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면서 항상 바빠서 매 끼니 매식에 빨래는 빨래방에 맡기거나 어머님이 해다 주시거나 하는 생활에 익숙해 있던 애인은 처음에 정말 아무것도 할 줄을 몰랐다. 심지어 세탁기가 엄청 어려운 물건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디선가 듣고 와서는 빨래하는 법을 (어려워서) 어떻게 배우냐고까지 했더랬다. 그러나 기본 자세만은 제대로 잡혀 있어서 가르쳐주는 대로 최대한 열심히 한다. 자식들에게 집안일을 하나도 시키지 않고 키우신 부모님을 생각한다면 애인이 올바르게(?) 자란 게 조금 신기할 지경이다. 친구의 예전 남자친구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양말을 벗기 시작해서 자기 방에 들어갈 때까지 옷을 이리저리 늘어놓는다고 했다. 그러면 어머니가 다 치워주신다나. 그러니 친구랑 데이트를 하면서도 게으름과 무신경의 극치를 보여줄 수 밖에. 집에 놀러와서 차려주는 밥만 쏙 먹고 만다든가(그것도 처음 한 두번이지, 2년 내내 그랬다니.), 친구가 이사하는 날 집에서 퍼질러 잠만 자고 있다든가. 2년씩이나 만난 친구가 바보지. 암튼, 그런 인간도 있는데 애인은 정말 제대로 잘 자란 셈이다. 지금은 청소와 쓰레기 버리는 걸 도맡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 널고 개는 것도 같이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물 다 마시면 물통을 깨끗이 부셔서 엎어놓는 등 소소한 일까지 챙긴다. 놀라워라. 처음에 언제 집안일을 다 가르치냐고 한숨 쉬던 내게 “평생 배우면 되죠.”라고 대답하더니, 의외로 빨리 적응한다고나 할까.
휴가 후유증인지 더위 탓에 제대로 잠을 못 자서인지 이번 주는 내내 피곤하다. 어제도 졸리고 힘들다고 징징댔더니 밥만 먹고 먼저 자라고 한다.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빨래까지 맡겨버리고 잤다. 한참 자다가 모기 물려서 깼다. 약을 찾으러 나갔더니 마침 애인은 빨래를 거의 다 널고 있는 참이다. 그런데. 아우, 눈에 딱 띈 게, 털지 않고 그냥 널어놓은 구겨진 수건이다. 잠이 덜 깬 와중에도 머리로는 이럴 때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입으로는 “수건 안 털고 그냥 널었어요? 이러면 구겨진단 말이야.”라는 말이 대뜸 튀어나간다. 지치고 약간 짜증난 표정의 애인. “수건이 얼마나 구겨진다고.” 순간 온갖 생각이 교차한다. 애인도 피곤했던 걸까, 그렇다고 털어서 너는 게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린다고, 혼자 잠만 자서 삐쳤나,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하고 자다 깨서 서운하기도 하고. 어쨌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이미 해 버렸으니, 에라 모르겠다, 수건을 걷어서 털고 다시 널기 시작했다. “들어가서 자요. 내가 할 테니까.” 그 말도 짜증스럽게 들리긴 마찬가지. 예전 성질 같았으면 이렇게 해 놓고 자라고 하면 잠이 오냐고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게 성질이 나지도 않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그저 “잠 깼어요.”라는 정도로 마무리. 다 해 놓고 나서 “빨래 다시 널라고 해서 기분 나빴어요?”라는 애교 섞인 물음까지. 음, 훌륭해. -_-v
집안일이든 사소한 배려든 당연하다고 여기면 안 된다고 전에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가요,라고 살짝 샐쭉해서 대답하긴 했지만 실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식사 준비 하는 대신 당신이 청소하는 거 당연하잖아, 라면서 집안일을 딱딱 나누기 시작하면 결국 서로 피곤하기만 할 거다. 애인이 나름 열심히 하는데 내 맘에 안 찬다고 잔소리하고 다시 해 버리면 기분 나쁘겠지. 그거야말로 당연하다. 남편 일 시키는 요령을 조언하는 전문가들도 절대 못한다는 소리는 하면 안 된다고 하잖아. 암튼, 애인은 이제 다 잊은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앞으로 조심해야지. 구겨진 수건 좀 쓰면 어떻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