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북라인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번역자인 김정란교수는 이 책에 대해 '먹을 수 있는 철학책'이라면서 '철학지망생이었던 한 명의 작가가 써낸 매우 흥미로운 철학요리서'라는 설명을 붙였다. 벌써 지난 봄에, 이 책의 앞부분을 읽다가 그만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옆의 선배 자리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던 더미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이 책을 찾아냈다. 알고보니 그 더미는 내 '쓰레기들'이었는데. 책상과 책상 사이의 좁은 틈을 기준으로 '내 세상'과 '타인의 영역'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규칙이 많고 꼼꼼한 사람들의 얘기인데도 난 내가 그런 사람인줄 착각하고 있었다.

'장 콕토는 자기는 개보다는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경찰 고양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양치기 고양이라든지 사냥 고양이, 장님 길잡이 고양이, 서커스 고양이, 썰매 끄는 고양이도 없다. 고양이는 명예를 걸고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제일 맘에 드는 구절이다. '명예를 걸고'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로 작정'했다니! 존재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만이 저런 '명예'를 운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설픈 의식 따위를 벗어던진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이 바로 고양이에게 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느슨하면서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데, 앞의 '개와 고양이'처럼 두개씩의 대립항으로 여러 얘기를 풀어간다. '대립'은 단순하고 재미있지만 야박하고 극단적이고 풍요롭지가 못하다. 어쨌든 투르니에가 골라놓은 대립쌍들 중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꽤 있다. '지하실과 다락방'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같은 것들은 이 작가의 가벼우면서도 따뜻한 통찰력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어떤 지하실에든 숨겨진 행복의 약속이 있는 것이다. 한 집의 살아있는 뿌리가 지하실 안에 박혀 있다. 다락방에서는 추억과 시가 떠다닌다. 지하실의 상징적 동물은 쥐이다. 그런가 하면, 다락방의 동물은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새 올빼미이다'

어차피 아파트에 살고 있는 처지에, 프랑스의 지하실과 다락방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집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을테니까. 숨겨진 행복의 약속이 있는 자리와, 추억과 시가 떠다니는 자리. 추억과 시의 자리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붙여둔 것이 철학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놓으려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결리기는 하지만.

당신은 목욕을 좋아하는가, 샤워를 좋아하는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중에서는 어느 한쪽을 쉽게 골라낼 수 있겠지만(하긴, 요샌 트랜스젠더들도 있군) 목욕 쪽인지 샤워 쪽인지, 유목민인지 정착민인지, 일차적인간인지 이차적 인간인지, 우파적 인간인지 좌파적 인간인지, 관념론자인지 리얼리스트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나를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만 재미있다. 나는 낙관론자, 좌파적 인간, '인류 전체에게 말을 거는 넓은 정신의 소유자'를 꾸준히 동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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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1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운빈현님... 실은 지금 제 서재에 문제가 있어서 말이죠... 저거 옛날 책 읽고 옛날에 쓴 서평이예요. 뭔가 고장이 나서인지, 복구된 서평들이 제대로 안 올라가서 어지러워요... 저 책이 다시 나왔군요. :)

브리즈 2004-11-14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 님의 리뷰는 언제 봐도, 참 시원시원하네요. 공감이 가고 매력적인 생각들도 가득하고요.

가령, "집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을테니까. 숨겨진 행복의 약속이 있는 자리와, 추억과 시가 떠다니는 자리. 추억과 시의 자리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붙여둔 것이 철학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놓으려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결리기는 하지만"..

또 하나, "인류 전체에게 말을 거는 넓은 정신의 소유자를 꾸준히 동경하고 있다"는 말.여러모로 곱씹게 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추천합니다. :)

딸기 2004-11-1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즈님 칭찬은 정말 기분 좋다니까요. ^^

실은 저 책 때문에 그 뒤로 투르니에의 에세이집만 나오면 사버리는 버릇이 생긴 거예요. 저는 투르니에 책들 중에 저 책이 가장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