 했다는데 처음부터 계획 자체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계획을 주도한 단체 관계자는 현장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현지 사업가인 한국인과 조선족 동포가 일을 진행했고 한국인 프리랜서 사진작가 한 명이 동행했다. 한국에서는 전화로만 지시를 내렸을 뿐이고, 불과 5명이 나서서 얼굴도 모르는 80여명의 탈북자들을 모집하고 인솔했다.

필자는 이 사건 10여일 후 엔타이항에서 밀입국 하려다 피신한 2명을 중국 연길에서 만났다. 한국에 보내준다는 조선족 모집책의 말만 믿고 따라 나섰던 이춘성(37세, 함북 청진, 가명)씨는 “모집책이 한국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 나섰다”고 밝혔다.

이씨는 한국 여권을 만들어서 데려가니까 무사하다는 모집책의 말을 믿었고, 모집책에게 한국 입국에 성공하면 정착금 3700만원을 건네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모집책은 함께 동행할 한국인에게는 “정착금을 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씨는 연길에서 한국인 2명과 함께 기차를 탔지만 아무도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함께 동행한 한국인 프리랜서 작가는 이씨를 비디오로 촬영만 했다. 별 의심이 없었던 이씨는 대사관으로 들어가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대련에 도착하자 여객선으로 갈아타고 엔타이 항으로 향했다. 또 다른 탈북자 10여명이 합세해 놀란 이씨를 보고 한국인은 “이제 엔타이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며 “죽을 각오까지 했냐”고 물었다.

그 배안에는 80살 된 노인도 있고, 아이도 있고, 장애인도 있었다. 새벽 3시 엔타이에 도착하자 함께 동행했던 한국인 중 한 사람이 1인당 10원씩 내고 타고 온 배안에서 아침 6시까지 잠을 자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씨는 미심쩍어 함께 동행 한 탈북자와 함께 여관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배에서 내렸다.

한국인 한명도 내렸다. 한국인 프리랜서 사진작가만 탈북자들과 함께 배에 남았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배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이씨는 정말 운 좋게 사건의 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기획망명을 허술하게 주도했던 NGO 단체들은 그 어떤 ‘사과성명’이나 ‘반성’도 표명하지 않았다. 실패한 기획망명은 실패한대로 국제 문제화하기에 골몰했을 따름이다.

기획망명의 그늘, 브로커와 선교단체

이처럼 기획망명의 주최자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이벤트성’ 기획능력은 뛰어나지만 탈북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 또한 기획망명에 조직적인 브로커까지 결합해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일부 NGO선교 단체들은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언론에 의존하는 편협성마저 드러내고 있다. 다음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일가족 3명과 함께 기획망명에 참가하려다 체포되어 강제송한당한 후 재탈북한 김진주(38세, 함북회령, 가명)씨는 애초에는 조선족 남편과 생활하면서 형편이 나아지면 북한에 가 살 생각이었고 한국에는 갈 생각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씩 한국으로 떠나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인 모집책이 “탈북자가 열 명 정도만 더 모이게 되면 3일 안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할 수 있다”고 권유해와 일가족 3명과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모집책에게 선금으로 3,000위안을 건네주고, 한국에 도착하면 정착금 일부도 떼 주기로 약속했다

모집책은 김씨 일행을 북경에 있는 한 민박집으로 안내했다. 민박집에 들어서자 또 다른 탈북자들도 있었다. 그 곳에서 한 민간단체 소속이라고 말한 탈북자 안내인은 ‘난민 신청서’ 작성 요령을 알려주었다. 난민 신청서를 쓴 후 외국인 기자와 기자회견도 했다. 기자회견 후 안내인은 독일학교 담을 넘으라며 담을 넘기 위한 의자도 준비해 주었다.

다음날 모집책은 2대의 택시를 잡아주면서 안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기자들이 뒤따라가면서 카메라로 찍기 때문에 만약에 붙잡히게 되면 더 좋다고 하면서 언론에 공개하면 16일 안에 풀려날 수 있다고도 했다.

택시가 독일학교 담장에 다가서자 중국공안이 나타나 자신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소리치던 탈북자 안내인과 외국인들은 자취를 감췄다. 김씨는 체포되어 강제 송환되는 순간까지도 외국인이 개입된 기획망명이라 그들이 도와줄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종교단체가 관련된 부작용도 있다. 지난 7월 25일,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 10여 명이 외교통상부를 항의 방문한 사건이 있었다. 억울함을 하소연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지난 5월 북한을 빠져나온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기획망명을 추진하고 있는 ‘두리하나’라는 이름의 선교단체를 찾았었다. 외몽고 국경선 철조망 아래까지 직접 바래다 준다는 말을 믿고 가족 1인당 200-300만 원씩의 비용까지 지불했다. 이들이 부탁한 가족은 총 18명이었다.

‘두리하나’측은 탈북자 출신 간사 1명을 중국에 보내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간사는 중국 내몽고 국경 도시로 가 한국말도 모르는 중국인 운전수에게 탈북자 가족들을 외몽고 국경선까지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고 그냥 한국으로 입국했다. 하지만 운전수는 탈북자 18명을 국경선 철조망 아래에 내려주지 않고 국경선이 보이지 않는 중국인 목장의 철조망 옆에 내려주고 사라졌다. 탈북자 18명은 국경선인 줄 알고 철조망을 넘어 중국인 목장으로 들어갔다. 이를 수상히 여긴 목장 주인의 신고로 이들은 곧바로 체포되어 1달 가까이 중국 변방의 구류소에 수감되었다.

