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주말의 영화 프로그램을 보다가 찜한 작품이 <이웃집 야마다군>이다. TV 채널을 놓고 리모콘을 든 엄마의 공격과 신문을 든 아버지의 방어가 팽팽하게 펼쳐지는데, 화면 자체는 소박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얼마나 비장한지! 한참 킬킬거리면서 개봉하면 볼 영화 1순위로 꼽아두었다.
지난 주말 극장엘 갔는데, 마땅히 볼 만한 다른 영화도 없었던지라 고민없이 이 작품을 골랐다. 예상대로 '인디관'이라 이름붙은 가장 작은 관에 20~30명 정도의 관객이 다였다. 하지만 그날 같이 이 애니를 본 사람들은 얼마나 신나게들 웃었는지.
평범한 직장인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집안 일 떠넘기기를 좋아하는 엄마,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중학생 노보루, 똑똑한 딸 노노코, 그리고 고집 센 장모가 벌이는 에피소드들은 일본의 소박한 가정의 모습을 따뜻하게 보여준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보다는 웃겨 죽겠다.
영화를 보고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적당'과 '포기'.
새학기를 맞아 올해의 결심이 뭐냐고, 결혼이냐 승진이냐를 묻는 아이들에게 담임 선생님은 결의를 다지는 표정으로 칠판에 적는다. <적당 適當>
결혼식 축사를 맡은 남편의 손에 커닝 페이퍼라고 반찬거리 메모를 쥐어준 아내를 보면서 남편은 비장하게 말한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기입니다.'
안되는 건 안된다고 포기하고서 적당히 살다보면 세상 모든 일은 어떻게든 굴러간다고 말하는 이 가족의 어이없는 모습에 웃다 보면, 그렇게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인생 뭐 있냐~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이게 누구 작품인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전혀 몰랐다. 나중에 찾아보니, 에라, 저 유명한 지브리의 다카하다 이사오 작품이었네. 게다가 엉성한 선과 대충 칠한 듯 보이는 색 때문에 싸게 만들었겠구나 했는데, 풀 디지털 방식이라 <모노노케 히메> 보다도 돈이 더 많이 들었다고 한다. 흠. 아무튼, 이 작품을 소개한 씨네21의 기사를 옮겨 둔다.
<이웃집 야마다군>(ホ-ホケキョとなりの山田くん, 1999)
4개의 칸 속에 기승전결이 압축되어 있는 네컷만화를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있을까. 대부분의 감독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 것이다. 물론 성공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이미 <아즈망가 대왕>이나 <사자에상>(サザエさん)처럼 네컷만화를 TV용 시리즈물로 번안한 경험이 있다. <이웃집 야마다군>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아사히신문>에 연재 중인 네컷만화에서 인상적인 20여개의 에피소드들을 모아 여러 편의 하이쿠로 선집을 엮듯이 <이웃집 야마다군>을 만들어냈다.
<이웃집 야마다군>이 보여주는 것은 소박한 현대 일본 가정사다. 항상 힘이 넘치는 할머니, 전형적인 일본의 소심한 가장, 저녁식사 메뉴를 고민하느라 정신없는 엄마, 잘나지 않은 외모 때문에 고민이 많은 아들, 지나칠 정도로 어른스러운 막내딸로 구성된 야마다 가족은 일상의 평범한 고난과 행복을 겪으며 살아간다. 여기에는 다카하다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일상의 순간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파친코를 좋아하는 아빠와 아줌마스러운 엄마의 부부싸움. 비오는 날 지하철역에서 기다리는 아빠에게 우산을 가져다주는 게 영 귀찮은 아이들의 모습, 서서히 이성에 눈떠가는 아들의 풋사랑 등.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는 스스로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장편애니메이션으로서 커다란 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각각의 에피소드가 산토카, 바쇼 등 유명 하이쿠 시인들의 글귀로 마무리되는 것에서는 <이웃집 야마다군>이 일본의 전통적인 압축미(하이쿠와 네컷만화)를 장편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불러들이려는 시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웃집 야마다군>은 <모노노케 히메>보다도 많은 총 24억엔의 제작비가 투여된 대작이다. 모든 것이 풀 디지털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와 지브리의 예전 작화풍에 익숙한 관객은 이 작품을 외면했고, 결국 지브리 역사상 최대의 흥행 참패로 이어졌다. 물론 흥행에서의 참패가 한 예술작품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집 야마다군>은 소박한 그림체 속에 숨어 있는 지브리의 대담한 실험이며, 동시에 다카하다 이사오가 비오는 도쿄의 골목에서 구성지게 불러젖히는 인생찬가다.
http://www.cine21.com/News_Report/news_view.php?mm=001002005&mag_id=39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