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삶과 죽음
레지스 드브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시각과언어 / 1994년 11월
품절


덧없는 것에 대한 고뇌가 없다면 기억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으리라.-28쪽

기술과 신념의 공동의 진화는 우리를 보이는 것의 역사 속에 세 시기들로 이끌어간다. 즉 마술적 시선과 미적 시선, 그리고 경제적 시선으로. 첫번째 것은 우상을 불러내고 두번째 것은 예술을, 세번째 것은 영상적 시각을 불러내었다. 비전 이상으로, 거기에 세계의 조직이 있다.-47쪽

그림으로 그려진 감각에는 언어적 등가물이 없다-54쪽

클로망 롯세, '회화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선 관객에 따라 그 스스로 의미가 된다.'-56쪽

이미지가 그 고유한 수단을 통해 인정받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더 그것을 말하게 할 해설자들이 필요해질 것이다.-59쪽

하나의 이미지는 영원하고도 결정적으로, '최선의 독해'가 불가능한 수수께끼이다.-66쪽

발터 벤야민이 '기술적 복제 가능성'으로 인한 그 소멸을 한탄했던 이 거룩한 분위기 즉 '아우라'는 그가 그렇게 염려했던 대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인격화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작품들을 더이상 우상화하지 않는 대신 예술가들을 우상화하고 있다.-71쪽

이미지는 모든 사람과 신이 만들어가는 하루하루마다, 크고 작은 비용을 들여가며 무의식적인 모방성향을 제공한다. 자기와 동일시하는 상상적 모델의 문제는 결코 새롭지도 또 서구만의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빙하기의 젊은 들소 사냥꾼이 벽화를 보았기 때문에 쓸데없이 만용을 부리는 위험스런 짓들을 했었으리라는 점이다.-128쪽

어째서 단테는 '중세의 시인'이며 단 일년 차이 밖에 없는 그와 동시대 사람은 벌써 '르네상스 화가'라고 불리는 것일까? 왜 뉴턴의 연속적, 도일적이며 동위체적인 공간이 이미 그보다 한세기 전에 원근법의 발견자들에게서 찾아지는 것일까? 어째서 프라고나르의 가벼운 화풍은 단지 궁전의 각도를 바꿔놓을 뿐인데도 그토록 깊게 앙시앙 레짐의 몰락을 알리고 있는 것일까? 왜 풍경화가 위베르 로베르으 폐허들이 혁명의 파괴들을 예고하는 것일까? 왜 터너는 열역학보다 먼저 불의 은유들을 그려 보이는가? 왜 큐비스트의 작품에서 관점의 해체가 기초적인 인문학적 주제의 성급한 소멸을 재촉하는 것일까? 왜 미래파는 문학이기 이전에 파시즘의 한 형태인가? 왜 1939년 이전에 막스 에른스트가 그린 방향감각을 상실한 도시들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윤곽이 어른거리는 것일까?
왜냐하면 감각적 이미지는 이 세상 속에서 메아리치며, '열등한' 에너지의 원천으로부터 자양을 취하며, 따라서 '우월한' 정신 활동보다 덜 감시받거나 더 반칙적이며, 더 자유롭거나 덜 통제받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더 멀리 그리고 더 낮게 포착하는 레이더를 만든다.-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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