‘두리하나’측은 수감된 가족들이 북으로 강제 송환될 때까지 한달이 넘도록 이 소식을 한국의 가족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가족들의 강력한 항의에 ‘두리하나’측은 기획망명 입국비용으로 받은 돈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사건을 일단락시켰다. 피해자 가족 김인수(40세, 가명)씨는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울분을 토로했다.

“우리처럼 나서지 않았다면 이런 사건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400명도 넘게 데려왔다고 큰소리 뻥뻥치고, 그 뒤에는 소리없이 붙잡혀 죽어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브로커한테 당했다면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NGO 선교단체에 당해서 격분한단 말입니다.”

한국행을 원하지 않는 탈북자들?

탈북자들의 유형을 보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국행 희망형, 중국 정착형, 북조선 귀환형이다. 일반적으로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들의 일부분만 NGO 단체들에 의해 크게 부각돼, 이들이 마치 ‘탈북자들의 전부’인 듯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필자는 지난 2년간 장기체류 탈북자 1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바 있다. 이들 탈북자들이 원하는 최종 정착지가 어디일까라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설문조사 결과 한국행을 원하는 탈북자가 41%, 북조선 귀환을 원하는 탈북자가 34%, 중국에 정착하기를 바라는 탈북자가 21%였다.

여기에서 한국행을 바라지 않는 탈북자가 절반이 넘는 55%에 달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획망명의 여파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부류가 이들 중국 정착형과 북조선 귀환형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머무르고 있거나, 북한의 개방을 기다리고 언젠가는 북으로 가 잘 살아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정치에도 인권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부류가 많았다. 이들은 이미 중국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거나 일자리를 얻어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정치적인 난민이 아니라 불법체류자인 셈인 것이다.

기획망명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 자녀와 생이별하고, 일자리를 구해 일하다 중국공안에 체포된다. 중국공안의 눈에는 모든 탈북자들이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만나보았던 중국 정착형과 북조선 귀환형 탈북자들은 하나같이 기획망명을 주도한 한국인과 이에 동조한 탈북자들을 크게 원망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행을 원하는 탈북자들 또한 대부분 중국공안의 단속을 피해 한국에서 안전하게 국적을 얻어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유혹하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가는 방법이 예전처럼 어렵지 않은데다가 기획망명을 하는 모집책이나 탈북 브로커 등의 권유, ‘후불제’라는 말에 한국행을 선택하게 된다.

또한 북조선에서 관대하게 처벌 없이 받아준다면 다시 돌아갈 의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58%가 귀향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이유는 “고향, 조국, 자식과 가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국 정부도 매우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9월 27일, 중국 상하이 국제학교에 진입했던 탈북자 9명이 미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중국공안으로 넘겨졌던 사실이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탈북자의 인권보호는 물론, 미국망명까지 허용하겠다고 나선 미국이 자국시설에 진입한 탈북자들을 문전박대하여 중국공안으로 인계했다는 사실은 탈북자 모두가 난민이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2002년 5월 중국 선양 주재 미국영사관에 진입한 탈북자 3명도 당초 미국행 의사를 밝혔지만, 영사관측이 미국행을 주장할 경우 중국 공안에 인계하겠다는 입장을 취해 결국 탈북자들은 한국으로 행선지를 바꾼 바 있었다. 미국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이다.

이처럼 미국은 앞으로도 일반 탈북자의 인권보호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보가치가 높은 탈북자에게만 망명을 허용할 뿐, 일반 탈북자들은 한국정부가 떠안아야 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결국, ‘북한인권법’의 최대 수혜자는 탈북자들이 아닌, 탈북 문제를 이슈화하기에만 급급한 탈북지원 NGO단체일 뿐이다. 그들은 브로커들과 함께 북조선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기획탈북 대열에 합류시키기 위해 열을 올릴 것이다. 물론 그 뒷감당은 한국 정부가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탈북자들의 인권문제 보다는 탈북자 자체를 양산하기에 여념 없는 미국과 탈북 브로커의 꼬리는 자르지 못한 채 애꿎은 탈북자들만 잡아가두기에 바쁜 중국 당국의 합작은 ‘불법 체류자’들만 무더기로 양산할 따름이다.

 

2004년 11월 15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4. 현대성의 자기 파괴 - 꿈에서 깨어나기

새로움은 현대의 영웅이다. 영웅을 기다리듯 사람들은 새로움을 기다린다. 19세기 아케이드의 산책자는 새로움의 구원을 기다린다. 20세기의 파리는 19세기의 아케이드를 공동화시키고 낡은 것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벤야민은 19세기로의 이동을 통해 20세기가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린 아케이드는 새로움에 대한 신화로 가득 찬 공간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벤야민은 새로움에 대한 신화가 초래하는 꿈에서 깨어난다. 새로움에 대한 신화가 바로 현대의 신화를 구성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꿈에서 깨어난다. "새로움, 새로움에의 의지, 새로움은 결국에는 어떤 음식보다도 더 필수적인 것이 될 자극적인 독 중의 하나이다. 일단 그 독소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나면, 언제나 그렇듯이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이 되게 그 양을 늘려야 한다. 사물들의 무상함, 즉 정확히 말해 사물들이 지니는 새롭다는 특징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이 이상하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깨어남의 기술을 위한 시도"이다. "프루스트가 삶의 이야기들을 깨어남을 계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역사 또한 깨어남과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사실 역사는 그것 이외의 다른 것을 다루지 않는다. 역사는 19세기로부터의 깨어남을 다룬다."


