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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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장면, 이른바 '엽기'에 대해 나는 내성이 거의 없는 편이다. 끔찍한 이미지를 보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그래서 잔혹한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도 보지 않고, 엽기 만화도 보지 않는다. 잔혹한 사진은? 사람의 신체를 훼손하는 모습이라든가 끔찍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담은 사진들을 찾아가며 볼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수없이,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눈에 들어오고야 마는 사진들이 있다.

영화나 만화보다 '현실'의 사진들이 더더욱 끔찍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호러 영화라면, 굳이 돈 내고 보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현실 속의 잔인함들, 이 책의 제목을 빌면 '타인의 고통'을 100% 외면하기는 불가능하다. 현실의 힘이란 그런 것일까. 나의 일이 아니다, 라고 애써 외면하려 해도, 그런 일(사건 혹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 이미 모른체할 수만은 없게되는 그런 것들.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내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끔찍한 장면 몇가지를 다시 떠올려본다. 첫번째는 동티모르의 고문 피해자들 사진이다. 살아 있는 여성의 신체에 못으로 '그림'을 그린 인도네시아의 군인들, 철사로 나무에 묶여 있던 동티모르 남자의 몸에 박힌 못들. 그리스도의 수난? 그런 '은유'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던 잔인한 장면, 그리고 숨김없이 드러나있던 지배와 억압과 가학의 얼굴.

두번째는, 첫번째 장면에서 '가해자'였던 인도네시아, 그 내부의 피해자들을 담은 사진이다. 사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끔찍했던 참수된 시신들. 더우기 이것은 2000년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방에서 아주 최근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타임지에 실린 아체 반군의 시신들을 보는 순간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메스꺼움과 오한이 밀려왔다. 세번째는 1990년대 초반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일이다. 옛 소련 '괴뢰정권' 수반이었던 나지불라 대통령의 시신. 소련군이 물러난 뒤 카불을 점령한 반군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지불라와 그 동생을 처형해 카불 시내 한가운데에 전시한 일이었다.

