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바라따 2 - 1장 태동: 신들은 영생을 위해 불사주를 구하고, 인간들은 사랑과 명예를 위해 삶을 버린다 마하바라따 2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2p.465

    쪽수가 이상하게 붙어 있다. 1권은 p.506에서 끝이 나는데(부록 4까지 포함시킨다면 p.510에서 끝난다.) 2권은 p.465에서 시작한다. 부록의 쪽수는 표기를 다르게 하는 게 책의 연속성에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면 각 권 모두 p.1에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색인 작업

    마하바라따에는 엄청난 수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이는 조용히 등장했다 이야기에서 사라진 후, 갑자기 등장해서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고 누구는 갑자기 등장하는 것 같은데 주인공들의 운명을 뒤집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전자의 대표적 인물이 암바라면, 후자는 샤꾸니가 될 것이다.

 

    암바는 1-96(마하바라따2p.480)에서 처음 등장하고 곧 사라진다. 이때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라 생각하게 되지만, 후에, 꽤 후에, 다시 등장해서 주요 인물을 없애는 역할을 맡는다. 암바를 기억하면 다행이지만, 그냥 흘려보낸 독자들은 암바를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마치 기계 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의 역할을 맡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이정도 인물엔 약간의 주석, 아니 이정표를 달아주는 게 이 거대한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에 조금 언급해봤다. 왜냐하면 역자는 제대로 등장조차 하지 않은 와수데와도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인물들에 주석을 달기란 쉽지도 않고, 때로는 내용 누설이 필요하게 되어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김이 빠지기 쉽다. 때문에 마하바라따에는 주석보다 색인 작업이 더 필요할 듯하다.

 

    마하바라따를 각색한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암바를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그 이유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 책은 읽다가 멈추고 다시 앞으로 갈 수 있지만, 영화와 드라마는 그냥 속절없이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Babubhai Mistri 감독의 1965년 영화에서 암바는 영화의 절정부인 꾸루꾸쉐트라 전투에서 이런 기괴한 모습으로 잠시 등장한다. 이렇게 묘사할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걸 밝히면 내용 누설이니 그냥 넘어간다.

 

 

 

B. R. Chopra가 제작한 1988년 드라마에서는 원래 정혼한 샬와 왕에게 갔다가 다시 쫓겨난 후 비슈마를 저주하며 떠나는 장면까지 묘사한다. 한 여인이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남자들 사이의 유치한 자존심) 사이에 끼어 본의 아니게 농락당하는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Peter Brook이 연출한 1989년 영화에서도 위의 드라마와 같은 상황까지 묘사된다. 다른 점이라면 매우 담백하게 절제된 대사와 연기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암바의 마지막 대사 “Never forget me, Bhishma. I am your death.”가 큰 울림을 준다. 암바의 대사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가 트리니티 핵폭탄 실험을 두고 했던 말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 놀라운 비문(非文)바가와드 기따에서 따온 것이며, 마하바라따에도 포함되어 있다.

 

 

 

Swastik Pictures 제작한 2013년 드라마에서는 더욱 더 적극적이고 대담무쌍한 암바를 볼 수 있다. 책에서는 도도한 암바라고 단 한마디로 묘사했지만, 21세기 드라마답게 매우 입체적으로 그렸다. 암바는 2회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샬와 왕과의 밤중 데이트를 위해 갈대밭을 홀랑 태우는 정열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야기도 약간 변형 되어서, 암바는 정혼자인 샬와 왕의 복수(?!)를 위해 비슈마를 처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책에서는 뒤에 나올 이야기들 몇몇을 조금 당겨썼다. 특히 비슈마와 빠라슈라마와의 대결, 그리고 이를 중재하는 마하데와 쉬와가 등장하는 장면은, James Cameron 감독이 이 이야기를 그토록 영화로 옮기고 싶어 하는 가에 대한 힌트가 될 것이다. (영화에서 특수효과의 단계는 이제 얼마만큼 사실적으로 그리는가의 영역에서 이제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의 영역으로 넘어온 지 오래다. 이제는 상상력의 콘텐츠가 중요해졌으며, 마하바라따는 그런 상상력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샤꾸니2-43(3p.178)에서 본격적으로 등장을 하지만, 이미 1-103(2p.502)에서 첫 등장을 한 바 있다. (지금까지 읽어본 바에 따르면) 마하바라따에는 미지의 인물이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사실 갑작스러운 등장인물이나 사건이 갑자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것은 작품의 격을 떨어뜨린다.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이라던가, 영화의 속편에서 볼 수 있는 죽은 주인공의 쌍둥이 동생이 갑자기 언급된다든지.) 하지만 마하바라따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마하바라따가 완성된 1,000여 년 간, 수많은 위야샤들이 이런 것들을 방지해놓았다. 이 등장인물이 어디에서 처음 등장했고, 누구에게 처음으로 언급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라도 색인이 필요하다.

 

 

 

Babubhai Mistri 감독의 1965년 영화에서 샤꾸니는 영화의 첫 장면, 까우라와들과 빤다와들의 무술 대회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로도 계속 등장, 까우라와들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부추기는 역을 맡는다. 한 번에 척 봐도 악당같이 생겼고, 노름에 쓰이는 주사위를 부적처럼 사용한다.

 

 

 

B. R. Chopra가 제작한 1988년 드라마에서 샤꾸니는 간다라 왕국의 왕이자 아버지인 수발라와 노름을 하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하며, 이후 비슈마가 등장해 수발라의 딸 간다리와 드르따라슈트라간에 중매를 선다. 첫 등장에서 샤꾸니가 수발라에게 노름 기술을 배우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후에 노름이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임을 알려준다. 이 장면에서만큼은 샤꾸니는 평범하게 나오지만, 후에 지속적으로 등장, 드르따라슈트라와 빤두의 사이를 이간질시킨다.

 

 

 

Peter Brook이 연출한 1989년 영화에서는 주사위 노름직전에 등장한다. 간다리에게 “Shakuni, your brother!”하며 간단명료하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극으로 슬그머니 스며든다. 이 영화에서 샤꾸니는 중요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전개를 위한 어떤 분기점 같은 역할을 맡는다.

 

 

 

Swastik Pictures 제작한 2013년 드라마에서 샤꾸니는 산을 타며 간다리 왕국으로 향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밧줄이 끊어지려 하자 자신이 살기 위해 가차 없이 밑에 있는 부하를 떨어뜨리는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후 모습은 반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왕성에 도착한 샤꾸니는 부모에게 드르따라슈트라와 간다리의 결혼을 막는다. 이유는 드르따라슈트라가 장님이기 때문. 동생의 행복을 위해 결혼을 반대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간다리는 결혼을 선택한다. 냉혈한이긴 하지만 동생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따뜻한 샤꾸니는 동생을 하스띠나뿌라로 데리고 가 결혼식을 올린다. 샤꾸니가 드르따라슈트라와 간다리의 자식들인 까우라와들의 편에 서서 빤다와들을 망치려고 하는 이유가 이 드라마의 짧은 인물 설명에서 드러난다.

 

  

    1-143(2p.635)의 가토뜨까짜, 1-213(2p.870)의 아비만유 또한 후에 중요한 역을 맡는 인물들이므로, 간단한 언급 혹은 색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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