19세기의 부르주아의 기념물 아케이드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아케이드의 폐허화는 19세기 부르주아의 신화의 해소이다. 해소된 신화는 새로움과 진보에 대한 광신이다. 19세기 부르주아 시대의 유물로 거기 남아 있는 공동화된 아케이드는 자기 파괴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케이드를 가득 채운 것은 새로움에 대한 신화이다. 바로 아케이드는 자신이 품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신화에 의해 폐허가 될 수밖에 없었다. 폐허가 된 아케이드는 새로움에 대한 현대적 신화의 자기 파괴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새로움에 대한 신화적 갈망에 의해 만들어지는 현대의 신화가 해소될 때 현대의 소진점이 발견된다. 소진점의 발견은 "역사가 일단 상품 생산 사회에 이르면 더 이상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이룩할 수 없고 유행처럼 겉모습이 변한다고 해도 늘 똑같이 열악한 세계 상태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경험에 기반을 둔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두 번째 연구계획서를 불어로 재작성하면서, 벤야민은 독일어 판에는 없었던 결론을 추가했다. 그 결론은 블랑키Blanqui의 [천체를 통한 영원]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19세기 사람들이여, 우리의 환영들이 출몰하는 시간은 영원히 고정되고, 항상 똑같은 상태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네." [천체를 통한 영원]에서 블랑키는 역사 자체의 환영이란 다름 아닌 진보의 이미지였다는 것을 추적한다. 진보의 이미지는 사실 반복에 대한 알리바이이다. "우주는 무한대로 스스로를 반복하며 제자리에서 발만 긁어댄다. 무한은 동일한 틀에 박힌 것을 한치 빈틈없이 무한히 반복한다." 벤야민은 블랑키의 모습 속에서 보들레르의 <일곱 노인>이 예고하고 있는 현대성으로 돌입하고 있는 우주 전체를 발견한다. 보들레르는 "도깨비가 대낮에도 행인을 잡아끄는, 북적거리는 도시, 꿈들로 가득 찬 도시!"에서 일곱 노인을 발견한다. "난데없이 한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비 머금은 하늘 빛깔을 닮은 누런 누더기에, 그 눈에 번득이는 심술만 없어도, 동냥을 빗발치게 했을지도 모를 그런 몰골로" 초라한 노인의 모습 속에서 보들레르는 '영원함'을 발견한다. "나와 똑같은 소름이 끼치지 않는 사람은 잘 생각해 보라. 그 흉측스러운 일곱 괴물이 비록 그토록 늙어빠지긴 했어도 뭔가 영원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초라한 노인의 모습에서 영원함을 발견한 보들레르처럼 벤야민은 19세기의 유물 아케이드에서 영원함을 발견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후기 단계에서 현대성의 신화학은 꿈꾸는 집합체가 아니라, 반복 물화와 진보의 개념이 빚어내는 새로운 구도에 의해 구체화된다. 도시 인상학의 초점 이동 - 집합적 꿈과 꿈에서 깨어남에 내재한 신비주의적 요소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후반에 와서 보다 계급적이고 물질적인 개념틀로 바뀐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도시 인상학에 고무되어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후기에 와서 벤야민의 도시 인상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기획에서 점차 멀어져, 대도시의 야만을 벗겨내는 정치학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대도시의 야만을 벗겨내는 정치학은 그의 마지막 논문인 <역사의 개념에 관한 테제>에서도 드러나듯이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실천과 거리를 둔다. <역사의 개념에 관한 테제>는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역사유물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역사주의'와 역사유물론은 진보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벤야민이 보기에 진보에 대한 신뢰와 현대성의 신화는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신화를 다시 탈신화하려는 벤야민의 도시 인상학의 종착점은 메시아적 구제에 대한 믿음이다. 메시아적 순간은 진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는 반복 동일적 시간에 의해 구성된 역사적 시간에 종말을 가져온다. 따라서 도시 인상학의 정치학은 파리의 바리케이드전에서 시계탑을 공격했던 군중처럼 도시에서 반복동일성에 의해 지배받는 시간의 축적에 빚어내는 신화를 공격하며, 신화적 시간을 종식시킬 메시아적 순간을 향한다. "투쟁의 첫날밤에 파리의 여러 곳에서 상호간에 아무런 관련도 없이 독자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시계탑에 총격이 가해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아마 시의 압운에 힘입어 그의 통찰력을 획득했다고 생각되는 이 사건의 어느 증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누가 믿을 것인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모든 시계탑 밑에 서 있던 새로운 여호수아가 마치 시간이 못마땅하기라도 하듯이 시계판에 총을 쏘아 시간을 정지시켰다고 한다." 그 순간은 언제 오는가? 그 순간을 누가 오게 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을 벤야민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우리가 대답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 참고문헌