네번째는, 손택이 이 책에서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 전시회에서 지난해 보았던 수전 메이젤라스의 사진이다. 반토막 밖에 안 남은 시신은 아마도 라틴아메리카 어느 나라의 반군의 몸뚱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번째는, 잔혹함을 이야기할 때 도저히 내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80년 광주의 사진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보자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대학생이던 누군가의 책상 서랍 속에 광주학살 희생자의 사진이 들어있었단다. 이 대학생의 어린 조카가 한동안 잠을 못 자고 악몽에 시달리더란다. 왜 그럴까 물어보니, 이모의 서랍속에 들어있던 광주학살 사진을 아이가 보고만 것이었다. 광주학살의 사진들은 그 일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시각적 내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이런 사진들에 대한 기억을 왜 다시 끄집어내느냐. 손택이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요구하는 첫번째 과제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생생한 이미지들을 떠올리는 일인 것 같아서다. 저것들은 현실의 장면들이고,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고, 상상의 이미지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직시할 것을 손택은 주문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요구대로 내가 알고 있는 끔찍한 이미지들을 헤짚어, 나를 둘러싼 주변, 반경 몇100km를 벗어난 곳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머리 속에 재현해본다. 손택의 말대로, 사진의 역할은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임을 실감하면서.
그냥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순교자를 그린 성화를 보는 중세의 수도사들이나 스너프 필름을 힐끔거리는 관음증 환자들과 달라질 수 없다. 손택은 인간의 관음증적인 속성, 잔혹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에 대한 기존의 텍스트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욕망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손택이 고야의 그림에서 카파의 사진, 중국의 잔혹한 형벌, 2차 대전 당시 유럽의 아이들 사진들을 열거하면서 잔혹한 이미지들을 우리 눈 앞에 들이대는 이유가 '관음증을 충족해보시오' 라는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나는 이미지를 직시하라는 손택의 요구를 받아들여 첫번째 단계를 밟았다. 두번째로 손택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은 좀 특별한 요청이다. 특유의 신랄한 말투로 손택은 "연민을 없애라"라고 말한다. 연민은 사회의 윤활유이자 인간 사이를 흐르는 情의 요체라고 생각해온 내게, 손택의 주장은 너무 가혹하다... 어째서 그녀는, 고통받는 타인에 대해 연민을 갖는 것조차 '집어치우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사진 속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는 순간 그들은 '타인'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좀 떨어진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혹은 조금 높은 곳에 올라앉아 동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더불어 연민은 그 자체, 타인의 고통을 그저 보기만 할 뿐인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책을 줄여주는 면죄부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손택은 여러 종류의, 여러가지 이름의 전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 옛 유고 연방의 내전까지 이어지는 전쟁들, 그 전쟁들을 담은 사진들을 꺼내놓으며 손택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전쟁의 잔혹함을 이야기한다. 나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다. 적어도 종군 사진기자들의 '작품'에 나오는 것같은 그런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지구상의 숱한 사람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고통에서 떨어져 있는 셈이고, 그런 면에서라면 60억 인구중에 행복한 쪽에 들어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에 일어난 전쟁 중의 하나는 내가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전쟁이었고, 나는 손택의 글을 읽으면서, 사진들을 보면서 그 전쟁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3년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전쟁은 미국의 주장대로 '최첨단 전쟁'이었다.
공습은 '정밀목표물'을 향해 집중됐고, 민간인 피해자는 이전의 전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전쟁의 이미지를 통제하는 펜타곤의 기술이 발달한 것과 함께 이를 상품화하는 매스컴의 능력도 엄청났다. 이 전쟁에서 대량소비된 이미지들 중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은 공습의 불꽃들이었다. 육탄전이 사라진 자리를 공습이란 괴물이 대체한지 오래, 이 전쟁의 피해자들의 모습은 '부수적인 피해'라는 미 국방부의 용어에 버금가게 '부수적인 이미지'로만 존재했다. 이런 시대에는 '타인의 고통'은 눈에 보이기 더더욱 힘들어지고, 손택이 부정한 '연민'조차도 힘들어진다.

전쟁의 변화한 이미지에 당혹해 하고 있는 나에게, 손택은 독설 만큼이나 분명하게 "사색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사색의 다음단계에 대해 손택은 말하지 않는다. 행동하라, 이것은 이미지들에 파묻힌 나약한 나에게 손택이 글을 통해 요구하는 사항이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사람이고, 나는 그가 제시해놓은 것들을 보면서 전쟁의 광포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넘어,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금 확인한다. 남은 것은 행동일 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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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시선 <타인의 고통>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8-07 03:56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전반적인 리뷰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마냐 2004-10-26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돈 주고 책 안 사도 되는 호사를 누리고 있지. 하지만 가장 최근에 돈 주고 산 책이 바로 이 것인데....보지를 못하고 있으니...에고고고...추천~

딸기 2004-10-2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된 거 다 알고 있다구... 그 글 참 좋았는데, 역시 당선됐더군. ^^
좋겠다... ㅠ.ㅠ 그넘의 책값 때문에...
지난번에 서선배가 '호메로스의 세계'라는 책을 주문했는데, 줄간격 엄청 넓고 문단 폭 엄청 좁고 두께도 얇은데 9500원... 요새 증말 책값이 너무 비싸. 솔직히 손택의 저 책은, 스타일은 내 맘에는 안 들어. 하지만 훌륭한 내용을 놓고 "이 문장의 부사가 마음에 안 들어요" 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인 것 같아서. ^^

panda78 2004-10-27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석에 반대한다'를 조금 읽다가 손택의 책 읽기를 단념했는데, 이 책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책값은 정말 정말 비싸요. ㅜ_ㅜ

