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록 야문 길

20210322 #시라는별 21 

조문(弔問)
- 안도현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봐주던

이 동네의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못한 나는 마루 끝에 앉아, 할아버지네 고추밭으로 올라가는 비탈, 오래 보고 있다 

지게 지고 하루에도 몇번씩 할아버지가 오르내릴 때 
풀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앉아 지그재그로 길을 터주곤 했다 

비탈에 납작하게 달아붙어 있던 그 길은 여름 내내 
바지 걷어붙인 할아버지 정강이에 볼록하게 돋던 핏줄같이 파르스름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풀들이 우묵하게 수의를 해 입힌 길,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 위로 
조의를 표하듯 산그늘이 엎드려 절하는 저녁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을 잠시 내려놓고 얼마 전 구입한 안도현 시인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펼쳐 들었다. 2008년 출간된 이 시집은 안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시인이 ‘내가 사랑하는 시‘라며 묶어 펴낸 시집 제목처럼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이 물씬 느껴진다. 100편의 시들 중 오늘 내 마음에 쑤욱 들어온 시는 뒷집 할아버지의 죽음을 노래한 ‘조문(弔問)‘이었다.

안 시인에게 한 사람은 하나의 사람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돌아가시는 순간 ˝길도 돌아가시고˝ 만다. 그러나 앞사람의 발자취는 어디에나 남아 있는 법이고, 찾으려는 눈들에겐 언제고 발견되기 마련이다. 시인의 눈이 그런 눈이리라.

사람은 나서 짧든 길든, 좁든 넓든 길을 내며 산다. 조성배 할아버의 길은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을 만큼 길었고, 이 길 저 길과 엮여 넓어지기도 했다. 소매 걷어붙이고 마을 대소사 쫓아다니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다 보니 할아버지는 어느새 ˝동네의 길이˝, 그것도 ˝슬프도록 야문 길˝이 되었다. 그런 분 떠나는 길에 문상조차 못한 것이 죄스러워 시인은 할아버지가 오르내리던 비탈을 바라본다. 오래오래.

˝후회는 늘 막차를 타고 오고,
 풍경은 아려서 
 나도 아프다.˝ (‘시인의 말‘ 중) 

안 시인이 올라탄 후회의 막차는 오래도록 남을 조문(弔問)의 궤적을 남겼다. ˝슬프도록 야문˝ 궤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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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22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비온뒤 말게 개인 하늘 !
진달래 꽃이 화알짝!
향기가 화면을 뚫고 나올것 같은
봄의 전령은 비를 내려 겨울내 잠든 생명들을 이렇게 하나둘씩 화려함을 뽐내게 만드네요

˝후회는 늘 막차를 타고 오고,
풍경은 아려서
나도 아프다‘
맞습니다, 항상 후회 하면서 막차타기 일보 직전에 탑승해도 후회만 한가득 ㅜ.ㅜ
비탈길 무서워 하는 1人
행복한 책읽기님 사진속 비탈길 올라 가셨으리라 !!
월요일 한주 시작 행복한 책읽기님의 시로 시작합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1-03-22 18:37   좋아요 1 | URL
그죠. 어제 오늘 하늘이 아주 맑아요. 대신 바람은 겁나 불었답니다. 산이 아니고 바다에 온 듯했어요. ㅋㅋ 저는 scott님 올려주는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하죠. 안도현님의 시로 scott님 한 주가 봄꽃들처럼 화사하기를요 ^^

미미 2021-03-22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의 후회의 막차는 오래도록 남을 조문의 궤적을 남겼다. 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항상 잘 보여주시네요! 오늘 도서관 가는데 시집도 한 권 담아와야겠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22 18:38   좋아요 2 | URL
ㅎㅎ 미미님 도서관 서가서 담아온 시집도 올려주시와요. 미미님이 어떤 시집을 골랐을지 궁금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