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케이드와 19세기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가는 여정에는 벤야민의 또 다른 도시 읽기인 1932년의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이 있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외적인 사건Ereignis은 내부Interieur로 흡수된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벤야민은 유년시절의 사적 체험을 통해 내부로 몰입한다. 그가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사적 사건들을 은유적으로 사회적 사건들과 연결시키고 있긴 하지만,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사회학적 요소는 희미하게 나타난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달리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는 대도시 군중의 집합적 기억kollektive Erinnerung이 단연 부각된다. 개인적 경험에서 집합적 기억으로의 이동은 한 도시에 대한 인상학이 사회학으로부터 멀어졌던 것([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사회학으로 다시 이동하는 것('아케이드 프로젝트')을 보여준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군중의 이미지는 찾기 힘들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는 성인 벤야민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한다. 하지만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지 모티브>를 전환점으로 파리의 공간 속에 압축된 시간을 끄집어내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벤야민은 군중 속의 벤야민이다.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위치 설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보들레르와 군중의 관계이었다. 보들레르는 대도시 군중과의 접촉, 그리고 대도시 군중이 그에게 던져준 충격을 통해 사적 체험에 의해 도시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벗어난다. 보들레르는 집합적 군중을 통해 도시를 파악한다. "여기서 말하는 군중이란 다름 아닌 행인들이라는 무형의 무리, 거리의 군중을 가리킨다. 보들레르가 늘 잊지 않고 염두에 두었던 이들 군중은, 그의 어느 한 작품에서도 모델로서 이용되고 있는 적은 없지만 그의 창작에 있어 숨겨진 인물로 깊이 작용하고 있으며....그가 결투를 하면서 가하는 충격들은 그에게 그 무리들 속을 뚫고 나아갈 길을 열어 주기 위한 것이다."
보들레르가 잠행하는 왕자로 보았던 콩스탕탱 기Constantin Guy의 모습은 바로 아케이드에서 산책하는 군중들을 회상하는 벤야민 자신이다. 콩스탕탱 기는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도시 속에서의 놀라운 삶의 조화, 혼란스러운 인간의 자유 속에서도 하늘의 섭리로 유지되는 조화에 놀라서 감탄한다. 그는 거대한 도시의 풍경, 안개가 쓰다듬고 햇살이 따갑게 후려치는 돌들의 풍경을 관망한다." 콩스탕탱 기는 파리를 걷고, 달리면서 찾는다. "그는 무엇을 찾는가? 내(보들레르)가 지금까지 묘사한 이 사람(콩스탕탱 기), 활발한 상상력을 갖고 늘 거대한 인간들의 사막을 횡단하며 여행하는 이 고독한 사람은, 순수한 산책자의 목적보다 더 높은 목적을, 그리고 상황의 덧없는 즐거움과는 다른 보다 보편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는 여러분들이 허락한다면 내가 현대성이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을 찾는다." 현대성을 도시에서 찾아내는 보들레르가 찬양했던 콩스탕탱 기의 궤적을 벤야민은 따라간다. 그는 상품의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환상, 착시 - nowave)에 매혹되어 있는 군중 안에서 군중들을 조롱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면서 아케이드에 새겨져 있는 현대성의 흔적을 발견하려 한다.
산책자 벤야민은 지금 아케이드 안에 있다. 그는 아케이드를 산책하는 또 하나의 군중이 되어 다른 군중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19세기 부르주아 시대의 기념비 아케이드는 20세기 현대적 파리 속에 유물처럼 남아있다. 유행과 판매의 중심지였던 아케이드는 낡고 영락하여 공동(空洞)이 되어버렸다. 아케이드는 부르주아 시대의 유물이다. 20세기의 파리를 산책하면서 19세기 부르주아 시대의 유물을 바라보는 벤야민에게 19세기의 공간 아케이드로 들어가는 것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현재를 인식하려는 벤야민의 독특한 역사해석 방법의 적용이다. <역사의 개념에 관한 테제Ue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에서 벤야민은 과거의 이미지는 기억의 이미지임을 지적한다. "인식의 순간에 휙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이미지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기억의 이미지에 해당한다. 이 이미지는 위험의 순간에 처한 사람들에게 떠오른 그들 자신의 고유한 과거의 이미지들과 유사하다. 알다시피 이 이미지들은 무의지적으로 나타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역사 또한 무의지적 기억memoire(아마 두 번째 철자 e 위에 악쌍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출력물에는 m과 m 사이에는 빈 공간이다. - nowave) involontaire(내가 보고 있는 출력물에는 in이 빠져 있는데, 아마도 오타인 듯. in이 없으면 정반대의 의미, 즉 의지적 기억이라는 뜻이 된다. - nowave)에서 출현한 이미지이다."