딸기 2004-10-28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무서워요...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신서 377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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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젯밤 잠들기전 앤더슨의 책을 곱씹어보면서, 감히 '민족'이라는 큰 주제를 머리속에 떠올렸다. 뇌가 빙글빙글 돌았다. 대체 이것은 무엇이관대 한쪽에서는 허구적인 감정일 뿐이라 하고 한쪽에선 거기에 목숨을 거는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버릇을 들인지 꽤 오래됐다. 다만 제목과 저자 이름에 한줄짜리 소감을 붙이는 것일지라도, 독후감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 91년이니 독후감이라면 물릴만큼 써봤다(난 쉽게 잘 물린다 -_-). 그런데도 아직까지 책을 읽고 나서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정리해야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앤더슨의 이 책이 바로 그랬다. 앤더슨의 주장들, 그리고 '한민족'이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여러가지 감정들이 머리속에 맴돌면서 두부같은 두부(頭部)는 몹시 복잡해졌다. 어설픈 번역 탓도 있겠고, 앤더슨의 서술 방식 자체가 내 입맛에 안 맞았던 탓도 있겠다.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도저히 이 책을 '거부할 수 없어서'였다. 이책 저책, '민족'이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에 앤더슨의 책은 '반드시'라 해도 될 정도로 많이 인용된다. 그냥 넘어가자, 했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사고 말았다. 솔직히 이 책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싶기도 했다. 실제로 앤더슨의 문장은 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앤더슨의 생각에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앤더슨은 '민족'을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구성되고 의미가 부여된 역사적 공동체'라 정의하고, '상상의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떤 특정한 시기? 바로 자본주의 시대다. 나와 우리의 삶을 붙들어매주고 있던 종교와 군주제가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시기. 사람들에게는 귀속본능같은 것이 있어서, '뿌리'를 찾고싶어한다(이런 귀속본능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앤더슨은 이를 전제하는 듯하다).

인쇄자본주의의 도래와 때를 같이해 마침 신문이란 것이 등장해 사람들에게 공시성을 선사해줬다. 신문을 통해 얼굴과 이름은 몰라도(전근대적 지역공동체와의 차이점) 나와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알게되고, 믿게 되었다는 데에서 앤더슨의 민족 탄생의 열쇠를 찾는다. 민족 개념의 탄생과 인쇄자본주의의 역할을 연결지은 시각은 흥미롭다. 물론 이 밖에도 앤더슨은 (유럽에서) 라틴어의 퇴조와 지방어의 득세 등등 민족 개념의 탄생을 도왔던 다양한 요인들을 거론한다.

민족이 인류역사에서 비교적 최근 시기에 고안된 개념이라는 것은 앤더슨만의 고유한 시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족의 유구성을 믿는다. 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다른 나라였는데도 우리는 한민족 5000년 역사를 이야기한다. 왜? 민족은 '뿌리'와 연결돼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앤더슨의 말을 빌면, 민족이라는 '근대적' 개념은 우리에게 '고대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단의 '영속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민족이라는 개념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앤더슨의 시각에서 눈에 띄는 것은 민족 개념이 시작된 곳이 아메리카 대륙, 즉 신세계였다는 주장이다. '민족'을 기반으로 한(것처럼 보이는)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는 궁지에 몰린 군주들이 식민지의 민족 개념을 받아들여, 즉 '모방'해 만든 것이라고 지적한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메리카에서 탄생한 민족개념-> 유럽으로 건너가고->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에서 완성됐다는 것. 정말일까? 그건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는 민족 개념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므로. 다만 저런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동남아시아 사회를 가깝게 접할 수 있었던 앤더슨 특유의 통찰력 덕분이었음을 인정해두자.