Adorno, Theodor W., Charakteristik Walter Benjamins, in: Theodor W. Adorno Gesammelte Schriften, Bd. 10-1, Suhrkamp, 1977, 249.
Baudelaire, Charles, La spleen de Paris, 윤영애(역), [파리의 우울], 민음사, 1979.
Baudelaire, Charles, The Painter of modern life and other essays, Phaidon, 2001.
Baudelaire, Charles, 박은수(역), [보들레르 시선집], 민음사, 1995.
Benjamin, Walter, 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 박설호(역), [베를린의 유년시절], 솔, 1992.
Benjamin, Walter,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in: Gesammelte Schriften Bd. I, Suhrkamp, Frankfurt a.M., 1991.
Benjamin, Walter, Das Paris des Second Empire bei Baudelaire, in: Gesammelte Schriften Bd. I, Suhrkamp, Frankfurt a.M., 1991.
Benjamin, Walter, Das Passagen-Werk, in: Gesammelte Schriften Bd. V, Suhrkamp, Frankfurt a.M., 1991.
Benjamin, Walter,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in: Gesammelte Schriften Bd. I, Suhrkamp, Frankfurt a.M., 1991.
Benjamin, Walter, Zentralpark, in: Gesammelte Schriften Bd. I, Suhrkamp, Frankfurt a.M., 1991.
Benjamin, Walter, Ue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in: Gesammelte Schriften Bd. I, Suhrkamp, Frankfurt a.M., 1991.
Benjamin, Walter, Ueber einige Motive bei Baudelaire, in: Gesammelte Schriften Bd. I, Suhrkamp, Frankfurt a.M., 1991, 반성완(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Bohrer, Karl Heinz, Walter Benjamins Stadt. Labyrinth zwischen Ereignis und Interieur, in: Die Grenzen des Aesthetischen, Hanser, Muenchen, 1998.
Bolz, N. & Reijen, Willen van, Walter Benjamin, 김득룡(역), [발터 벤야민], 서광사, 2000.
Buck-Moss, Susan, Dialektik des Sehens. Walter Benjamin und das Passagen-Werk, Suhrkamp, Frankfurt a.M., 1993.
Gilloch, Gareme, Myth and Metorpolis. Walter Benjamin and the City, Polity Press, 1996.
Michael Opitz/Erdmut Wizisla, Benjamins Begriffe, Suhrkamp, Frankfurt a.M., 2000.
Missac, Pierre, Walter Benjamins Passage, Suhrkamp, Frankfurt a.M., 1991.
Witte, Bernd, Walter Benjamin, 윤미애(역), [발터 벤야민], 한길사, 2001.
Heinz Bruegemann, Passagen, in: Michael Opitz/Erdmut Wizisla, Benjamins Begriffe, Suhrkamp, Frankfurt a.M., 20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3. 아케이드와 현대성의 신화

벤야민은 파리라는 도시를 사실주의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벤야민에게 파리는 초현실주의적 세계이다. 벤야민은 [파리의 촌뜨기Le Paysan de Paris]에 나오는 오페라 가에 대한 아라공Aragon식 묘사에 의존하여 아케이드를 다루어보려는 충동을 느낀다. 파리는 물질적 도시가 아니라, 환각이 공간화된 도시이다. "황제와 장관들은 파리를 프랑스의 수도로 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도로 만들기를 원했다." 소비의 수도이자 백화점이며, 특히 쇼핑 상가이기도 한 파리는 환각의 구체화이다. "파리는 자본주의의 전성기에 등장한 바빌론의 재림으로서, 현대의 바빌론으로서 소비와 사치의 천국이다." 19세기의 수도 파리는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19세기의 수도 파리는 확장된다. 환각의 공간으로 19세기 세계 수도 파리는 아케이드가 소멸한 20세기에도 계속된다.


아케이드는 시각적 경험의 장소이다. 도시는 인간의 감각기관 중에서도 시각을 자극하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이다. 보들레르는 콩스탕탱 기에게 바치는 [파리의 꿈]이라는 시에서 파리를 이렇게 노래했다. "인간은 일찍이 본 일도 없는, 그 무서운 경치의, 어렴풋하고 먼 이미지가, 오늘 아침에도 나를 홀린다 … 계단들과 아케이드들의 바벨탑, 그것은 광 없거나 광나는 금속으로 떨어지는 분수와 폭포들로 가득 찬, 하나의 끝없는 궁전이었으니 … 또 그 움직이며 바뀌는 불가사의들 위엔 영원한 고요가 감돌고 있었으니 (무시무시한 새로움! 모두가 눈요기! 귀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구나"(http://www.aladin.co.kr/blog/mypaper/462906 - nowave)


대도시는 대도시의 군중에게 끊임없는 시각적 자극을 제공하고, 시선을 잡아당기는 유혹을 제공한다. 시각적 자극은 대도시 내에서는 일상화된 자극이 된다. 벤야민은 [일방통행로Einbahnstrasse]에서 서술의 형식으로 실험했던 사유-이미지Denkbilder의 방법을 '아케이드 프로젝트'에도 적용하고자 하였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그를 괴롭혔던 문제는 도시의 인상학에 적당한 문학형식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도시에 관한 인상학적 분석의 서술이 도시의 모습을 닮기를 바랬다. 도시경험의 특성을 벤야민은 시각성의 전면배치에서 찾는다. 아케이드는 시지각이 전면에 배치되는 대표적 공간이다. 시각적 공간에서 펼쳐진 것들을 다시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벤야민은 아라공의 초현실주의적 방법에 기댄다. 그는 "시각-공간Visionsraum에서 구름과 같은 분위기, 구름처럼 변하는 사물"들 속에서 현대성을 발견하려 한다. 따라서 그가 선택했던 방법은 인상학의 몽타주였다.

