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그늘 당대총서 12
김동춘 지음 / 당대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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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읽고 나서 밀린 숙제를 한 듯한 기분이 되는 것, 누구나 경험해봤을 것이다. <근대의 그늘>이 나한테는 밀린 숙제같은 책이었다.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책꽂이에 두께 3cm 짜리, 제법 독서열을 자극하는 필자의 이름이 보이는, 그것도 양장본의 책이 1년 가까이 꽂혀 있었으니 그동안 부담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숙제를 다 했다. 후다닥 해치우듯이, 그러나 주황색 싸인펜으로 장쯔이의 얼굴이 그려진 책갈피를 대고 밑줄을 쫙쫙 그어가면서 열심히 읽었다. 3cm의 사이사이에 그려진 것은 그늘진 거울에 비친 우울한 우리의 자화상, '한국의 근대'이다.

대학교 때 김진균 교수의 짤막한 논문을 읽으면서 감탄을 했었는데 우리나라의 유별난 교육열이 반공체제와 관련있음을 조명한 글이었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근대의 그늘'에서 교육열을 비롯한 그늘진 얼굴의 내면을 아주 건조한 어조로 파헤친다. 고등학생의 3분의1은 법대나 정치학과를 가고 싶어하고(물론 지금은 좀 다르겠지만), 부모들은 내 아이가 고시에 합격했으면 하면서도 뇌물공여-수수와 탈법을 자행하는 현실에 대해 '근대화의 오류'라는 칼날을 들이댄다.

아는 얘기라면, 다 아는 얘기다. 그런데 읽고 나니 또 답답하다. 우리의 사상적 지평이 무지하게 좁다는 것은 다 아는 얘기인데, 우리의 근대가 식민지 시절부터 왜곡돼 왔다는 것은 대학 입학 이후로 싫도록 들은 이야기인데, 아주 논리정연한 선생이 옆에 앉아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들려주니 다시 화가 난다.

그래서, 이제 와서 어쩌란 이야기인가. 가야 할 길은 멀고 해야할 길은 많은데 기껏 매니큐어를 무슨 색으로 바를까 정도나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해서이기도 하고, 거대담론 앞에서 느껴지는 무력함이 너무 크게 다가와서이기도 하다. 한국의 근대 내지는 민족주의에 대한 글을 읽을 때마다 번져나는 짜증의 일종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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