아무튼 앤더슨은 저렇게 이야기한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상상'이라는 말이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 앤더슨은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라 해서 곧 허구적인 개념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비교적 최근에 어떤 '계기'를 만나 개념으로 정립됐음을 지적하는 것일 뿐, 민족이라 부를만한 공동체의 공통된 역사적 언어적 경험(반드시 그 민족의 고유한 언어일 필요는 없지만)을 충분히 인정한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민족을 허구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어떠한 종류가 됐건 '민족 문제'에 답하기 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하나의 민족에 속하게 되고, 민족의 이름을 걸고 싸우게 된다. 이 이름이 주는 효과는 너무나 크다. 때로 이것은 탄압의 원인이 되고, 때로는 저항의 수단이 된다. 자신들의 존재조건을 아직 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민족'은 공통된 의식을 불러일으켜주는 기능을 한다. 다만 그것을 앤더슨처럼 자본주의와 때를 같이해 나타난 특별한 '문화적 조형물'로 보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분단조국'에서 살고 있는 별볼일없는 보통사람인 내가, 머리 속에 백신을 놓듯 '민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해야 하는 까닭은. 이유는 분명하다. 민족이 됐건 무엇이 됐건, 어떤 사람의 태생적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한다거나 핍박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억압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의 순교 행렬이 계속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필히 경계를 만들어내고, 누군가를 배제하게 되고, 많은 것을 가리우게 된다. 민족이라는 이름을 걸고 저질러지는 일들은 흔히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고통과 모순을 감추고 있다.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이 개념의 절대적인 무게를 거부할 필요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불면증에 시달리게 생긴 뇌를 잠시 휴식시켰지만 마음은 여전히 개운치가 않다.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 '민족'이라는 말에 양면적 혹은 다면적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것인지.

(사족- 번역하신 분은 참 재밌는 분인 것 같다. "역자는 1983년에 나온 이 책 1판을 1991년에 완역, 출판하였다. 앤더슨의 개정증보판이 나온 1991년에 역자가 그의 초판본을 번역, 출판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뭐가 아이러니컬인가. 코미디다. 하지만 역자해설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것으로 용서해드리지요. 하지만 책 표지의 붉은악마 사진-- 이건 정말 코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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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10-26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네딕트 앤더슨의 시각에는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요.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근대에 다 와서야 형성됐다는 점에는 그다지 수긍하지 않지만요.

민족이라는 개념은 다시 오랜 옛날처럼 희미해져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일부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인도가 그랬고 러시아가 그랬던, 이라크에서는 현재 진행형인) 민족 독립 문제는 오히려 민족 문제이기보다는 지방 자치와 같은 권력 분권의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세계화의 혼돈 속에 갇힌 지구 속에 민족이라는 키워드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생각하다 돌아갑니다. 글 잘 읽었구요. :)

