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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바: 리처드 파인만의 마지막 여행
랄프 레이튼 지음, 안동완 옮김 / 해나무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내게서 떠나가지 않는다. 오래동안 생각해오던 자금성에도 가고 싶고,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있는 이집트, 이란, 이라크, 터키에도 가보고 싶고, 시원한 밤바람 맞으러 홍콩에도 가보고 싶고, 축구 보러 스페인에도 가고 싶고. 현실에서 떠나고 싶은 생각과는 좀 다르지만 어디에든 가고 싶다.
<투바-리처드 파인만의 마지막 여행>(랠프 레이튼. 해나무刊)이 가져다준 위안이 있다면, 굳이 <떠나지> 않아도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리교사인 랠프 레이튼과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그리고 몇몇 친구들은 우연히 투바라는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냉전이 치열했던 시절, 소련의 한복판 오지(奧地)를 찾아가겠다는 발칙한 착상. 책에서는 누차 <수도 Kyzyl의 철자에 모음이 없다는 점> 때문에 투바에 흥미를 갖게 됐다고 강조하지만, 다른 저술들에서 나타난 파인만의 성향으로 봤을 때 아마도 그것은 핑계일 뿐일 것이다. 상당량의 지적 허영심과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 정신 따위가 노학자의 욕구에 불을 붙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2차 대전 때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고 80년대에는 챌린저호 폭발사건을 조사하는 정부 위원회의 자문 역을 맡았던(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Mr. 파인만이 소련을 방문한다--그의 반국가주의, 반골 기질, 개구쟁이 정신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아이디어가 어디 있겠는가.
<투바 아니면 죽음을(Tuva or Bust!)>이라는 모토 아래 모인 일군의 사람들은 <투사모(Friends of Tuva)>(이건 번역자의 재치다)의 멤버가 되어 투바 여행을 준비한다. 사전 여러권을 징검다리 삼아 힘겹게 투바어로 편지를 쓰고, 투바와 관련된 것이라면 위성사진이든 책이든 그림이든 긁어모으고, 투바와 관계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수년의 시간 동안 이렇게 쌓인 정보들로 이들은 투바에 다가간다.
책을 읽던 초반부에는 참 재미있어서 <아껴 가면서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조금 재미가 식었다. <우린 이토록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이런 열정을 갖고, 이렇게 힘들여 정보를 모았다>라는 뉘앙스가 괜히 거슬렸던 까닭일까.
파인만의 풍모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도 당초의 흥미를 반감케 했다. 책 제목에 파인만의 이름이 들어가 있고 실제 저자가 파인만에 바치는 헌사 식으로 글을 쓰기는 했지만, 80년대라면 파인만은 이미 늙어 수차례 암수술을 받았던 시기다. 때문에 이 책의 주요 줄거리를 움직이는 인물은 아니고, 배경의 큰 나무 정도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책 읽는 과정을 나의 <재미>를 기준 삼아 그래프로 그린다면 아마도 상승-하강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을 중반 이후의 부분(사실 별로 길지는 않은 책인데). 갑자기 다시 재미가 동했던 것은, 이 작자의 <잘난 척>이 흔한 과시욕이 아닌 장난기임을 알게되면서부터다. 투바 여행계획이 진전되는 단계들 속에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을 슬쩍슬쩍 던져넣는 방식의 글쓰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여행>이 종반을 향해 달려갈 무렵, 우리의 스타 파인만은 암으로 인해 <빌려온 시간>(수술로 연장시킨 수명 만큼)을 다한채 세상을 떠난다. 담담함 속에 스며진 슬픔 같은 것을, 유머러스함 속에서 느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큰 슬픔 아닌가. 재작년부터 계속된 파인만에 대한 내 관심도, 오늘 파인만의 죽음을 <접하면서> 슬픔과 섭섭함으로 끝을 맺었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정작 레이튼의 투바 구경은 책의 에필로그에만 간략히 언급됐는데,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무려 11년이나 걸렸던 이들의 모험은 충분히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