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A와 그가 만나던 남자 B와 내가 만나는 사람과 넷이서 가끔 술자리를 가졌다. 그래봐야 한 달에 한 번 될까말까한, 다 합쳐도 다섯 번이 될까말까한 모임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3월 쯤이었나보다. 며칠 뒤 친구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B가 너더러 진짜 여우래." "??" A와 A의 동생과 함께 저녁 먹는 자리에서 B가 그랬단다. 벌써 십수년을 보아온 A도 A의 동생도 "블루가 여우과는 아니지."라고 대답했는데, B는 고개를 흔들기만 하더란다.
'여우'라... 삼십년 넘게 살면서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있다면, 바로 그거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남자들은 좀 여우같은 여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라고 누군가가 그랬는데, 무드도 애교도 없는데다 사람 만나면서 소위 말하는 '여우짓' 같은 거 하는 것조차 엄청스리 귀찮아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여우과에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내게 여우라니.
"고맙다고 전해라. 그런 말 첨 들어봤다." 그럴 줄 알았다는 친구의 반응.
며칠 전 C와 얘기하다가 B가 어째서 내게 여우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모조리 일찍 결혼한 친구들을 두고 있는 C는 이런 저런 연애의 다양한 모습을 봐 와서, 연애 기간에 일종의 '줄다리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대개 지나치게 적극적이거나 자신을 너무 좋아하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자주 전화하는 것도, 세심하게 신경써 주는 것도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부담스러워한다나 어쨌다나.
A는 만나는 사람에게 아주 잘 한다. 겉보기에는 여우처럼 보이지만 일단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이런거 저런거 생각하지 않고 잘 챙겨준다. 전화 자주 하고, 자주 만나려고 하고, 아프다면 약이랑 먹을 거 사들고 찾아가고, 필요한 거 사주기도 하고, 암튼 그렇다. 이건 사실 성격상의 문제다.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주변 사람을 배려하고 챙겨주는 성격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A가 만났던 놈들은 그런 걸 모른다.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부담스럽다느니, 너무 좋아하지 말라느니, 그딴 소리나 지껄인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울화통이 터져서 "야, 당장 그 놈이랑 헤어져!"라고 소리친다.
내 경우엔 오히려 무덤덤한 편이라고나 할까. 감정적으로까지 무덤덤한 건 아니지만, 역시 성격상 먼저 전화하거나 A처럼 상대에게 잘 하거나 하지는 못한다. 천성적으로 게으른 것도 한 몫 할테고, 여태 가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해 왔으니, 남자를 만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 같이 있으면 좋지만, 절대적으로 나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니 하루 데이트를 하면 다음날은 혼자 있어야 한다.
B는 아마도 나의 그런 모습을, 연애 과정에서 밀고 당기기에 능숙한 '여우'같은 태도로 보았던 모양이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는데 여우짓이 필요할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내 친구들도 나도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건 일종의 '자기 통제 불능' 상태가 아닌가. 좋아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게 어째서 '매력없는' 행동으로 불려야하는가.
어쩌면 A는 아직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모습을 그대로 예뻐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없는대로 사는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