아케이드는 초현실주의적 꿈으로 산책자를 이끄는 시각-공간이다. 아케이드에서는 새로운 상품의 유혹들이 펼쳐진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에서 제기하는 아우라 상실테제는 도시경험에 걸 맞는 서술형식을 찾으려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난제와 연결된다. 아우라의 상실은 예술작품을 둘러싼 담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아우라 상실로 인한 새로운 지각방식이 도시경험의 핵심이다. "역사의 거대한 여러 시대들 내부에서는 인간집단의 모든 존재방식과 더불어 의미를 지각Sinneswahrnehmung하는 방법도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의미 지각이 조직화되는 종류와 방법, 지각이 이루어지는 매체는 자연적으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성격이 규정된다."


아우라 상실 테제는 미학적 담론을 넘어서 현대 사회의 출현에 의한 사회적 변동과 이에 따른 도시인들의 지각구조의 변화에 대한 주목을 내포하고 있다. "지각의 매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아우라의 붕괴Verfall der Aura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붕괴현상의 사회적 조건들을 제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실체적 특성이 아니다. 아우라는 지각의 주체와 지각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험에 대한 지칭일 뿐이다. 즉 아우라는 특정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맺는 사물과의 모든 관계에서 경험되는 현상이다. 아우라에 관한 벤야민의 예외적인 정의인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먼 것의 일회적인 나타남"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 아우라는 한 지각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대상을 지각하는 인간의 경험을 지칭한다. 벤야민이 예로 들고 있는 자연적 대상에서 발생하는 아우라는 자연을 지각하는 주체에게 발생하는 숭고의 경험에 대한 표현이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우라를 예술작품의 실체적 특성으로 해석할 경우, 아우라 소멸 테제는 기술복제의 환경에서 예술작품의 지위와 속성들의 변천을 지적하는 테제로 한정적으로 해석되지만, 우리가 아우라를 지각의 주체와 지각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론의 문제로 볼 경우, 아우라 소멸 테제는 예술작품의 성격변화에 관한 담론을 넘어서서 현대성이 관철되고 있는 사회에 대한 해석 테제로 확장될 수 있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의 소멸을 발생시키는 두 가지 사회적 조건을 제시한다.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오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군중이 바라 마지않는 열렬한 욕구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군중은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먼 것의 일회적인 나타남"으로 사물을 아우라적으로 경험하던 지각방식은 사물을 가까이에 두고, 가까이 두는 것을 통해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현대적 군중의 탈 아우라적 지각에 의해 대체된다.


도시는 기술복제를 가능하게 하는 현대적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환경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뿐만 아니라, 도시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인간이 도시적 풍경(지각 대상)을 지각하는 방식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의 문제는 바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연결시켜주는 핵심적 모티브로 작동한다. 충격이 일상화되고 아우라가 소멸되면, 소멸된 아우라 위에 재등장하는 컬트적 가치는 스펙타클을 완성한다. 도시의 건축물, 도시의 상점들이 제공하는 물건들은 꿈의 실현에 대한 약속이다. 산책자는 아케이드의 시각적 공간에서 환각 경험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자기를 상실하고 산책자의 주체는 환각 속에서 해소된다. 아케이드를 환각으로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아케이드는 이미지의 공간으로 변환된다. 이미지의 공간 아케이드는 '창문 없는 모나'로 변환된다. 모나드인 아케이드는 세계와 동일하다. "아케이드는 모나드의 이미지이며, 도시의 이미지이자 동시에 작은 것 속의 세계이다."


상품들은 새로움에 대한 신화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새로움에 대한 신화는 반복동일성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새로운 것은 또 다른 새로운 것에 의해 교체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의 무한 운동으로 보이는 상품의 순환은 동일성의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그것은 현대성이 만들어내는 새로움의 신화 속에 되풀이되는 반복동일성이다. 19세기의 아케이드의 산책자들은 상품을 구경하기 위해 나섰다. 아케이드의 산책자는 상품의 홍수에 직면하며, 그것들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 속에서 아케이드를 거닌다. 산책자는 자신은 단지 상품을 구경하는 구경꾼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상품을 구경하는 동안 스스로 자신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아케이드의 가장 훌륭한 상품은 산책자가 구경하는 상품이 아니라 바로 산책자였다. "보들레르는 작가의 진정한 상황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산책자가 되어 시장에 간다. 그는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벌써 구매자를 찾고 있다."


