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여인의 죽음 이산의 책 22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재정 옮김 / 이산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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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를 써볼까 하고 '왕여인의 죽음'을 검색해보니 두 종류의 책이 나온다. 하나는 이화여대출판부에서 예전에 냈던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이산에서 펴낸 이 책이다. 내겐 '왕여인의 죽음'이라는 책이 두 권 있다. 전자와 후자 모두를 갖고 있는데, 사정이 좀 있었다. 처음에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책을 샀는데-- 허거걱 번역도 엉망이고 책도 너무 구식이어서 읽을 기분이 안 들었다고나 할까. 그러던 차에 후자를 어찌어찌 구하게 됐다(그렇게 해서 이산의 제법 훌륭한 버전으로 책을 읽게 된 셈인데, 말 나온김에 번역 얘기하자면 이 책의 번역은 꽤 훌륭해서, 읽을 때에 술술 넘어갔다).

스펜스의 책은, 언제나 내겐 별 다섯개다. 이 책도 마찬가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동안 읽은 스펜스의 책들이 모두 까만별 다섯개짜리였는데 이 책에만 별표를 줄여버리면 (책이) 의리없다 할까봐 다섯개를 준다. 스펜스의 저작들 중에서 이 책은 '소품'에 해당된다. 오랜시간 공들이고 공들여, 학문적 성과를 총동원해 쓴 책은 솔직히 아니다. 분량이 적은만큼 빨리 술술 읽힌다. 책의 배경은 산둥성 탄청현, '명소도 없고 영웅도 나지 않은' 평범한 고장, 그러나 평범하다 하기엔 너무 못살고, 지지리 고생많았던 곳. 때는 명말 청초, 정권교체기답게 수탈과 혼란과 민중의 간난고초가 극에 달했던 시기. 저자는 탄청현의 공식 기록인 '탄청현지'와, 지역 벼슬아치가 남긴 기록, 그리고 푸쑹링의 '요재지이'라는 세 가지 자료를 기본으로 해서 17세기 탄청 사람들의 고생스런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요재지이'라고라고라... 이렇게 요상스런 소설을 '사료' 마냥 버젓이 제시해놓은 데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삼백년전 탄청 사람들의 꿈과 판타지까지 역사의 일부로 포괄하고 있다는 것만 얘기해두자.

별다섯개의 두번째 이유. 역사를 '힘센 자들의 기록' 혹은 '영웅의 이야기'로 보는 서술방식을 줄곧 거부해온 스펜스답게, 이 책의 주인공도 그저 '보통사람들'이다. 책에 나온 인물들 중에는 순악당 무뢰한도 있고 현명한 과부도 있고 무능한 지식인도 있지만, 그래봤자 뽀다구 안 나는 사람들이다. 다른 역사책 같았으면 결코 등장하지 못했을 사람들.

세번째, 두번째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왜 하필 왕여인인가. 다른 사내와 바람나 남편 버리고 도망갔다가, 결국 되돌아와 남편에게 살해당한 왕여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 여인은, 타이틀롤임에도 불구하고 뒷부분에만 등장할 뿐이다. 그녀의 죽음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가? 혹은 유독 비참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라고 왕여인이 없었을까.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혹은 지금도 60억인구의 절반 중에는 수많은 왕여인이 있다. 그리하여 별 다섯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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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0-08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때 무진장 읽고팠던 책인데..까먹고 있었네요.

딸기 2004-10-0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길지 않아서, 술술 잘 읽혀요. 나조차도 불과 하루에 다 읽었다니깐. ^^
 
