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 대다수는 자기 자신의 고통과 관심 속에 파묻혀, 추후 그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실제로는 더 많이 알고 있었던 한 가지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 현상은 정확히 바로 그 시점에 발생했다.-290쪽
유태인들에게 폭력이 가해지고 차별 조치가 취해지기는 했어도, 그들을 전면적으로 제거할 체계적인 정책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전쟁 기간에 변화되었다. 한편으로는 정복지가 확대됨에 따라 (특히 동유럽의) 더욱 많은 유태인 공동체가 독일의 통치 영역 속으로 편입되었다. 그에 따라 '유태인 문제'는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다른 한편,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환경이 유태인 문제에 대한 보다 과격한 해결안을 촉구했다.-290쪽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크루프, 보르지히, 지멘스 같은 많은 독일 기업들에게 노동력을 공급하기도 했다. 요컨대 아우슈비츠는 격리되고 숨겨진 수용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수많은 폴란드인들과 독일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제3 제국이 움직이는 데에는 소수의 나치와 범죄자들을 넘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간여하고 있었던 것이다.-294쪽
그 일을 다만 공포와 수치심, 비판만을 허용하는 독특한 현상으로 치부하고, 실질적인 역사적 설명과 인과 관계의 설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학살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반응하면 역사적 책임과 죄의 구체적인 물음을 회피하게 된다. ... 히틀러는 그저 우연히 집권을 했던 것이 아니고, 그의 체제가 테러와 강압으로만 유지되었던 것도 아니다. 많은 독일인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아니면 방관적 태도를 통하여 홀로코스트가 지속되도록 만들었다.-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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