상품의 세계인 도시는 꿈의 풍경을 연출한다. 도시는 집합적 꿈이 실현된 장소이다. 도시의 건축물, 도시의 상점들이 제공하는 물건들은 꿈의 실현이며, 꿈에 대한 약속이다. 도시풍경은 꿈의 풍경이다. "도시에 들어온 자는 자신이 꿈의 그물망 안에, 아득히 먼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오늘 발생한 사건에 병합하는 꿈의 그물망에 들어온 것처럼 느낀다."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은 꿈의 시각이어야 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꿈의 시선에 의한 아라공의 초현실주의적 파리 인상기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라공으로부터 거리를 두려한다. "아라공이 꿈의 영역만을 고집하는 반면 이 연구([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각성의 구도들이 발견되어야 한다. 아라공은 인상주의적 요소 즉 신화에만 머물러 있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적 공간 속에서 신화의 해소이다. 신화의 해소는 있어왔지만 의식하지는 못했던 것을 일깨우는 것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아케이드의 꿈에 머물러 있는 아라공과 달리 벤야민은 19세기에 대한 기억작업을 통해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 즉 현대의 신화를 해소하는 구원의 희망을 펼쳐낸다. 영락한 19세기의 아케이드 속에서 벤야민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일깨우는 방법"을 통해 20세기에 꿈에 취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깨우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 아케이드와 19세기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가는 여정에는 벤야민의 또 다른 도시 읽기인 1932년의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이 있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외적인 사건Ereignis은 내부Interieur로 흡수된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벤야민은 유년시절의 사적 체험을 통해 내부로 몰입한다. 그가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사적 사건들을 은유적으로 사회적 사건들과 연결시키고 있긴 하지만,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사회학적 요소는 희미하게 나타난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달리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는 대도시 군중의 집합적 기억kollektive Erinnerung이 단연 부각된다. 개인적 경험에서 집합적 기억으로의 이동은 한 도시에 대한 인상학이 사회학으로부터 멀어졌던 것([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사회학으로 다시 이동하는 것('아케이드 프로젝트')을 보여준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군중의 이미지는 찾기 힘들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는 성인 벤야민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한다. 하지만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지 모티브>를 전환점으로 파리의 공간 속에 압축된 시간을 끄집어내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벤야민은 군중 속의 벤야민이다.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위치 설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보들레르와 군중의 관계이었다. 보들레르는 대도시 군중과의 접촉, 그리고 대도시 군중이 그에게 던져준 충격을 통해 사적 체험에 의해 도시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벗어난다. 보들레르는 집합적 군중을 통해 도시를 파악한다. "여기서 말하는 군중이란 다름 아닌 행인들이라는 무형의 무리, 거리의 군중을 가리킨다. 보들레르가 늘 잊지 않고 염두에 두었던 이들 군중은, 그의 어느 한 작품에서도 모델로서 이용되고 있는 적은 없지만 그의 창작에 있어 숨겨진 인물로 깊이 작용하고 있으며....그가 결투를 하면서 가하는 충격들은 그에게 그 무리들 속을 뚫고 나아갈 길을 열어 주기 위한 것이다."

보들레르가 잠행하는 왕자로 보았던 콩스탕탱 기Constantin Guy의 모습은 바로 아케이드에서 산책하는 군중들을 회상하는 벤야민 자신이다. 콩스탕탱 기는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도시 속에서의 놀라운 삶의 조화, 혼란스러운 인간의 자유 속에서도 하늘의 섭리로 유지되는 조화에 놀라서 감탄한다. 그는 거대한 도시의 풍경, 안개가 쓰다듬고 햇살이 따갑게 후려치는 돌들의 풍경을 관망한다." 콩스탕탱 기는 파리를 걷고, 달리면서 찾는다. "그는 무엇을 찾는가? 내(보들레르)가 지금까지 묘사한 이 사람(콩스탕탱 기), 활발한 상상력을 갖고 늘 거대한 인간들의 사막을 횡단하며 여행하는 이 고독한 사람은, 순수한 산책자의 목적보다 더 높은 목적을, 그리고 상황의 덧없는 즐거움과는 다른 보다 보편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는 여러분들이 허락한다면 내가 현대성이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을 찾는다." 현대성을 도시에서 찾아내는 보들레르가 찬양했던 콩스탕탱 기의 궤적을 벤야민은 따라간다. 그는 상품의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환상, 착시 - nowave)에 매혹되어 있는 군중 안에서 군중들을 조롱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면서 아케이드에 새겨져 있는 현대성의 흔적을 발견하려 한다.


산책자 벤야민은 지금 아케이드 안에 있다. 그는 아케이드를 산책하는 또 하나의 군중이 되어 다른 군중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19세기 부르주아 시대의 기념비 아케이드는 20세기 현대적 파리 속에 유물처럼 남아있다. 유행과 판매의 중심지였던 아케이드는 낡고 영락하여 공동(空洞)이 되어버렸다. 아케이드는 부르주아 시대의 유물이다. 20세기의 파리를 산책하면서 19세기 부르주아 시대의 유물을 바라보는 벤야민에게 19세기의 공간 아케이드로 들어가는 것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현재를 인식하려는 벤야민의 독특한 역사해석 방법의 적용이다. <역사의 개념에 관한 테제Ue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에서 벤야민은 과거의 이미지는 기억의 이미지임을 지적한다. "인식의 순간에 휙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이미지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기억의 이미지에 해당한다. 이 이미지는 위험의 순간에 처한 사람들에게 떠오른 그들 자신의 고유한 과거의 이미지들과 유사하다. 알다시피 이 이미지들은 무의지적으로 나타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역사 또한 무의지적 기억memoire(아마 두 번째 철자 e 위에 악쌍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출력물에는 m과 m 사이에는 빈 공간이다. - nowave) involontaire(내가 보고 있는 출력물에는 in이 빠져 있는데, 아마도 오타인 듯. in이 없으면 정반대의 의미, 즉 의지적 기억이라는 뜻이 된다. - nowave)에서 출현한 이미지이다."


아케이드는 벤야민을 20세기에서 19세기로 이동시킨다. 아케이드의 입구에서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과 꿈꾸고 있는 현재에서 메시아적 각성의 상태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기억작업이 시작된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19세기의 공간 아케이드로 들어가는 과정을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통해 성인이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산책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변신이 일어난다. 거리는 산책자를 사라진 시간으로 이끈다. 그는 거리를 따라 어슬렁거린다 … 길은 산책자를 어머니에게 이끌지는 않지만, 그를 과거로 데려간다. 그 과거로 깊게 가면 갈수록 그 과거는 사적인 과거가 아니다."