딸기 2004-10-2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의 개념은 다르겠죠. 통치기구와 영토 개념이 생겨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앤더슨도 국가의 개념이 근대에 형성됐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인정되고 있는 견해 아닌가요? 우리 집단은 이러저러한 민족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말이지요. 그런 '상상'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 그런 작업이 근대에 다 와서 이뤄졌다는 것이지, 그런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 근거가 된 역사적 경험들이 모두 근대의 것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미해져 가고 있을까요. 이라크 쿠르드족 문제나 러시아와 체첸 문제 같은 것들은 분명 민족의 외피를 쓰고 있는 걸요. 그 외피를 벗길 필요는 분명히 있겠지요. '민족 분쟁'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져 버리면, 그 땅, 그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모순이 너무 단순화되고, 진짜 문제들은 가리워져 버린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 인간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김한영 옮김, 이인식 해설 / 김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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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와 유익함, 모든 면에서 매트 리들리의 저술은 과학서적으로서는 단연 A급이다. 리들리의 책에 별 다섯개를 줄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재미있다. 생물학 유전공학 의학 심리학 사회학 등 연관분야까지 모두 포함해, 다종다양한 연구 사례들을 들어 가며 주제를 펼치기 때문에, '일반인을 위한 과학개론서'로 손색이 없다. 특히 최근의 연구들까지 항상 업데잇 되어 있다는 점은 리들리식 과학 저널리즘이 보여주는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다. 둘째, 개론서의 역할은 '소개'에 있다. 그러나 리들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논지가 명확하다는 것은 리들리 책의 또다른 특징이다. 민감한 주제를 피해가지 않는다. 여기에는 게놈연구 등을 필두로 한 인간 유전체 연구도 포함되고, 이 책에서 다루는 것같은 '유전과 본성의 문제'도 포함된다. 이것은 리들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유전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분위기에서 서구 사회가 점차 벗어나면서 '자신감'을 되찾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리들리는 저널리스틱한 글쓰기의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과학과 저널리즘 양쪽에 발을 걸친 그의 경력을 볼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과학책 쓰는 사람 중에 그만큼 눈길 가게 글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놈'과 '이타적 유전자'로 이미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도 글쓰는 재주를 아낌없이 펼쳐보인다. 다윈 이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의 매듭들을 만들었던 12명의 학자들을 동원, 본성 대 양육의 100년 논쟁사를 소개하는데 간간이 언급되는 과학자들의 '비사'(?)도 재미있고, 치열한 연구과정도 재미있다. 저자는 첨예하다면 첨예했던 이 논쟁을 설명하면서, '유전정보의 전달 단위'라는 유전자의 정의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유전자는 '환경(양육)으로부터 오는 자극들을 받아들여 상호작용하기 위한 우리 몸의 스위치'라는 것이다. 본성과 양육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 양립한다는 것, 어느 한쪽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 리들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이미 저자의 전작들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리들리가 이런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리들리의 주장, 즉 본성과 양육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둘 다 필수적이며 대립하는 요소들이 아니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별로 새로운 얘기가 아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얘기다. 우선, 아이가 있는,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본성 즉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과 환경(교육)에서 만들어지는 부분이 공존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내 주변의 두 엄마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딸을 둔 한 엄마는, 아이가 너무 '공주스럽게' 자라는 것을 원치 않아서 사내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칼을 사주었다. 결과는? 이 엄마의 딸은, 사내아이들처럼 칼을 들고 결투를 하는 대신 인형 공주를 지켜주는 '소품'으로 칼을 갖고 노는데 그쳤다. 반면 아들을 둔 엄마는 인형을 사주었는데, 아들은 인형에게 '총을 맞고 쓰러지는' 역할을 시키더란다. 70년대의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이나 환경주의자들이라면 몰라도, 이제 와서 아이들이 제각각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타고난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는 사람은 없다. 아이들이 타고난 체질처럼 저마다 독특한 성격과 재능을 타고 난다는 것은 부모들에게는 상식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자기 아이에게 교육이나 환경이 전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다. 본성과 양육 모두 아이들에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리들리의 주장은 전혀 새롭지 않다. 부모라면 누구나 알만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들리의 주장은 또한 새롭다. 새롭게 드러나는 유전자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설명해줌으로써, 위에서 말한 '뻔한 결론'이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개인에게 발현되는지 단면들을 보여준다. (여자들은 약지와 검지의 길이가 비슷한 반면 남자들은 약지의 길이가 더 길다는 것은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본성과 양육의 양립'이 실은 최근에 와서야 인정받게 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본성과 양육은 함께 간다-- 당연해 보이는 이 사실이 왜 중요하냐고? '엄마아빠는 다 안다'고 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과도한 양육론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서구사회는 20세기 중후반 내내 나치즘과 전체주의로 대변되는 '과도한 결정론'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유전자의 역할'을 큰소리로 말하는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서구의 콤플렉스에서 나온 환경결정론이었다면, 요즘 우리 주변의 환경결정론은 좀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아이에게 이만큼 주입하면 이만큼 산출할 수 있다, 그러니 두배로 주입하면 두 배로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식의 환경결정론. 이 질병의 이름은 '교육열'이고, 증상은 조기교육 영재교육 학원뺑뺑이돌리기로 나타난다. 물론 이 책은 교육이론서는 아니다. 한국의 부모들에게 '아이 잘 키우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출판된 책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자폐증 아이를 '무심한 엄마' 탓으로 돌릴 수 없듯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입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교육으로 내 아이를 이러저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기는 부모들에게 리들리의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양육은 뜻밖의 깨달음을 준다. 한 인간의 성격을 멋지게 조각하고 감독하겠다고 달려들지만 결국에는 무기력한 방관자 겸 운전사로 전락한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삶을 분리시킨다. 학습은 이 환경에서 저 환경으로 짊어지고 갈 수 있는 배낭이 아니다. 그것은 조건의 특수성에 좌우된다... 따라서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식의 영구적 특성을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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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10-24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경결정론과 유전자결정론, 양쪽 모두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확연해지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게도 리들리의 책은 아직이지만, 이 리뷰만으로도 그가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네요. 언젠가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님과 저의 관심사가 엇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딸기 2004-10-2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갈대님 벌써 오셨군요. 리들리 책 재밌어요.
(그래도 저는, 생물학은 물리학에 댈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답니다 ^^)