천안문 이산의 책 8
조너선 스펜스 지음, 정영무 옮김 / 이산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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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하면, 한 친구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벌써 몇년 전이던가. 나보다 열 살 어린 그 친구와 "'천안문'을 다 읽고나서 이야기해보자"는 얘기를 했었다. 친구는 약속대로 책을 읽었고, 나는 그저 책장에 꽂힌 '천안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조너선 스펜스의 책 중에서 나는 '현대 중국을 찾아서' 1권과 2권을 가장 먼저 읽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빠져든 스펜서의 세계. '강희제'와 '칸의 제국', 그리고 아주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읽고야 만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왕여인의 죽음'. 한권 한권 내게는 주옥같고, 추억같은 책들이다. 스펜서의 책 몇 권을 '찜'해서 알라딘 보관함에 넣어놓고 있고, 그의 모든 저서들을 다 읽어봐야지 하는 꿈까지 꾸고 있다. 스펜서의 책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의 책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그의 책들을 읽을 때 내가 빠졌던 함정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스펜스의 책들을 읽으면서 그의 스타일에 흠뻑 빠진 나머지, 정말 우습게도 '중국'을 잊고 있었다. 역사를 서술하는 저자 특유의 독창적인 방식과 박식함, 유려한 문장에 끌려, 그저 읽어내려왔달까. 그런 면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안문'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중국을 생각했다. 유구유구유구한 역사, 그만큼 화려복잡노도 같았던 중국의 역사, 그 중에서도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질풍 같은 시기의 중국을. 대학시절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연작을 읽은 이래 처음인 것 같다. 소용돌이 같은 시기의 인간의 군상을 이렇게 생생하게 접해본 것은.


'천안문'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이름일 뿐, 책의 배경은 '중국 곳곳'이다. 청말-열강의 반(半)점령-내전-공화국-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현대사의 궤적을 따라 자금성에서 난창으로, 창사로, 충칭과 옌안으로 흘러간다.

스펜스가 이 시기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내기 위해 선택한 세 사람은 사상가이자 개혁운동가였던 캉유웨이, 작가 루쉰, 또다른 작가 딩링이다. 이들은 생(生)의 한 시기에 겹쳐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지만, 사상적 시기적으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캉유웨이가 주로 청 말기, 왕조의 멸망을 회한어린 눈으로 바라본 개혁사상가였다면 루쉰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공산주의의 발흥을 지켜본 지식인이었다. 봉건제의 모순에 맞섰던 여성 작가 딩링은 공산당 치하에서 영욕을 잇따라 맛봐야 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이 세 명을 '축'으로 삼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책에는 이들과 교차되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중국의 현대 지식인 지도(地圖)라 해도 될 정도로. 생각이 다르고, 이름 붙여진 주의(主義)가 다르고, 인생역정이 다르지만 모두들 시대에 부딪치거나, 혹은 치이거나 했던 사람들이다. 스치고 엮이는 인물들 사이로 당대의 중국 풍경이 밀도 있게 그려진다. 픽션처럼 생생하되 사서(史書) 답게 정교한 스펜스 특유의 방식은 역시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혁명'이라는 이름의 봉기와 처형 장면이 당대 지식인의 글을 통해 '담담하게' 전해질 때 나는 인간이 가진 폭력성에 전율했고, 혁명가 취추바이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그만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으며, 늙은 딩링과 작가 라오서가 홍위병들에게 모멸을 당할 때에는 우습게도 혼자 분개하고 있었다.


역사는 사람을 작게도 만들고, 크게도 만든다. 역사는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진실이면서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 같기도 하다. 역사 속에 제 갈 길을 걸어간, 혹은 제 갈 길을 원하는 대로 걸어가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은 후대 사람의 마음까지 뒤흔들어 놓는다. '천안문'을 통해 나는 또다시 뒤흔들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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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0-06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좋은 책'만 읽는듯 하군요. 딸기님을 이런 식으로 쪼기도 하는 신지군은 여전히 잘 살고 있나보네...(맞죠? ^^)...스스로 함정을 인정하시니...부럽슴다. 저는 늘 '눈 먼 책읽기'를 하죠.

딸기 2004-10-0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씬지군, 군대갈 준비를 벌써 몇년째 하고 있답니다. ^^
 
새로 쓴 일본사
아사오 나오히로 외 엮음, 이계황.서각수.연민수.임성모 옮김 / 창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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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역사책치고는, 특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되었다거나, 좌파적이라거나, 극단적인 뒤집어보기를 시도한다거나 하는 종류의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사에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같은 몽매한 독자들 입장에서는, 일본사 개론서로 대단히 훌륭한 책이고, 까만 별 일곱개 정도는 주고 싶다.