아케이드는 19세기의 현상이었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기술이 출현한 20세기에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은 19세기 세계 수도로서의 파리에 주목했다. 그는 19세기의 화려했던 시절을 낭만적으로 그리워하는 회고주의자였을까? 벤야민에게 19세기와 20세기의 시간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19세기와 20세기를 관통하는 동일성을 보았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연구계획서로 작성된 <19세기 세계수도로서의 파리>는 뒤캉Du Camp의 인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역사는 야누스와 같다. 두 얼굴을 가진 것이다. 과거를 보든 아니면 현재를 보든 동일한 사물들을 본다."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를, 20세기 속에서 19세기를 찾아낸다. "역사는 어떤 구성이나 구조물의 대상인데, 이 구조물이 설 장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현재시간Jetztzeit에 의해 충만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로에게는 고대의 로마는 현재시간에 의해 충전된 과거였다. 프랑스 혁명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이해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고대의 로마를, 마치 유행이 지나간 의상을 기억에 떠올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하고 회상시켰다."


백화점이 등장하자 쓸쓸히 퇴장하는 아케이드는 19세기에는 최신의 시설을 자랑하는 꿈의 동산이었다. "아케이드는 사치품 판매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아케이드를 꾸미지 위해 예술은 상인들에게 봉사하게 되었다. 동시대인들은 지치지 않고 아케이드에 대한 찬사를 퍼부어 댔다. 이후 아주 오랫동안 그것들은 여행객들을 매혹시키게 된다. 그림으로 보는 파리 안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업의 사치를 위해 최근에 발명된 이 아케이드들의 지붕은 유리로 씌어지고, 대리석 벽으로 된 통로들이 건물의 모든 구역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 아케이드의 소유주들이 이처럼 엄청난 대모험을 위해 힘을 합쳐 이 시설을 만든 것이다. 천장에서 빛을 받는 아케이드의 양측에는 극히 호화스러운 가게들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이 아케이드는 하나의 도시, 축소된 세계가 된다. 최초로 가스로 조명을 하려고 했던 것도 이 아케이드 안에서였다."


19세기 최신 테크놀로지가 시각화된 공간이었던 아케이드는 백화점의 등장과 함께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아케이드의 급속한 부상과 부상만큼이나 재빠른 소멸은 현대성이 만들어내는 '새로움'의 신화가 자기 파괴되는 알레고리이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연구계획서에서 벤야민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졸저의 조사는 이처럼 문명을 물상화해서 표상하게 된 결과, 19세기부터 유래한 새로운 형태의 행동들 그리고 경제와 기술에 기반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물들이 어떻게 환영들의 우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아케이드에서 출현한 판타스마고리아는 20세기에도 지속된다. "시장의 환영에 자신을 맡기는 산책자의 경험"은 19세기와 20세기 사이의 시간적 격차를 증발시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현대성: 발터 벤야민의 도시인상학


1. 파리, 보들레르와 벤야민

완성되지 않았기에 전설이 되는 저서들이 있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Das Passagen-Werk]가 그러한 책 중의 하나이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말년까지 몰두했지만 죽음 때문에 완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1950년 아도르노의 벤야민 평전 [발터 벤야민의 특성Charakteristik Walter Benjamins]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이후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추측이 나돌았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미완성 유고가 1982년 벤야민의 [전집Gesammelte Schriften] 제 5권으로 출판되어 세상에 나타났지만,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신비감은 종식되기는커녕 강화되었다. 출간된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체계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메모와 단상의 형태로 벤야민이 남긴 기록을 모은 덩어리뿐이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저작이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몰두했던 연구 주제와 동의어이다. [전집]의 편집자가 지적하듯 벤야민은 1927년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구상한 이후 그가 사망하던 1940년까지 정열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벤야민이 1927년에서 1940년 사이에 작성한 주요 논문들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이 시기의 논문들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모두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벤야민의 거대 계획의 완성을 향한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 결과물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건물을 짓기 위해 벤야민이 모아놓은 재료들만이 남아있다. 우리는 그 재료들이 조합되면 어떠한 외양을 지닐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마 벤야민 또한 자신이 짓고 있는 건물의 모습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모아둔 재료들 더미 앞에서 한숨을 쉬면서, 이 재료들을 어떻게 가공하여 건물을 완성할 것인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는 재료들만을 모아놓고 사망했다. 벤야민이 모아 놓은 건축재료로 집을 짓는 것은 해석자의 몫이다. 미완성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한편으로 해석의 괴로움을 남겨주지만, 동시에 해석이 생산이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도록 해주는 미덕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해석적 창작은 벤야민의 프로젝트 기획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석적 창작을 위해 벤야민이 모아둔 재료 덩어리를 통해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건물이 벤야민의 원래 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건축물이 되기 위해서는 벤야민의 청사진을 파악해야 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건축을 위한 청사진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1927년에서 1940년 사이의 벤야민의 저작 사이의 긴밀한 내적 연관성을 해독할 때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출간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한정시켜 보면, 우리는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파리에 관한 인상학적 연구로 기획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추측은 절반만 타당하다. 파리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무대임은 확실하지만, 프로젝트를 통해 벤야민이 추적하는 바는 파리에 관한 인상기가 아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연구계획서에서 채택한 제목, "19세기의 세계수도로서의 파리Paris, die Hauptstadt des XIX. Jahrhunderts"는 그가 아케이드의 인상학Physiognomie적 독해를 통해 무엇을 파악하려고 했었는지를 잘 표현해준다. 벤야민은 파리를 통해서 19세기의 현대성을 규명하려 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인상학적 분석을 넘어서, 19세기라는 역사적 시간 속의 현대성 형성에 관한 연구서이다.

