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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호텔 - 겨울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 우리문학사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란 대체 어떤건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중에 그렇게 인간을 통째로 내어던진 그런 관계가 있었나 의문이 드네요.
어릴 적에 엄마는 동네 건달이랑 도망쳐버리고, 아빠는 공장일밖에 모릅니다. 아홉살때부터 40줄에 접어들기까지 못생긴 새엄마를 두들겨패는게 일인 남자가 있습니다.
이 남자는 소설가로 성공을 한 다음에 한 여자를 샀습니다. 기요코라는 그 여자는 머리가 모자라는 미인입니다. 기요코의 남편은 살인을 두 차례나 저지르고 감옥에 갔습니다. 언제 나올지, 아니면 아예 못 나올지 모릅니다.
소설가는 가난한(우리 식으로 말하면 생활보호대상자) 기요코에게 매달 돈을 주는 대신, 기요코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비서로 부려먹고 생각 날 때마다 때리고 폭언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섹스파트너로 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비뚤어진 소설가의 악행 정도였는데, 그만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기요코에게는 병든 모친과 여섯살난 딸 미카가 있습니다. 소설가는 피 한방울 안 섞인 미카에게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마다 미카를 쥐어박고 구박합니다. 사실은 미카랑 기요코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요.
'가을 이야기'에서, 소설가는 미카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고 허락합니다. 제가 궁금한 건,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끈끈한 관계로 여겨지는 가족이란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겁니다. 소설가와 어린 미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눈에 띄게 감동적으로 쓰여진 것 같지도 않은데, 작가가 사람의 마음을 야쿠자들이 쓰는 사시미칼 같은 걸로 콕콕 건드립니다.
겨울이야기에서 감옥호텔을 다시 찾은 소설가, 바보 미녀 기요코를 너무 사랑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알 수 없어서 불쌍한 미녀를 눈속에 파묻어 죽이려고 했다가 결국 다시 파냈습니다. 눈덮인 설원에서 소설가는 기요코를 끌어안고 엉엉 울면서 청혼을 했습니다.
제가 읽은 몇 안되는 일본 소설을 볼 때, 작가들이 참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라카미 류도 그랬고, 하루키, 바나나 모두 참 잘 씁니다.
아사다 지로 역시 글을 잘 씁니다. 내용은 잠시 접어두고, 글 솜씨만 놓고 보자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퍼즐맞추기를 좋아하는 제 취향에는 딱입니다. 앞에 나왔던 노래가사, 편지의 한 구절, 말 한마디, 등장인물의 생김새를 묘사한 표현 등등이 뒤에 가서 착착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꼭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스토리가 단단합니다. 딴 건 다 치우고 줄거리만 쭉 늘어놔봤을 때 얘기가 되는 소설과, 줄거리만 써놓고 보면 굉장히 유치한 '불륜소설'은 읽을때의 재미가 확연히 다르죠.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른바 80년대 세대라는 젊은 작가들이 이렇게 일본 것을 베껴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일본소설을 읽은 저의 첫번째 느낌이었습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장르가 다양하다는 겁니다. 소재나 상상력 면에서 말이죠.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대표적인 국내 작가들은 문장이나 단어 하나하나를 열심히 다듬는데 비해서 상상력은 절대빈곤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나나도 그렇고 하루키도 그렇고 아사다 지로도 그렇고, 독특하다는 느낌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일본 소설들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규칙성은, 소재나 표현이 구체적이라는 겁니다. 저는 '의식의 흐름'류(관념적이고 표현도 정교하지 못하면서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아주 구체적인 표현이 들어간 일본 소설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 역시 일본문화를 근거없이 추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긴 하지만요.
요즘 계속 감옥호텔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곳을 떠나기가 싫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