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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아사다 지로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하철. 가장 서민적인 교통수단이 역사를 넘나드는 마법의 통로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여행에는 어떠한 낭만이나 환타지도 없다. 한 남자가 아버지의 궤적을 거꾸로 밟아가며 보고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인생을 보게 되는, 가슴 답답하고 두려운 여행이다.
고누마 신지는 어릴적부터 대재벌인 아버지의 횡포와 독선에 짓눌려오다가 가출을 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은 집을 버리는 것이었고, 또 아버지가 줄 수 있는 막대한 재력과 특권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신지는 아버지에게 구박만 받았던 어머니와 함께 조그만 집에 살면서 지하철 구내상가에 사무실을 둔 속옷회사의 보잘것없는 샐러리맨으로 살아나간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 마음 좋은 속옷회사의 사장은 더이상 '발전'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는 소시민에 불과하고, 신지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디자이너 미치코는 좁은 물에서 실력발휘조차 못하고 사는 떠돌이 고아같은 여자다. 신지의 어머니는 죽은 맏아들에 대한 기억에 머물고 있고, 동생 게이조는 아버지곁에 남아 대기업을 이끌고 있으면서도 소심증과 나약함을 어쩌지 못하는 불안정한 재벌2세가 되어 있다.
동창회. 졸업 이후에 사회적 지위와 명예, 돈을 얼마만큼 갖고 있는지를 과시하기 위한 '명함돌리기' 행사장. 신지는 동창회장에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술에 취해 지하철을 탄다. 이 때부터 신지의 여행이 시작된다. 태평양전쟁 직후 미군점령기의 암시장,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만주, 전쟁 직전 비참한 공황기의 풍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하철 여행에서 만난 '아무르'라는 다부진 청년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깨닫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짧은 여행을 통해 신지는 독선과 고집과 폭력으로 똘똘뭉친 아버지라는 인물을 이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험한 세상을 헤쳐온 인물'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모순'은 신지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전쟁 때부터 이미 씨앗을 품고 있었다.
가족. 피로 연결된 이 조직은 제도로부터 충실한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얼마나 허약한지. 철옹성처럼 든든한 가족이 과연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모든 가족은 균열의 틈새를 갖고 있다. 신지 가족의 균열은 어릴 적 형의 자살로 일찌감치 터져나온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미치코, 갑작스레 신지의 여행에 동행하게 된 불륜의 여인이 신지의 배다른 여동생일 줄이야. 시간을 되돌이켜 미치코는 자신의 출생을 막고 사라져버리지만 가족의 균열을 그렇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사다 지로는 <철도원>과 <프리즌호텔> <천국까지 100마일>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가족의 문제에 깊이 파고든다.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사슬인 듯 보이면서도 실상은 곳곳이 갈라지고 터져나간 허약한 성(城). 사회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들이 얼키고 설켜 이 성에 균열을 가져오고, 그것은 또 종종 개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곤 한다.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 놓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거니와 균열의 틈새에서도 실낱같이 이어지는 사람에 대한 애정, 한사람 한사람이 간직한 '역사'에 대한 애정. 허울 뿐인 가족이 아닌 진정한 인간애의 복원, 작가가 꿈꾸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