저도 갈대님 서재 구경하면서 저랑 관심사가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난번에 유전공학 문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본 것도, 저랑 생각이 비슷하신지 궁금해서였답니다. 결과는? 비슷합니다. ^^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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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러니 성격의 글들은, 의외로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딱히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주제를 따지자면-- 아마도 그 글을 쓴 사람 그 자체가 아닐까. 투르니에의 글은 투르니에가 그 소재이자 테마인 것이고,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마루야마가 소재이자 테마다. 그래서 나는 미셀러니에는 여간해서는 손을 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가비얍고, 어떻게 보면 '사람'을 가장 열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 그 장르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모르고 보면 미셀러니만큼 별볼일없는 것이 없다. 반면에, 짧은 글들 사이에 묻어나는 촌철의 유머로 해서 글쓴이의 내면의 일단을 보게 될때에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투르니에의 글들은 투르니에를 보여준다-- 그리고, 글 속에 나타난 투르니에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것이, 힘겨운 '적응'의 과정을 참아가며 투르니에의 자질구레한 일상까지 들여다보는, 이유라면 이유다. 다행히도 투르니에라는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은 '견딘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즐거운 과정이었다. '짧은 글 긴 침묵'도 그랬고, '예찬'도 그랬고, '헤르만헤세와 소크라테스의 점심'도 그랬다. 이 할아버지, 보통 웃기는게 아니고, 그래서 투르니에의 책을 손에 잡으면 대개는 키득키득거리게 된다. '외면일기', 나의 내면이 아닌 내 밖의 일기라니. 제목부터가 그럴듯하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우리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자 한다고 예고해왔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묻는다. "아니, 대통령이 왜 너희 집에 와서 식사를 한다니?" "내가 유명한 사람이니까."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대꾸한다. "그런다고 내가 믿을 줄 알고!"
...어느 일요일 아침 어머니가 TV에서 미사 드리는 광경을 시청하고 있다. 사제가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세 사람의 동방박사의 모험 이야기에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상상해낸 네 번째의 동방박사 이야기는 여간 재미있는게 아닙니다."
..."그것 보세요. 내가 아주 이름 없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일요일 설교 때 내 이름을 들먹이기도 하니까요!" 어머니의 말: "아, 분명히 알아둬! 신부님이 작가 미셸 투르니에라고 했어." 나의 대답: "그래서요? 그건 사실 아닌가요?" 어머니의 대꾸: "그렇긴 하지. 그렇지마 괴테나 빅토르 위고였다면 작가 괴테, 작가 빅토르 위고라고 하진 않았을 거야."

