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1931년 작 <프랑켄슈타인>의 공인된 속편이자 걸작이다. 신기하게도 <프랑켄슈타인>에 이어 이 영화를 보면 무언가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전편에서 느꼈던 기대감을 속속들이 배반당하는 느낌. 그것은 이 영화가 ‘아이러니’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작자인 메리 셜리, 남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그리고 바이런 경(Lord Byron)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는 소설의 1831년판 서문을 각색한 것이다.) 바이런 경은 전편의 내용을 복기하면서 메리 셜리에게 더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챈다. 메리 셜리는 “관객들은 이런 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운을 떼며 남은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관객이란 영화를 보는 우리일 수도, 영화상에서 이야기를 듣는 바이런과 퍼시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시작되는 아이러니의 연속.
사람들은 괴물을 생포해 마치 예수처럼 나무에 묶어세운다. 그런데 예수는 신의 아들로 십자가에 묶인 후에 죽고 부활하지만, 인간의 아들인 괴물은 죽음에서 부활한 후 십자가에 묶인다. 잠깐이지만 숲속의 맹인 노인과 ‘우정’을 경험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친구’를 만들어 달라 요구한다. 그런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친구를 동성이 아닌 ‘여성’으로 만든다. 프랑켄슈타인의 파트너인 프리토리우스 박사(Doctor Pretorius)는 그들이 함께 만든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라 칭한다. 그런데 실제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엘리자베스’다. 엘리자베스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가 완성된 순간 정확하게 그 공간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프랑켄슈타인 혼자 낳은 자식인 ‘괴물’과 프랑켄슈타인과 프리토리우스가 함께 낳은 ‘프랑켄슈타인의 신부’가 있으며 이들은 이상한 가족관계를 형성한다. (동성부부-아들-딸이자 아버지의 부인-남매이자 친구-그리고 아버지의 '공인된' 이성 부인)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종교적인 동시에 신성모독적이고 죽음과 부활, 절망과 구원을 함께 다루고 있다. 장르는 수시로 탈바꿈하고 지나치게 탐미적이다. 메리 셜리의 원작에 기대어 있으면서도 원작을 부수는 동시에 다시 원작으로 돌아온다.
공포영화라 하기엔 밋밋하고, 코미디라 하기엔 진지하며, 패러디라 하기엔 진중하고, 취향을 탄다고 말하기에는 보편적이다. 모든 것이 스며들어 울퉁불퉁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한 괴물 같은 작품.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제임스 웨일이 창조한 ‘괴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괴물이라 칭하기엔 너무나도 경외스런, 하나의 종(種)이라 할만하다.
2014년 1월 24일 블루레이로 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