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최전선 - 지상의 미군들
로버트 카플란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7년 8월
절판


사나는 채색유리 격자세공과 석고 프리즈 장식이 된 현무암과 흙벽돌 건물들이 늘어선 것이, 꼭 동화 속 아라비아 나라를 보는 듯했다.
사나 도심에는 값싼 서구풍 나일론 의복을 입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값싼 폴리에스테르 의복을 입는다는 것은 부족적 정체성이 와해되고 도시화로 인한 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나 시민들은 서구풍 복장을 하지 않고 예전대로 바둑무늬 머릿수건이나 카슈미르 숄을 쓰고 있었다. 남자들은 허리띠 중앙에 장식용으로 구부러진 단검 잠비야를 꽂고 있었다. -31~32쪽

“테러리즘은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주도하는 기업활동이예요. 예멘에는 적극적이고 잇속에 밝고 잘 무장된 2천여만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웃한 사우디아라비아인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죠. 그것이 예멘의 미래예요. 그것은 또 리야드 정부를 떨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45쪽

나는 무르세드 족장이 구해준 운전기사 압둘라와 함께 사나를 떠나 사암, 검은 용암 절벽, 사막에 우뚝 솟은 산, 바람에 깎여 가파른 계곡이 된 메사(꼭대기가 평탄한 탁상 지형)가 미로처럼 뒤얽힌 지역으로 들어갔다. 계곡들은 어느새 성서 속의 시바 왕국으로 여겨지고 있는 폐허가 곳곳에 산재한 회색 황무지로 변했다. 시장에 들어섰는가 했더니 어느새 나는 콘크리트 블록의 지저분한 상점들 한복판에 서있었다.
... 잠비야는 날이 무디고 칼집에서 빼기가 쉽지 않아 무기로는 잘 쓰이지 않고 부족적 관습의 힘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부족적 관습은 예멘의 묻지마 범죄율을 낮춰주는 사회적 접착제 구실을 하고 있었다. AK 자동소총은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50쪽

예멘은 약 8천만 기의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예멘인 한 사람당 4기의 총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 당시 미국 정보계는 예멘의 1인당 자동소총과 수류탄 보유율이 세계 최고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 검문소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은 시에라리온에서 본 병사들처럼 술에 취해있거나 광포하지 않았고, 옛소련 그루지야의 도마뱀 눈을 한 마피아 같은 사람들과도 달랐다. 예멘은 실패한 국가가 아니었다. 예멘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처럼 조금 허약한 나라일 뿐이었다. 그것이 내 눈앞에 계속 펼쳐지고 있는 경치를 그토록 압도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였다.-51쪽

벌집 모양의 벽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마리브의 거대한 댐은 기원전 8세기를 시작으로 1천년 동안 지면의 정교한 관개시설과 더불어 이 사막을 푸르게 만들어 주었다. 시바 왕국은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이나 튀니지의 카르타고에 못지않게 매혹적인 고대문명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파라오가 다스린 이집트는 아라비아 반도의 이 구석진 땅을 푼트의 땅(신의 땅)이라 불렀고, 히브리인들은 오빌 Ophir 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예멘의 내적 혼란은 이같은 역사의 자연적 산물이 아닐까. 그리고 이 자연적 산물은 다시 지형의 결과물이 아닐까.
... 면적은 사우디의 4분의1 밖에 안 되지만 인구는 사우디와 비슷한 예멘은 고대부터 아라비아 반도의 인구 밀집지역이었다. 드넓게 퍼져 있는 현무암 고원이 화산암과 모래성 형태를 이루며 우뚝 솟아오른 이곳은 오아시스 연결고리가 형성돼 있어 고대부터 도시에는 늘 사람이 북적거렸다. -56쪽

예멘 왕국들은 고유의 거대한 향료 하이웨이를 타고 부국이 되었다. 프레야 스타크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제국주의자가 되었고, 귀족이 되었으며, 대도시 건설자가 되었고, 소말릴랜드와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멘의 부족왕국들(시바, 하드라마우트, 힘야르 왕국 등)은 제국주의자로 행동했음에도, 서로에 대한 견제가 심하여 어느 왕국도 현재의 예멘을 통째로 지배할만한 제국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 살육전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예멘 북부에서는 1962년부터 1968년까지 보수적인 이맘과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지원을 받은 혁명군부 간에 내전(이것이 차츰 일상적인 부족 분쟁으로 발전해갔다)이 일어나 20만명이 목숨을 잃은 뒤에야 군부가 통치하는 예멘 아랍공화국이 들어섰다. 예멘 남부에는 영국 보호령 아덴에 소련 지원을 받은 예멘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986년, 예멘 공산당의 지도부를 교체하려는 소련의 시도로 그곳에서는 한달간 부족 전쟁이 일어나 예멘인 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57쪽

1990년 북예멘과 남예멘은 소련 붕괴에 뒤이어 공산정권 남예멘이 와해되면서 공식적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동유럽과 달리 예멘의 민주주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 1994년 예멘에서는 또다시 내전이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북예멘은 7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승리를 거두었다.
... 예멘의 가족, 마을, 부족은 고대부터 이 나라를 분열시켜온 봉건적인 3대 악재였다. 그래도 한가지 긍정적 요소가 있다면 예멘에는 그로 인해 이라크와 시리아 같은 과도하게 중앙집권적인 전제권력이 들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58쪽

편협한 부족 분쟁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길이가 16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사우디 부근 와디 하드라마우트 오아시스는 기원전 1천년부터 인간이 정주해 살며 서양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옥한 코즈모폴리턴 세계의 일부를 이루었다. 현대에 생겨난 인도네시아의 급진적 이슬람만 해도 18세기 하드라마우트 상인들이 세운 이슬람 교육센터에 유래를 두고 있고, 하드라마우트 상인들의 21세기 사업망 역시 고대의 시바와 시미아르의 향료상인들이 시작한 교역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업망은 또 오사마 빈 라덴 일가가 근처의 와디 도안 출신이듯, 알카에다 같은 단체들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편리한 통로가 되어주기도 했다.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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