전형적인 투르니에식 우스개랄까. 나 어때? 나 굉장히 유명하다, 나, 꽤나 굉장한 작가라구! 그러니까 내 말 한번 들어보라고. 재미있지? 그게 인생인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그의 재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글 사이사이에 나타나는 박식함도 투르니에를 읽게만드는 유인요소 중 하나다. 재치가 결합된 박학다식만큼 재미난 게 또 있을까.

런던여행. 이번의 짧은 체류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리폼클럽'에서의 식사였다. ...쥘 베른느에 따르면 거기서 필레아스 포그가 80일간에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내기를 걸었고 마침내 그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곳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집의 책임자는 유머감각이 별로 없는지 그 클럽의 가장 유명한 회원들의 초상화들 가운데 그 인물이 초상화를 끼워넣지도 않았으니 유감천만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 얼 그레이 경이 끼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 끼게 된 것은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차에 베르가모트를 첨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1830년에서 1834년 사이에 수상을 지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는 많이 실망했다.

길지 않은 문장을 통해서 나는 어릴적 읽었던 '80일간의 세계일주'의 한장면 한장면들을 떠올린다. 베르가못향이 살짝 감도는 얼그레이의 향기가 맴돈다.

박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생쥐가 소리친다: "오, 천사로구나!"

오늘밤 라디오를 듣다가 나는 옛 스승 가스통 바슐라르 선생의 부르고뉴 악센트가 섞인 목소리를 즉시 알아차린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목소리는 그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곤 하는 어떤 바보 녀석 때문에 자꾸 끊어지곤 한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면서 이런 안내의 말이 흘러나온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1949년 가스통 바슐라르와 미셸 투르니에가 주고받은 대담을 녹음한 INA 자료 내용을 들으셨습니다."

"나에게 오직 내 분수에 맞을 정도의 양과 질의 진실만을 말해주십시오."

이래서 투르니에를 좋아한다. 이 할아버지의 재기넘치면서도 따뜻한 말들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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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10-23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투르니에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이유는 딸기 님과 거의 같은 거 같아요. 박식함 속에 깃들인 겸손과 유머..
<짧은 글, 긴 침묵> <예찬> 등을 아끼면서 읽었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자주 권했었는데, 생각해보면 김화영 선생의 명번역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외면일기>는 일부러 무심히 지나치려 했는데, 이렇게 딸기 님이 펌프질(!)을 제대로 하시는군요. ^^..

마냐 2004-10-23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 할배의 글을 제대로 본 적이 없군. 쩝. 저 어머님의 내공을 보니...아들도 오죽하겠어.

딸기 2004-10-2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나도 저 할배 진짜 소설은 한개도 안 읽어봤어. 방드르디를 읽어볼까 싶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은 터라, 어째 땡기질 않네.

갈대 2004-10-24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투르니에 할배도 에코 할배만큼 재밌네요. 물론 유머를 구사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지만요. 투르니에 할배의 자기비하성 유머는 마태님의 주특기인데, 암튼 언젠가 읽어봐야겠어요

로드무비 2004-10-2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면일기 저도 재밌게 읽었답니다.
시치미 뚝 뗀 유머가 좋아요.^^

딸기 2004-10-26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딱 들어맞는 표현이로군요. 시치미 뚝 뗀 유머!

panda78 2004-10-2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갑자기 마구 땡기네요. 전 <소크라테스와...>밖에 안 읽었는데, 예찬과 외면일기.. 장바구니로. ^^

딸기 2004-10-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판다님, 실은 저는 '소크라테스와...'가 제일 재밌었는걸요 ^^

에레혼 2004-10-2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인용해 놓은 대목 중 하나[어머니와의 대화...]는 일전에 제 '독서일기'에 옮겨 적은 대목이네요, 반가워라!
"20세기 문학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문학적 사건은?"이란 설문 조사에서 미셸 투르니에는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가 출판된 것"이라고 대답했다는군요. 그 설문 조사에서 1위와 2위로 꼽힌 사건[인물]은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의 출현"이었다는데, 투르니에의 자신감 넘치는[아마 유머를 실은 것이었을 테지만...] 답변이 투르니에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미셸 투르니에, 멋진 작가입니다. 장편 소설이 좀 부담되면 <꼬마 푸세의 가출>이란 단편집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어요. 단편의 팽팽한 밀도와 구성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 실려 있지요. 아, 이 노인네는 왜 이리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걸까요?