아케이드는 벤야민을 20세기에서 19세기로 이동시킨다. 아케이드의 입구에서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과 꿈꾸고 있는 현재에서 메시아적 각성의 상태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기억작업이 시작된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19세기의 공간 아케이드로 들어가는 과정을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통해 성인이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산책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변신이 일어난다. 거리는 산책자를 사라진 시간으로 이끈다. 그는 거리를 따라 어슬렁거린다 … 길은 산책자를 어머니에게 이끌지는 않지만, 그를 과거로 데려간다. 그 과거로 깊게 가면 갈수록 그 과거는 사적인 과거가 아니다."
아케이드는 19세기의 현상이었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기술이 출현한 20세기에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은 19세기 세계 수도로서의 파리에 주목했다. 그는 19세기의 화려했던 시절을 낭만적으로 그리워하는 회고주의자였을까? 벤야민에게 19세기와 20세기의 시간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19세기와 20세기를 관통하는 동일성을 보았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연구계획서로 작성된 <19세기 세계수도로서의 파리>는 뒤캉Du Camp의 인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역사는 야누스와 같다. 두 얼굴을 가진 것이다. 과거를 보든 아니면 현재를 보든 동일한 사물들을 본다."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를, 20세기 속에서 19세기를 찾아낸다. "역사는 어떤 구성이나 구조물의 대상인데, 이 구조물이 설 장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현재시간Jetztzeit에 의해 충만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로에게는 고대의 로마는 현재시간에 의해 충전된 과거였다. 프랑스 혁명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이해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고대의 로마를, 마치 유행이 지나간 의상을 기억에 떠올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하고 회상시켰다."
백화점이 등장하자 쓸쓸히 퇴장하는 아케이드는 19세기에는 최신의 시설을 자랑하는 꿈의 동산이었다. "아케이드는 사치품 판매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아케이드를 꾸미지 위해 예술은 상인들에게 봉사하게 되었다. 동시대인들은 지치지 않고 아케이드에 대한 찬사를 퍼부어 댔다. 이후 아주 오랫동안 그것들은 여행객들을 매혹시키게 된다. 그림으로 보는 파리 안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업의 사치를 위해 최근에 발명된 이 아케이드들의 지붕은 유리로 씌어지고, 대리석 벽으로 된 통로들이 건물의 모든 구역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 아케이드의 소유주들이 이처럼 엄청난 대모험을 위해 힘을 합쳐 이 시설을 만든 것이다. 천장에서 빛을 받는 아케이드의 양측에는 극히 호화스러운 가게들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이 아케이드는 하나의 도시, 축소된 세계가 된다. 최초로 가스로 조명을 하려고 했던 것도 이 아케이드 안에서였다."
19세기 최신 테크놀로지가 시각화된 공간이었던 아케이드는 백화점의 등장과 함께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아케이드의 급속한 부상과 부상만큼이나 재빠른 소멸은 현대성이 만들어내는 '새로움'의 신화가 자기 파괴되는 알레고리이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연구계획서에서 벤야민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졸저의 조사는 이처럼 문명을 물상화해서 표상하게 된 결과, 19세기부터 유래한 새로운 형태의 행동들 그리고 경제와 기술에 기반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물들이 어떻게 환영들의 우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아케이드에서 출현한 판타스마고리아는 20세기에도 지속된다. "시장의 환영에 자신을 맡기는 산책자의 경험"은 19세기와 20세기 사이의 시간적 격차를 증발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