책은 일본사를 선사시대에서부터 아주 최근(1990년대 이후)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그래서 책이 좀 두껍다). 단락별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글을 모아 엮었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와 학계 견해까지 되도록 수록하려고 애쓴 기색이 역력하다. 고대사와 중세사에 비해 아무래도 근현대사를 좀더 열심히 읽었는데, 일본의 '주류' 역사학자들이 이 정도로 건강한 역사인식을 갖고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일본 역사는 일본 역사이고. 책을 읽다보니 우리나라의 역사교과서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사회-생활사의 비중을 높인 것과 함께, 동아시아사(세계사) 속에서 일본의 행위를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현대 일본의 역사와 우리 역사는 워낙 얼키고 설킨 것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조선(한국)의 역사 또한 좀더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수 있게 됐달까. 책을 읽으면서 첫번째 받은 느낌은, 우리나라 역사책(예를 들면 국사 교과서)이 우리 역사를 딱 국경 테두리 안에서만 다루고 있구나, 하는 거였다. 국제관계 속에서의 한국사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적어도 내 기억 안에서는. 국제관계 속에서의 한국사라고 하면, 근대 이전에는 중국과의 '조공무역' 때문에 어딘가 사대적으로 느껴져서 기분 나쁘고, 근대 이후에는 일본한테 잡아먹혔으니 또한 기분나빠서, 그래서 '심정적으로' 역사책 안에서는 폐쇄적이 되고 국수적이 되었던 것일까.

근대 이후의 역사 자체가, 일본에 비해 조선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고 바깥 사정에 어두웠으니 역사서술 또한 '동아시아(세계) 속의 한국'보다는 '조선의 역사'에 그칠 수 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겠고.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역사 서술을, 역사를 보는 눈을 울타리 너머로 좀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책은 일본 역사의 '변두리(류큐와 아이누)'를 비롯해서 민중생활사와 경제사까지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다루려 시도하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다음에는 일본 근현대사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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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1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4-10-0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그랬군요! 추석이 나에게 보탬될 때가 있구나... ㅋㅋ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이산의 책 10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주원준 옮김 / 이산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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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펜스의 책 몇권을 읽었고, 아직 읽지 않은 몇권이 책꽂이에 꽂혀 있다. 스펜스의 책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역사'의 풍요로움을 생각하게 되고, 좀더 비약해서 말하자면 '인문학'이라는 것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게된다. 무엇이다 딱 잘라 말하긴 힘들지만 '과학'이라는 이름이 따라붙는 분야가 존재하듯이, 분명 인문학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스펜스가 보여주는 역사는 무엇보다 풍요롭다. 그가 유려한 문장을 통해 들려주는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스펜스의 책을 뽑아들 때에는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서 손을 뻗치는 것이고, 역사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해서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본다면 스펜스는 가장 훌륭한 '역사이야기꾼'이다.

그동안 읽은 스펜스의 저작들은 모두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칸의 제국'에서는 맑스 엥겔스 에즈라파운드에서 이탈로 칼비뇨의 소설까지 이르는 서구의 다양한 저작들을 통해 서양인의 눈에 비친 중국을 그렸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와 함께 '외부 세계에 대한 서구의 인식의 역사'까지 모두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번에 읽은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스펜스는 '여러가지 역사'를 아우르는 작업에 도전한다.

이탈리아인(서양인)이자 예수회 선교사(기독교도)였던 리치라는 인물의 눈을 통해 스펜스는 우선 16세기 중국의 역사를 그린다. 동시에 스펜스는 리치 시절의 유럽을 보여주고, 또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세계 진출'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지역과 테마를 넘나드는 여러가지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저자는 '기억술'이라는 다소 생소하고 신비적으로 보이는 화제를 택했다. 리치의 '기억의 궁전'에는 무장한 전사와 이슬람교도 여인, 추수한 곡식을 들고 있는 농부와 아이를 안은 여인이 있다.

