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엄마님 서재에 들렀다가 이 책이 새로 나온 걸 알게 됐다. 댓글 달다가, 혼자 괜히 감격해서 이렇게 주절거린다.

감격해버렸다. 이렇게 반가울데가.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책, 내 머릿속 책꽂이의 어느 한부분을 아프게 누르고 있는 책 중의 하나다. 벌써 몇년 째 잊고 있었지만, 이렇게 제목을 들으니 다시 머리 속에 멍이 드는 듯한, 종이에 잉크가 번져나가듯 그렇게 멍울 같은 것이 퍼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어릴 적 동서출판사에서 나왔던 에이브 문고 중에 저 책이 있었다. 에이브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당연한 얘기인 것 같지만, 이 시리즈는 그다지 널리 유행하지도 않았고, 아마 그다지 많이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책이 꽤 비쌌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은-- 주로 유럽이나 미국에서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을 모아놓은 거였다. 국민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읽으면 좋은 일종의 아동소설 혹은 넌픽션들이었는데, 전래동화들만 울궈먹던 내 어릴적 울나라 출판계에서 아동서적으로 이런 시리즈가 나왔다는 것은 놀라울 지경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 시리즈가, 시대를 너무 앞서 출간됐었다고 믿고 있다.

아무튼 그 중의 한 권이 저 책이었다. 지금 저 책의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영엄마님이 소개해놓으신 걸 보니 '그래, 이런 내용이었지' 싶은 정도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아주 담담하게, 어느날 갑자기 다가와버린 체계적인 폭력과 일상의 공포를, 한 아이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자의 죽음'이나 '안네의 일기' 같은 책들을 읽을 때 내 눈에는 어떤 종류의 낭만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끼어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 낭만의 안개 따윈 없었다. 책은 내게 나찌즘(내가 겪어보지도 않은!)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심어줬었다. 책은 인간의 본성, 인간의 무언가가 사회/국가 전체를 미치게/혹은 미친 척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린 내게 막연히 알려줬던 것 같다.

지금 내 에이브는 머나먼 시골집에 가 있다. 책이 몹시 망가졌을까 걱정된다. 조만간 불러들여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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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5-09-12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전에 시리즈 중에 한 권으로 나온 적이 있는 책이군요. 저는 본 적이 없는지라 다른 분들이 에이브 문고를 이야기 하실 때마다 너무 너무 궁금해요. 이 책 읽으시고 리뷰를 쓰실 예정이신지, 님이라면 좋은 리뷰를 써내실 것 같아요~ ^^

panda78 2005-09-12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브 엄청 유행해서 에이브 갖고 있는 사람들 참 많았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
저는 옆집이랑 엄마 친구분네서 다 빌려봤는데, 결혼하고 한권 두권 모아서 지금은 많이 있어요. ^^ 참 좋은 책이 많지요?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말고도 나치관련 책들이 참 많았지요. [아버지에게 네 가지 질문을]도 좋았구요. 저도 이 책 새로 나온 것 보고 반가워서 서평을 한번 써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

딸기 2005-09-1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에게 네가지 질문을'도 뒤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두 가지 정도의 새로운 버전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
판다님, 제가 살던 동네는 워낙 빈한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기중 제일 부자;;였던 저희 집에나 저 책이 있었지, 다른 애들은 꿈도 못 꾸었더랬어요. 제 경우도, 부모님에게 저에게 해주셨던 가장 큰 투자??가 바로 저 책을 사주신 거였답니다. 그 전에도, 그 뒤에도 제 부모님은 저의 교육을 위해 그런 목돈을 쓰신 적이 없거든요 ^^
그나저나 저 책을 한권 두권 모으셨다고요! 헌책방에 가면 있나요?
언젠가 이곳 서재에서도 쓴 적이 있는데, 너무나 좋아했던 에릭 크리스천 호가드의 '바이킹 소녀 헬가'와 '바이킹 호콘' 두 권을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결국 찾지 못했거든요. 그 두 권이라면 꼭 사고 싶은데...

panda78 2005-09-1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에 가면 꽤 있더랍니다. 전 고구마에서 20권정도, 잘 안가는 작은 온라인 헌책방에서 반질(43권)을 2만원에 건졌습죠. 혹시 호콘 못 찾으심 말씀해 주세요. 헌책이지만, 제가 드릴게요. ^^

panda78 2005-09-12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가는 없어서... ;;

딸기 2005-09-12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호콘만 갖고 계시군요. 작가는 호콘을 먼저 쓰고 뒤에 헬가를 썼다는데요, 호콘보다는 헬가가 역시 발전된 스토리 내지는 여성의 시각에서 본 거라서 그런가? 암튼, 헬가가 더 재밌었어요. 그대신 호콘은, 뒤에 바이킹 신화 요약본이 실려 있다는 점. ^^

panda78 2005-09-12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헬가도 눈에 띄면 사야겠군요. ^^
저는 꼬마 바이킹인가 그게 갖고 싶은데, 잘 안 보여요. 귀여운 삽화도 있었는데..

딸기 2005-09-1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거요. 그 책은 어릴 적에 '슬기돌이 비키'란 이름으로, TV에서 만화를 해주기도 했었던 걸로 비억해요. 슬기돌이 비키는 꼬마바이킹~ ♪

판다님이랑 저랑 실시간 대화를 나누고 있군요. 전화번호라도... (작업 풍으로)

panda78 2005-09-12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움하하- ^ㅂ^ 작업 풍!
그랬군요. 저는 그 만화는 전혀 기억이 안나구요. 책만 기억나는데 대장 아빠한테 만날 혼나는 작고 똘똘한 주인공(비키?)소년이 너무 귀여웠어요. ^^

딸기 2005-09-12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이 날리가 없지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했던 거니까요 ^^

마냐 2005-09-13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왜 나두 에이브에 열광했었는데...이렇게 기억이 안날까...흠. 딸기님도 애 하나 더 나아보심..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