벤야민은 도시풍경을 인상학적으로 분석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알레고리를 해독하려는 충동을 보들레르Baudelaire로부터 물려받았다. 이런 측면에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보들레르의 연장이다. 보들레르의 중요성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묶음 J로 분류되어 있는 보들레르 연구의 양적 비중에서도 확인된다.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모델로 삼았다. 따라서 벤야민의 보들레르 연구 논문인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제2제정기의 파리Das Paris des Second Emire bei Baudelaire>와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지 모티브Ueber einige Motive bei Baudelaire>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독해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에서 대도시를 서정적 산문으로 변환시키고 싶은 유혹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조그만 고백하나를 해야겠소 … 아주 묘하게도 회화적인 옛날 생활의 그림에 그가 적용시킨 방법을 현대 생활의, 아니 차라리 더욱 추상적인 현대의 어떤 생활의 묘사에 적응시켜 보자는 의도 말입니다. 우리들 중 누가 한창 야심만만한 시절, 이 같은 꿈을 꾸어보지 않은 자가 있겠습니까?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움직임과 상념의 물결침과 의식의 경련에 걸맞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면서 동시에 거친 어떤 시적 산문의 기적의 꿈을 말이요. 이 같이 집요한 이상이 태어난 것은 특히 대도시들을 자주 드나들며 이들 도시의 무수한 관계에 부딪치면서부터입니다. 나의 친애하는 친구, 당신 자신도 째지는 듯한 유리 장수의 소리를 샹송으로 번역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었나요? 이 소리가 거리의 가장 높은 안개를 가로질러 다락방에까지 보내는 모든 서글픈 암시들을 서정적 산문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던가요?"

보들레르가 대도시를 서정적 산문으로 번역하려 하였다면, 벤야민은 아케이드를 현대성 이론으로 번역하려 한다. 벤야민에게 도시는 19세기의 소우주이며, 아케이드는 19세의 소우주인 도시의 모나드이다. 도시는 현대적 사회·경제구조의 특성을 포괄하는 공간이다. 대도시는 인간이 행위 하는 무대이며, 이 무대 위에 인간은 흔적을 남긴다. 도시의 인상학자 벤야민은 도시라는 공간 속에 숨어 있는 현대성의 원사Urgeschichte의 흔적을 찾아내는 고고학자이자 탐정이다.

도시 인상학자이자 탐정인 벤야민은 아케이드라는 파리의 모나드 속에서 현대성의 알레고리Allegorie를 발견하려 한다. 보들레르도 [악의 꽃 Les fleures du mal]을 통해 파리의 풍경에서 알레고리를 발견하려 한다. "파리는 변해요! 한데 울적한 내 마음속에서는 움직인 게 하나도 없군요! 새 궁전들도, 비계들도, 돌덩이들도, 낡은 변두리들도, 모두가 내게는 알레고리로 바뀌나, 그리운 옛 생각들이 바위보다도 더 무겁군요." 파리를 바라보는 보들레르의 우울한 응시는 벤야민의 [독일비극의 기원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을 관통하는 바로크적 세계관의 핵심을 구성하는 멜랑콜리Melancholie의 시선과 동일하다.

벤야민은 알레고리에 대한 통찰은 "사물들의 무상성Vergaenglichkeit"에 대한 통찰이며, 이들을 영원으로 구원하려는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알레고리적 통찰은 영원함에서 무상성을 발견하며, 무상함이 역설적이게도 영원히 반복됨을 인식한다. 즉 알레고리는 영원함과 무상성이라는 대립적인 힘들이 빚어내는 구도Konstellation의 형상이다. 알레고리는 아름다움이 풍기는 영원함의 가상을 파괴하려는 해체의 시도이자 동시에 무상성에 대한 경험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벤야민에게 알레고리는 절대화에 대한 도전의 표현이다. 알레고리는 개념의 추구가 아닌 상상력의 자유를 즐긴다. 왜냐하면 알레고리는 동일성이 아닌 양의성과 다의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알레고리는 의미의 동요를 추구한다. 그래서 벤야민은 독일비극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의미의 순수성과 통일성에 대한 저항"인 알레고리야말로 바로크의 긍지라 했다. "알레고리는 건설과 파괴, 희망과 슬픔, 미몽과 각성, 실재와 허구간의 긴장을 분절해낸다."

[독일비극의 기원]에서 출발한 무상성에 대한 통찰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까지 이어진다. 벤야민은 19세기의 아케이드를 19세기 부르주아 사회의 알레고리로 파악하고, 이 알레고리를 해독하려 한다. 알레고리를 해독하기 위해 벤야민은 보들레르가 [현대적 삶의 화가]에서 주장했던 보들레르의 현대성 개념을 받아들인다. 보들레르는 무상성과 영원성의 결합을 현대성이라 불렀다. "현대성이란 일시적인 것, 순간적인 것, 우연한 것으로 예술의 반을 이루고, 나머지 반은 영원한 것, 불변의 것이다." 보들레르에게 현대성은 화해할 수 없는 반립들의 구도이다. 벤야민은 19세의 수도 파리에서 무상성과 영원성 사이의 반립의 흔적을 찾아낸다. 그에게 아케이드는 반립으로 구성된 19세기의 부르주아 사회의 알레고리이다. 19세기의 현대성은 반립적 힘들의 구도로 등장하며, 알레고리 형상으로 현대성이 형성되는 아케이드는 따라서 역사를 지속적인 발전과 진보로 파악하려는 '역사주의'의 역사철학이 해체되는 현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