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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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러니 성격의 글들은, 의외로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딱히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주제를 따지자면-- 아마도 그 글을 쓴 사람 그 자체가 아닐까. 투르니에의 글은 투르니에가 그 소재이자 테마인 것이고,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마루야마가 소재이자 테마다. 그래서 나는 미셀러니에는 여간해서는 손을 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가비얍고, 어떻게 보면 '사람'을 가장 열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 그 장르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모르고 보면 미셀러니만큼 별볼일없는 것이 없다. 반면에, 짧은 글들 사이에 묻어나는 촌철의 유머로 해서 글쓴이의 내면의 일단을 보게 될때에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투르니에의 글들은 투르니에를 보여준다-- 그리고, 글 속에 나타난 투르니에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것이, 힘겨운 '적응'의 과정을 참아가며 투르니에의 자질구레한 일상까지 들여다보는, 이유라면 이유다. 다행히도 투르니에라는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은 '견딘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즐거운 과정이었다. '짧은 글 긴 침묵'도 그랬고, '예찬'도 그랬고, '헤르만헤세와 소크라테스의 점심'도 그랬다. 이 할아버지, 보통 웃기는게 아니고, 그래서 투르니에의 책을 손에 잡으면 대개는 키득키득거리게 된다. '외면일기', 나의 내면이 아닌 내 밖의 일기라니. 제목부터가 그럴듯하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우리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자 한다고 예고해왔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묻는다. "아니, 대통령이 왜 너희 집에 와서 식사를 한다니?" "내가 유명한 사람이니까."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대꾸한다. "그런다고 내가 믿을 줄 알고!"
...어느 일요일 아침 어머니가 TV에서 미사 드리는 광경을 시청하고 있다. 사제가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세 사람의 동방박사의 모험 이야기에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상상해낸 네 번째의 동방박사 이야기는 여간 재미있는게 아닙니다."
..."그것 보세요. 내가 아주 이름 없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일요일 설교 때 내 이름을 들먹이기도 하니까요!" 어머니의 말: "아, 분명히 알아둬! 신부님이 작가 미셸 투르니에라고 했어." 나의 대답: "그래서요? 그건 사실 아닌가요?" 어머니의 대꾸: "그렇긴 하지. 그렇지마 괴테나 빅토르 위고였다면 작가 괴테, 작가 빅토르 위고라고 하진 않았을 거야."

전형적인 투르니에식 우스개랄까. 나 어때? 나 굉장히 유명하다, 나, 꽤나 굉장한 작가라구! 그러니까 내 말 한번 들어보라고. 재미있지? 그게 인생인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그의 재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글 사이사이에 나타나는 박식함도 투르니에를 읽게만드는 유인요소 중 하나다. 재치가 결합된 박학다식만큼 재미난 게 또 있을까.

런던여행. 이번의 짧은 체류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리폼클럽'에서의 식사였다. ...쥘 베른느에 따르면 거기서 필레아스 포그가 80일간에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내기를 걸었고 마침내 그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곳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집의 책임자는 유머감각이 별로 없는지 그 클럽의 가장 유명한 회원들의 초상화들 가운데 그 인물이 초상화를 끼워넣지도 않았으니 유감천만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 얼 그레이 경이 끼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 끼게 된 것은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차에 베르가모트를 첨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1830년에서 1834년 사이에 수상을 지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는 많이 실망했다.

길지 않은 문장을 통해서 나는 어릴적 읽었던 '80일간의 세계일주'의 한장면 한장면들을 떠올린다. 베르가못향이 살짝 감도는 얼그레이의 향기가 맴돈다.

박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생쥐가 소리친다: "오, 천사로구나!"

오늘밤 라디오를 듣다가 나는 옛 스승 가스통 바슐라르 선생의 부르고뉴 악센트가 섞인 목소리를 즉시 알아차린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목소리는 그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곤 하는 어떤 바보 녀석 때문에 자꾸 끊어지곤 한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면서 이런 안내의 말이 흘러나온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1949년 가스통 바슐라르와 미셸 투르니에가 주고받은 대담을 녹음한 INA 자료 내용을 들으셨습니다."

"나에게 오직 내 분수에 맞을 정도의 양과 질의 진실만을 말해주십시오."

이래서 투르니에를 좋아한다. 이 할아버지의 재기넘치면서도 따뜻한 말들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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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10-23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투르니에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이유는 딸기 님과 거의 같은 거 같아요. 박식함 속에 깃들인 겸손과 유머..
<짧은 글, 긴 침묵> <예찬> 등을 아끼면서 읽었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자주 권했었는데, 생각해보면 김화영 선생의 명번역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외면일기>는 일부러 무심히 지나치려 했는데, 이렇게 딸기 님이 펌프질(!)을 제대로 하시는군요. ^^..

마냐 2004-10-23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 할배의 글을 제대로 본 적이 없군. 쩝. 저 어머님의 내공을 보니...아들도 오죽하겠어.

딸기 2004-10-2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나도 저 할배 진짜 소설은 한개도 안 읽어봤어. 방드르디를 읽어볼까 싶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은 터라, 어째 땡기질 않네.

갈대 2004-10-24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투르니에 할배도 에코 할배만큼 재밌네요. 물론 유머를 구사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지만요. 투르니에 할배의 자기비하성 유머는 마태님의 주특기인데, 암튼 언젠가 읽어봐야겠어요

로드무비 2004-10-2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면일기 저도 재밌게 읽었답니다.
시치미 뚝 뗀 유머가 좋아요.^^

딸기 2004-10-26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딱 들어맞는 표현이로군요. 시치미 뚝 뗀 유머!

panda78 2004-10-2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갑자기 마구 땡기네요. 전 <소크라테스와...>밖에 안 읽었는데, 예찬과 외면일기.. 장바구니로. ^^

딸기 2004-10-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판다님, 실은 저는 '소크라테스와...'가 제일 재밌었는걸요 ^^

에레혼 2004-10-2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인용해 놓은 대목 중 하나[어머니와의 대화...]는 일전에 제 '독서일기'에 옮겨 적은 대목이네요, 반가워라!
"20세기 문학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문학적 사건은?"이란 설문 조사에서 미셸 투르니에는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가 출판된 것"이라고 대답했다는군요. 그 설문 조사에서 1위와 2위로 꼽힌 사건[인물]은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의 출현"이었다는데, 투르니에의 자신감 넘치는[아마 유머를 실은 것이었을 테지만...] 답변이 투르니에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미셸 투르니에, 멋진 작가입니다. 장편 소설이 좀 부담되면 <꼬마 푸세의 가출>이란 단편집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어요. 단편의 팽팽한 밀도와 구성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 실려 있지요. 아, 이 노인네는 왜 이리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걸까요?

딸기 2004-10-27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새 투르니에 뿐 아니라, 장편소설 자체가 부담스럽거든요
하지만 꼬마 푸세...라면 읽고싶어지네요. 보관함에 넣어놔야겠어요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