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바라따 2 - 1장 태동: 신들은 영생을 위해 불사주를 구하고, 인간들은 사랑과 명예를 위해 삶을 버린다 마하바라따 2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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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대로다. 『마하바라따』는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고, 선과 악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지도 않는다.  『마하바라따』는 그냥 있는 그대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나열할 뿐이지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마하바라따』까 문학이라기 보다는 이띠하사("실제로 있었던 일")로 불리는 이유가 아닐까.

 

   1-74(『마하바라따』 1권 p.370)에 있는 아수라들의 스승인 우샤나스 슈끄라와 그의 딸 데와야니의 대화를 한 번 보자. 언젠가 데와야니는 아수라의 왕 우르샤빠르완의 딸 샤르미슈타와 언쟁을 벌여 호되게 당했다. 분해서 울고 있는 딸에게 대선인 슈끄라는 이런 말을 하며 딸을 위로한다.

 

   데와야니야, 다른 이의 어떠한 극적인 말도 견디는 자는 모든 것을 다 이길 수 있는 사람이란다. 그래서 현자들은 치솟는 화를 말 다루듯 잘 다루는 사람을 몰이꾼이라고 한단다. 말을 고삐에 매어두는 사람을 몰이꾼이라고 하지 않는단다. 데와야니여, 치솟는 화를 평정심으로 다스리는 자가 모든 것을 다 이기는 사람인 줄 알거라. 치솟는 화를 용서로 훌훌 털어버리는 것은 뱀이 낡은 옷을 벗어버리는 것과 같다. 화를 누르는 사람, 다른 이의 비난에 무심한 사람, 괴롭힘을 당해도 그를 다시 괴롭히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풍요를 얻을 것이다. 백 년 동안 지치지 않고 달마다 희생제를 지내는 사람과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는 사람을 비교한다면 화내지 않는 사람이 당연히 더 훌륭한 사람이란다.

   암 것도 모르는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이 아무리 으르렁 거리고 싸워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들의 싸움을 모방하지 않는단다. 아이들은 어떤 것이 힘 있는 것인지, 또 어떤 것이 나약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출력해서 책상 앞에 딱 붙여 생각날 때마다 읽고 싶은 잠언이다. 대부분의 고전문학이었다면, 여기서 멈춰 큰 교훈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다음에 데와야니가 받아치는 말이 걸작이다.

 

   아버님, 제가 비록 어리긴 하지만 여러 다르마가 어떻게 다른지는 압니다. 또한 평정할 때와 비방할 때 무엇이 힘 있고 무엇이 나약한 것인지도 압니다. 그러나 제자가 제자답지 못한 행동을 할 때 스승은 그들을 용서해서는 안 된답니다. 이런 이유로 전 행동거지가 바르지 않는 자들 틈에서 지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최상의 것을 구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거동과 태생을 잘 알아주는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르샤빠르완의 딸은 제게 너무나 무서운 막된 말을 했습니다. 그보다 더 참기 어려운 일은 삼계엔 없을 것입니다. 경쟁자가 잘되는 꼴을 보며 그를 칭송하는 것은 못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마치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이 할 법한 말을 천역덕스럽게 한다. 그래도, 이런 말을 들었으면 위대한 브라만이신 슈끄라는 딸을 바라 잡아주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는다. 슈끄라는 이 말을 듣고 우르샤빠르완을 찾아가 딸이 모욕을 받았으니 이곳을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결국 슈끄라는 남아있는 조건으로 샤르미슈타를 딸의 하녀로 삼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 모욕을 당했을 때, 슈끄라의 말대로 참아야 옳은 것인가? 아니면, 데와야니처럼 복수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 둘 중 누가 잘못됐나? 『마하바라따』는 쉽사리 가치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마하바라따』의 주인공은 빤다와들이고, 반대편에서 적대 관계를 맺는 이들이 까우라와들이다. 대부분의 문학이(특히나 고전문학) 선과 악의 관계를 명확히 맺는 반면, 『마하바라따』는 그러지 않는다. 아니, 빤다와들이 선, 까우라와들을 악으로 명시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들은 그렇게 쉽게 가치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까우라와들은 빤다와들을 죽이기 위해, 와라나와따에 큰 저택을 짓고 빤다와들을 그곳으로 보낸다. 빤다와들은 까우라와들의 계책을 눈치 챘지만, 모른척하고 그곳으로 간다. 그 저택에 보시를 받으러 온 '니샤다의 여인과 다섯 명의 아들'이 대접을 받고 술에 취에 잠들자 빤다와들을 저택을 불로 태워버리고 도망친다. 저택에는 빤다와들의 숫자와 같은 여섯 구의 시체가 발견되고, 까우라와들은 빤다와들을 드디어 없앴다고 좋아하며, 빤다와들은 까우라와들의 마수에서 당분간을 피할 수 있을 거라며 안심한다.

 

   다 좋은데, 그럼 그 때 죽은 여섯 명의 목숨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빤다와들이 선이라면, 이들을 구했어야 옳지 않은가? 이들이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스스로 방화를 저지르고 이들의 시체를 이용하는 것은 위대한 영웅들의 행동이 아니다.

 

   끄르슈나와 아르주나가 저지르는 칸다와 숲에서의 학살은? 이들의 모습은 흡사 악귀와도 같다. 이 부분은 선악의 문제라기 보다는 상위 다르마와 하위 다르마의 차이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일반적인 선악의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개념들은 모두 다르마로 통합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각자에겐 각자의 다르마가 있고, 모두들 그 다르마를 따르려고 노력한다. 내가 따르는 다르마는 남들의 것과 다를 수 있고, 나는 내 다르마가 최선이라 생각하지만, 남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그 수많은 다르마가 충돌하면서 공존하고, 그 안에서 공통되는 하나의 다르마로 수렴되어지는 과정이 『마하바라따』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러한 각자의 다르마가 서로 충돌해나가면서도 잘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도의 모습이 아닐까 또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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