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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운즈 - 분쟁의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텔아비브 젊은이들의 자화상
루트 모단 지음, 김정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총알이 사람의 몸을 관통하면 앞쪽 총알 들어간 쪽의 상처보다 총알이 몸을 헤집고 나간 뒤쪽의 상처가 훨씬 크다고 한다. 총에 맞아본 적도 쏘아본 적도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 총알 나간 커다란 상처를 ‘엑시트 운즈(exit wounds)’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맞은 자국보다 그 이후의 나간 자국이 훨씬 크고 치명적인, 그런 상처를 말한다.
날카롭지 않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한 만화책인데, 제목에는 그런 상처를 그대로 끌어다놓았다. 책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폭력으로 따지면 세상 어느 곳 못잖게 지구상 폭력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는, 하지만 아프리카 난민촌 같은 곳과는 다르게 겉보기에는 멀쩡하다 못해 첨단으로 발전해 있는 이스라엘의 대도시.
배경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 책이 테러 얘기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얘기로 이뤄져 있다는 건 아니다. 책은 그저 텔아비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테러 같은 것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경은 아주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이 책은 그저 저런 배경을 바탕에 깐, 보통 젊은이들의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맞다.
인격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아버지와 절연하고 살던 한 청년이, 아버지의 애인이었다는 여자를 만난다. 내 아버지가 테러를 당해 죽었을지 모른다고? 그 인간 죽었다 해도 하등 섭섭할 것 없지만 그래도 또 모른 체 할 수가 없어서 어찌어찌 여자를 따라다니며 아버지의 흔적들을 추적하게 된다. 찾아다니면 다닐수록 아버지가 얼마나 인간성 나쁜 종류인지를 확인하게 될 뿐이지만.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묘한 관계의 두 남녀,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여러 사람의 삶의 단면들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엔 참 여러 종류의 아버지가 있고 가족 간에도 여러 종류의 갈등이 있다. 그런 아버지, 그런 갈등은 하나하나 특수한 사연들이지만 그런 아버지들(혹은 어머니들)의 존재, 그리고 그런 갈등들의 존재는 보편적이다. 특수한 배경 속의 보편적인 소재를 담은 것이 이 책이다.
모든 것이 비관적이거나 모든 것이 낙관적인 상황은 없다. 항상 슬픈 와중에도 희망은 있고 우울함 속에서도 재치와 낙관을 찾을 수 있으면 인생은 살만하다. 상처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 너의 상처로 나의 상처를 덮고 나의 아픔으로 너의 아픔을 다독일 수 있으면 되는 것. 마음의 ‘엑시트 운즈’를 치료하려면 상처들을 부비적거리는 수밖에 없다. 외상(外傷)과 내상(內傷)을 서로 보듬는 사이에 어느 새 책은 ‘치유의 이야기’로 가고 있다. ‘완쾌’는 없다. 상처를 후벼 팔지 보듬어 안을지, 앞날은 여백으로 남겨져 있다. 그래도 분위기는 해피 엔딩. 역시나 나는 해피 엔딩이 좋다.
요즘 내가 점점 살이 찌고 있어서 그런가? 만화 속 뚱뚱한 여주인공의 캐릭터도 좋다. 사랑이야기치고는 참신하면서도 정답다. 다만 나는 진즉에 자랐으니 주인공처럼 키까지 크게 자랄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난 이 책이 아주 재미있었고, 결론도 몹시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