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헴은 미국대사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세 개의 기둥’ 전략안을 마련했다. -몽골 국경의 방어문제는 중국의 재래식 군사위협보다는 중국인 이주와 다국적 테러리즘을 포함한 불법 국경유입에 더 신경을 쓴다. 중국 서부의 위구르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중국의 억압을 받는 무슬림 위구르족은 체첸 마피아와 알카에다의 도움을 받아 중앙아시아 테러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된다. -몽골군을 세계 평화유지군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그것은 몽골군을 국제무대에 진출시켜 탐욕스런 주변 강국들(러시아와 중국)에 맞설 수 있는 외교적 보호막을 제공해주기 위해서다. -국제 재난에 대처할 수 있도록 몽골 자체의 역량을 함양시킨다.-151쪽
스탄 자 붙은 나라들은 기능장애를 일으키고 있는 일인독재국가들의 집합체였다. 그와는 달리 인종 간 갈등이 별로 없는 몽골에서는 징기즈 칸이 나랄르 하나로 결집시키는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징기즈 칸은 인종주의자라든가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의 부담이 없었다. 그는 그저 정복자일 뿐이었다. ... 소련은 몽골이 위성국이었을 때 대중들의 징기즈 칸 경배를 금지시켰다. 그 반작용으로 소련이 붕괴되자마자 징기즈 칸은 몽골의 위대한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징기즈 칸의 얼굴은 카펫, 제단, 지폐, 맥주, 보드카 병 등 안 찍혀있는 곳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민주주의 정치인들의 존재를 압도하여 거물이나 독재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기를 꺾어놓는 역할을 했다. 그것이 몽골의 민주주의를 든든하게 했다.-156쪽
몽골인들은 70년 동안 소련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러시아보다는 중국을 더 두려워했다. 중국은 티베트와 신장웨이우얼 지역으로 자국민들을 대거 이주시킨 것처럼 내몽골 지역에도 한족을 유입시켰다. 몽골은 다음 차례가 자신들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들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같은 불교를 믿는 티베트의 운명이었다. 몽골의 국가안보 원칙에는 ‘인종의 순수함’을 강조하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주족과 같은 침투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몽골인들은 중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사스에 대해 편집증적 공포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전염병 하나면 몽골같이 인구 희박한 나라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될 것이고 그것이 결국 중국의 인구 정복을 도와주는 또 하나의 길이 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70년 동안 우리 정치를 지배하면서도 몽골을 소련에 편입시키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중국은 우리를 흡수하려 들 겁니다." 몽골은 내적으로 약한 중국에 대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서부 무슬림 위구르 투르크족이 중앙아시아 테러리즘과 마약 밀매를 확산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다.-167쪽
칸다하르는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있는 유일한 그리스 지명으로, 알렉산드로스의 현지 이름인 이스칸데르에서 유래했다. ... 1747년 나디르 샤가 암살되자 아브달리족 부대 지휘간 아마드 칸은 4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빠져나와 남동쪽의 칸다하르로 향했다. 그는 스물 네 살에 아프간의 왕 아마드 샤가 되었다. 칸다하르에 정착한 아마드 샤는 카불과 헤라트를 정복하고 진주를 뜻하는 말에서 나온 두라니 왕조를 세웠다. 그가 이끄는 아브달리 부족은 이후 두라니족이 되었다. 현대의 아프간은 두라니 왕조에서 생겨난 것이다. 두라니족은 모하메드 다우드 총리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최후의 왕 자히르 샤를 타도한 1973년까지 아프간을 지배했다. 하미드 카르자이도 두라니족의 하위 부족인 포폴자이족 족장이므로 아프간 왕족이라 할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도 아마드 샤와 급진적인 탈레반 만큼이나 칸다하르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칸다하르는 예나 지금이나 북서쪽 헤라트의 페르시아 세력 혹은 북동쪽 카불의 인도 아대륙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아프간인들의 순수한 고향으로 인식돼 왔다.-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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