저자는 기억의 궁전 네 귀퉁이에 자리한 네 부류의 인물들과, 리치가 남긴 네 장의 그림들을 가지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16세기의 역사를 풍요롭게 구현해낸다. 스펜스가 선택한 테마들은 왕조사 중심으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중국사 혹은 국가의 역사와도 다르다. 분열과 폭력에 얼룩진 이탈리아와 문약에 빠진 중국의 대비, '이단'에 맞선 싸움과 전교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서방의 동방 진출, 예수회와 포르투갈 상선단의 동방 무역, 중국의 동성애에서 성모 신앙의 수용까지, 책에서 다뤄지는 테마들은 모두 흥미롭다. 역사를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루면서 풍요롭게 재현해내는 것은 진정 스펜서만이 갖고 있는 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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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10-19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 여인의 죽음'을 꽤 재미있게 읽었어요. 조너선 스펜스의 책을 좀 더 읽어보고 싶은데 중국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해서 책 고르기가 어렵네요. 이런 제게 한 권 추천해 주심은 어떨런지요? ^^;;;

딸기 2004-10-19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지금 판다님 접속중이시구나. 쫓아다니면서 코멘트 달아야지. ^^

판다님, 저도 중국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서요, 지금부터 중국사 좀 공부해보려고... 실은 요즘 중국에 대한 책 몇가지 펼쳐놓고 있답니다. 예전에 사진 보려고 사둔 시공 아크로총서 켐브리지 중국사 한 권 있고요, 아무래도 관심이 가는 것은 명말 청초 이후이니깐... 조너선 스펜서가 쓴 마오쩌둥이랑, 벤저민 양의 덩샤오핑 책 있고요, 이것들 읽고 나면 이번에 나온 후진타오 한번 읽어보려고요(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저는 스펜스의 책은 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가장 역작이라면 아무래도 '현대중국을 찾아서 1.2' 이것들일테죠. 정말정말 훌륭합니다. 혹시 안 읽으셨다면 초강력 추천! 그리고 '천안문'하고 '칸의 제국' '강희제' 모두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번에 스펜스의 '반역의 책'도 샀는데, 읽어보고 말씀드릴께요.
판다님도 중국에 대한 책 읽으시면 저한테 얘기 좀 해주세요.

panda78 2004-10-20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그렇다면 현대 중국을 찾아서부터읽어볼게요. 저 책들 다 읽으셔놓고 지식이 전무하시다니 겸손이 지나치셔요. - _ -
켐브리지 중국사는 사진이 많아서 꽤 재미있을 것 같던데, 비싸더군요. ^^;;

현대 중국 읽고나면 스트롱베리님 서평 올리신 거 참고해서 다음 책을 정해야겠어요. 추천 정말 감사합니다. <(_ _)>
 
화려한 군주 -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이산의 책 26
다카시 후지타니 지음, 한석정 옮김 / 이산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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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판업계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출판사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온 책이라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출판사는 분명 있다. 내게는 '이산'이 그런 출판사다. 이산에서 나온 몇편의 책들은 모두 내게 풍요로운 독서의 기억을 선물해주었고, 이 책 '화려한 군주' 역시 그랬다.

이 책에는 '근대 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 다카시 후지타니는 "절대주의 국가의 화려한 의례와 상징들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전제 아래(물론 이같은 전제는 에릭 홉스봄 등의 선배들에게서 나온 것이며 다카시의 독창적인 고안물은 아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 일본의 화려한 국가의례를 조명한다. 책은 '근대 이후 국가의례의 형성'이라는 전제를 세워놓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나타난 국가의례와 상징적인 행사들을 분석함으로써 전제를 입증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다카시는 전통 혹은 의례의 발명과, 그것을 발명한 메이지 시대 지배계층의 의도에 대해 '망각하기' '기억하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메이지 시절의 민중들에게 별반 중요하지 않았던 천황의 불분명한 이미지를 잊게 만들고, 새롭게 강력하고 자비로운, 따라서 충성을 바쳐야할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심는 것, 즉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