딸기 2004-10-27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새 투르니에 뿐 아니라, 장편소설 자체가 부담스럽거든요
하지만 꼬마 푸세...라면 읽고싶어지네요. 보관함에 넣어놔야겠어요 ^ㅇ^
 

아주 스크롤 압박 작정하고 올리는, 몇몇 분들을 위한 서비스 포스팅.

진주귀고리에 보내주신 뜨거운 호응에 감읍하는 마음으로, 이번엔 나이트호~~크 스토킹에 나선다. (서비스라면서 또 반말이다)



 

 

 

 

 

 

이것이 바로 호퍼의 나이트호크.

이번엔 심슨 버전.


 

 

 

 

 

 

 

 

심슨만 있는게 아니다. 땡땡 버전도 있다.


 

 

 

 

 

 

 

땡땡만 있나? 발렌타인 버전도 있다. 무려 초콜렛으로 만든 나이트호크...



 

 

 

 

 

 

 

 

초콜렛 먹고 입 싸악~ 씻고, 개기기 버전으로 변신


 

 

 

 

 

 

 

 

 

 

 

 

 

이번엔 낙서 버전


 

 

 

 

 

 

 

 

 

아직도 나이트호크가 뭔지 감이 안 오는 분들을 위해...

원래 나이트호크는.... 이 녀석이다. 별로 안 무서븐 쪼마난 새.


 

 

 

 

 

 

 

이놈은... 나이크호크가 되기 전의... evening hawk...


 

 

 

 

 

 

 

 

 

이놈은 최첨단 나이트호크


 

 

 

 

 

 

 

 

 

 

오늘도 우리는 작품감상에 뒤따르는 숙제, 색칠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나이트호크를 못찾은 관계로, 호퍼의 The Lighthouse at Two Lights로 대신하겠다.

우선 원작을 보고


 

 

 

 

 

 

 

 

그다음엔 숙제를...


 

 

 

 

 

 

 

 

요건 내가 한 숙제...


 

 

 

 

 

 

 

 

서비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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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10-21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브닝 호크..... 푸하하하 >ㅂ< 재밌어요, 재밌어요. 또 해 주세요- ^ㅂ^
그리고 땡땡 버전은 처음 봐요. 우습네요. 크크

로드무비 2004-10-21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방면에 일가견이 있으신 듯.
아이고 웃겨라!^^

panda78 2004-10-21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번에 판다 두 마리 드렸으니 요것까지 퍼 가도 될까나요? ^ㅂ^

딸기 2004-10-2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판다님, 지난번 한마리는 선불이었군요!
로드무비님, 이방면에 일가견 없습니다. 한번 있어볼라구 애쓰는 중입니다. ^^

딸기 2004-10-2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친구들한테 보여줬더니...
'레이디호크'도 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

panda78 2004-10-2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드슨 호크는.. 안되나요? ^^;;;;

딸기 2004-10-22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하하
각종 호크들이 다 나오는군요.
이런걸 가리켜서...
11차원 초호크이론이라고 하지요. ㅎㅎ

브리즈 2004-10-23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핫.. evening hawk... 딸기 님, 내 배꼽 돌려주세요.
덕분에 눈물 쏙 나오게 웃었답니다. 감탄과 존경(?)을 드리고 싶네요. 역시 딸기 님의 내공은 헤아릴 수가.. ^^..
작은 이벤트지만, 고맙습니다. 즐겁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

딸기 2004-10-2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 말로는... 에단 호크도 있대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