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아버지는 누룽지를 무척 좋아하셨다. 엄마는 아버지 때문에 항상 냄비에 밥을 하셨고, 일부러 조금 더 눌려서 구수한 누룽지를 한 그릇 끓여내곤 하셨다. 물론 누룽지는 언제나 아버지 차지. 동생이나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누룽지에 밥을 좀 더 말아서 조금씩 나눠 주셨다.

몇 년 전 제법 비싼 밥솥을 집에 보냈다. 각종 밥 종류는 물론 죽까지 만들 수 있는 최신 모델로. 그러나 그 밥솥은 보온 이외의 다른 기능을 하지 않는다. 여전히 엄마는 아침저녁으로 냄비에 밥을 하셨고, 누룽지를 만드셨다. 아버지는 아마 하루 한끼는 누룽지로 드셨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젠가 집에 내려갔을 때 부엌 싱크대를 뒤지다가 제법 큰 비닐백 안에 가득 담긴 누릉지를 발견했다. 언제든 끓일 수 있게 매일매일 조금씩 모아 놓은 건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잊혀졌던 거다. 엄마한테 '이거 나 가져가도 돼?'라고 물었더니 당연히 그러라신다. 눈독 들이는 올케에게도 나눠주었다.

그 이후로 엄마는 아버지가 아니라 딸래미 먹이려고 누룽지를 만드신다. 한번씩 집에 가면 비닐백 가득 누룽지를 가져오고, 그 놈은 내가 밥 먹기 싫을 때나 밤에 출출할 때 훌륭한 먹거리가 된다.

좀 전에 한 그릇 끓여먹었다. 점심으로 먹은 김밥이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저녁을 먹지 않았더니 12시가 다 되어서야 배가 고픈거다. 이 시간에 밥 먹기도 그렇고, 라면 같은 것도 먹기 싫고. 누룽지가 딱이다. 냄비에 팔팔 끓여서, 총각 김치랑 깻잎 꺼내놓고, 계란 후라이 한장 부쳐 같이 먹으니 든든하다. 부러 물을 좀 많이 넣고 끓여 구수하게 숭늉도 마셨다.

엄마,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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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1-19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드시고 살 좀 찌세요. ^^

플레져 2004-11-19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블루님 집에서 누룽지가 살살 녹고 있군요... 식성, 아버님 닮으셨네요, 블루님. 따숩게 밥 먹고 댕기세요. 굶지 마세요...!

hanicare 2004-11-19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님이 돌아가셨어도 님의 입맛에 남아 계시는군요.(돌아가신지 꽤 세월이 흘렀나 봅니다.)

urblue 2004-11-19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랑 식성이 많이 비슷하죠, 국수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아버지는 작년 여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직도, 엄마랑 같이 집에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로드무비 2004-11-19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다 먹고 나서 찍은 거요, 처음부터 이게 다요?

좀 푸짐한 놈으로 찍어 올릴 것이지.

그래도 안 굶고 챙겨드신다니 다행.^^


urblue 2004-11-19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헷..제가 찍은 사진 아니구요, 인터넷에서 찾은 겁니다.

설마 저만큼만 먹겠습니까?

반딧불,, 2004-11-19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도 좋아합니다. 제가 압력솥밥을 좋아해서, 아직도 거기다 하거든요.

일부러 누룽지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꼬들꼬들하게 안만들고, 그냥 촉촉한 상태로 보관한답니다) 밥맛 없을 때 특히 아침에 많이 먹습니다.

아침에 아이들이랑 누룽지 먹었어요. 반찬 없을때 딱이라니까요.

추억이 있는 먹거리네요. 울아버지도 생전에 참 좋아하셨었는데..

urblue 2004-11-19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냄비나 압력솥에 밥 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엄마가 만들어주지 않으면 못 먹는거죠.

어제 이미지 찾으려고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누룽지 파는 곳도 있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집에서 만든 것 같은 맛은 안 나겠지요?

하얀마녀 2004-11-19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께서 블루님을 향한 마음을 담아 만들어주셨으니 얼마나 맛과 향기가 훌륭할까요. ^^

숨은아이 2004-11-20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청소년기에 우리집 누룽지 킬러였다는 거 아닙니까!

딸기 2004-12-1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늘 보온밥솥에 밥을 했는데, 그게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얼마전에 급하게 밥 지을 일이 있어서 냄비(가 아니고 실은 코펠)에 밥을 했더니 좀 눌었어요. 누룽지 끓여주니까 남편이 너무 좋아해서, 그 다음부터는 일부러 몇번 코펠에 밥을 했는데 잘 안 되더군요. 냄비가 타지 않게, 살짝 눌어붙게 하는 것도 기술인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