메이지 시대 '천황 만들기'는 두가지 단계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저자는 파악한다. 첫째는 저자가 뭉뚱그려 '패전트'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천황의 순행이다. 천황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보여줌과 동시에 '백성을 굽어보는 윗사람'으로서 새롭게 각인된다. 두번째는 도쿄와 교토가 각각 '능동-현대-현실의 수도' 그리고 '신비-역사-상징의 수도'로 위상이 매겨지는 단계다.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였던 도쿄는 막부 시절의 기억이 지워지는 '재형성의 과정'을 겪으면서 제국의 수도로 부상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한 메이지 신정부의 권력자들은 유럽의 수도들을 모델 삼아 의전의 장소들을 만들면서 도쿄를 재정비한다. 새롭게 구획된 도쿄는 막부의 기억이 탈색되고 제국의 권위가 덧입혀진 곳으로, 더이상 이전의 '에도'가 아니다. 이 새로운 도쿄에서 천황은 메이지 헌법을 하사하고, 황실 결혼식을 거행하고, 승전 기념식을 치른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봉건적 군벌체제에 익숙해있던 일본의 민중들은 '국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전제에서 보이듯, 분석의 목적은 분명하다. 자못 '역사적인 것'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따라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의례와 상징들이 기실은 그닥 긴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의도적인 고안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인이지만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고, 버클리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런 탓인지 일본, 그리고 '그늘진 일본'의 정점인 천황제의 역사를 대단히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객관적 서술 만으로도 책은 충분히 비판적이다. 근대 내셔널리즘의 막중한 무게 때문에 가려지기 쉬운 의례와 상징들을 여러가지 역사기록물을 활용해 설명한 풍부함이 눈에 띈다.

일본, 그리고 내셔널리즘이란 문제에 부딪치면 항상 생각은 '지금, 우리'에게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식민주의를 비판해온 우리는, 일본의 네오내셔널리즘을 맘놓고 비판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명백한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 '자격' 운운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역사의 숨겨진 맥락을 구체적으로 되짚어보고 설명해내려는 다카시와 같은 노력이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만은 분명 사실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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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10-05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 중 하나인데....
올만에 딸기님 서재에 글 남기네요. 흐흐.

딸기 2004-10-05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바람구두님이다아아아아아

저 책, 재밌게 읽었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문학성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싶었어요

바람구두 2004-10-06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그런 생각했어요. 좋은 책인 건 알겠는데... 거기에 읽는 재미까지 있었다면 금상첨화였겠지요. 게으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역시 별로 미련이 없는 탓에 책을 읽고 쉽게 방기해버리는 딸기님! 사람에게도 그럴 것 같지만...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단정하기 어려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경험... 중동지역의 경험.... 솔직히 말해서 그대는 글을 제법 잘 씁니다. 책을 읽고 죄다 내버리지 말고... 세상에 기사 말고, 책으로 엮이는 글 하나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내 그대의 책이 나온다면 기꺼이 사서 읽으련만... 원래 칭찬을 잘 안하는 사람이 칭찬하는 건... 그냥 하는 칭찬 아니라는 거 알아주시길... 예전에 우리 잡지에 주었던 글 ... 지금 다시 읽어도 역시 좋은 글이더이다.

딸기 2004-10-0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옴머옴머... 바람구두님이 딸기를 칭찬하고 있다!
구두님, 저는 저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답니다. 글을 제법 그럴싸해보이게 쓸 수는 있지요. 대가리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수준, 딱 그만큼만 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글을 쓰려면 노력 뿐아니라 타고난 재주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재능을 타고 나지 못했습니다. 책을 읽고 죄다 내버리는 것은 글재주와 상관없는, 다만 버릇일 뿐이지만요. 그리고 책을 낸다는 것은, 남들한테 할 얘기가 있는 사람, 즉 알맹이가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지요. 저는 알맹이가 없습니다. 읽어야할 것은 산더미같고 남에게 들려줄수 있는 것은 비비탄 구슬만한 정도이니 어디 감히 책 운운하겠습니까.
구두님이야말로, 서평이나, 망명지에 올렸던 종류의 글 말고 다른 글을 써보지 그러세요. 물론 서평이나 유리병편지 모두 대단히 훌륭하고 때로는 눈물자아내지만, 구두님의 文材가 맘껏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항상 받았거든요.
이상, 덕담 주고받기 끝.

사람에게도 미련이 없는 탓에 쉽게 방기해버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은 방기해버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의를 다하나? 기준은 없습니다. 별로 생각이 없는 탓에... 구두님의 장문의 메일에 대한 답을 아직도 보내지 않았는데요, 앞으로도 안 보낼 생각입니다. 메일로, 쪽지로 구두님과 저는 이미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대화를 나눴다고 봅니다. 그 이상은, 앞으로의, 좀더 다른 방식의 몫이고, 메일이나 쪽지의 몫은 아니라고 봅니다. 돌아가서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