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 낙태관에서 육건六健이 뜻을 모으고 대각사에서 삼장三藏이 설법을 듣다


p.077

“다 같은 편이야. 그 털보는 운리무, 이쪽은 급여화急如火. 그리고 저쪽은 쾌여풍快如風과 흥홍흔興烘掀. 과거 하夏에서 으뜸가던 여섯 장수, 즉 육건장六健將이라 불렸지만 그 중 둘이 죽어 지금은 넷만 남았지.”


   앞서 언급했지만, 육건장은 홍해아의 심복 정령들로 『서유기』41회와 42회에 등장한다. 꽤나 그럴듯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어서, 무언가 굉장한 활약을 펼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지만, 그냥 잔심부름이나 하는 파발꾼 정도의 역할이다. 『요원전』에서는 두 명이 죽었다고 했는데, 그 두명의 이름은 운리무의 이름을 뒤집은 무리운, 그리고 흥홍흔의 이름을 뒤집은 흔홍흥이다. 이 두 명 대신 홍해아와 손오공이 합류, 새로운 육건장이 탄생한다.



p.079

“여의진선如意眞仙?”

“우리 숙부께서 쓰시는 별호別號야. 여기는 우리 숙부 댁 도관道觀이거든. 보다시피 워낙 황폐해놔서, 다른 도사나 제자들의 왕래도 없는 곳이지. 숨어 지내기에는 안성맞춤한 장소란 말씀이야.”


   여의진선은 『서유기』53회에 등장하는 인물로 홍해아의 삼촌이다. 그는 해양산(解陽山) 파아동(破兒洞)을 취선암(聚仙庵)으로 고치고, 동굴 안에 있는 ‘낙태천(落胎泉)’이란 샘을 차지해 독점함으로써, 부를 누리고 있었다. 삼장법사와 저팔계가 서천으로 가는 길에 들른 서량여국(西梁女國)의 자모하(子母河) 강물을 잘못 마셔 임신을 하자(!), 손오공이 취선암으로 가서 여의진선에게 낙태천의 물을 빌리려는 상황에서 마주한다. 『서유기』53회의 여의진선은, 54회의 서량여국 여왕, 55회의 독 전갈로 이어지는 ‘서량여국’ 트릴로지의 첫 번째 빌런을 담당하고 있는데, 남해 관음보살이나 도교의 다른 신들의 도움 없이 손오공과 사오정의 힘만으로 제압당하는, 싸움실력은 좀 모자라다.

   홍해아가 말하는 “워낙 황폐”하다던 도관의 전경은 『서유기』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小橋通活水,茅舍倚青山。

村犬汪籬落,幽人自往還。

   아담한 다리 밑에 맑은 냇물 흐르고, 초가집은 청산에 기대어 섰다.

   동네 개 컹컹 짖다가 울타리 밑에 도사리니, 은둔자는 뜰에서 서성거린다.



p.080

“이제 와서 꽁무니를 빼는 게요? 그럼 유아劉雅나 다른 자들처럼 냉큼 짐 싸들고 어디 촌구석에 낙향해서 농사라도 짓던가!”


   『자치통감』권189, 『신당서(新唐書)』권86을 보면, 두건덕이 참수당한 후, 두건덕의 잔당들이 “난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는데, 유(劉) 씨를 주군으로 삼는 게 길(吉)하다는 점괴가 나와, 처음으로 찾아간 것이 바로 유아다. 모두들 유아를 찾아갔지만, 유아가 따르지 않자 장수들이 깊이 원망해 유아를 죽였다. (於是謀反. 卜所主, 劉氏吉. 共往見故將劉雅, 告之, 雅不從, 衆怒, 殺雅去.)” 그 후 찾아간 게 유흑달이고, 그 이후는 역사에 기록된 대로다.

   『요원전』홍해아가 유아를 언급한 것은, “너희 중 누구라도 유아처럼 꽁무니를 뺀다면 죽을 줄 알라”는 일종의 협박이다.



p.080

“그리 역정 내지 말게, 홍해아. 어르신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은 다들 똑같다네. 무엇보다 앞서 두건덕 어르신께서 참살당하셨을 때만 해도 우리는 다 같이 들끓는 의분 속에서 유흑달 어르신과 함께 일어서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항복한 다른 군웅 왕세충王世充은 목숨을 건졌건만 두건덕 어르신은 비천한 죄인으로 무참히 처형 당하셨지...”


   620년 당(唐)의 진왕(秦王) 이세민이 4월에 병주 지역 전체를 수복하고 7월에 왕세충을 토벌하러 출정했을 때, 왕세충이 있는 낙양의 궁성을 포위하였으나 함락이 쉽게 되지 않았다. 왕세충은 하북의 두건덕에게 원군을 요청, 원군 요청을 받아들인 두건덕이 이세민과 사수(汜水)에서 일전을 벌였을 때, 두건덕을 생포했고, 왕세충은 항복을 한다. 두건덕과 왕세충은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이송되었는데, 두건덕은 바로 저잣거리에서 참수를 당하고, 왕세충은 목숨을 살리고 사천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하지만, 귀양을 가는 길에 왕세충의 손에 죽은 독고기(獨孤機)의 아들 독고수덕(獨孤修德) 형제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이것이 사고였는지, 의도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저항하다 잡히든, 항복하든 칭왕을 했던 군웅들은 어떻게든 죽음을 맞이했다. 왕이 되기 위해 형제들과 일가친척들을 모조리 죽였던 이세민에게 그 정도는 고민도 아니었을 것이다.



p.081

여의진선의 등장


   『요원전』에서 묘사한 여의진선의 모습은 『서유기』에 묘사된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서유기』에서 여의 진선을 묘사한 시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頭戴星冠飛彩艷,身穿金縷法衣紅。

足下雲鞋堆錦繡,腰間寶帶繞玲瓏。

一雙納錦凌波襪,半露裙襴閃繡絨。

手拿如意金鉤子,鐏利杆長若蟒龍。

鳳眼光明眉菂豎,鋼牙尖利口翻紅。

額下髯飄如烈火,鬢邊赤髮短蓬鬆。

形容惡似溫元帥,爭奈衣冠不一同。

   머리에 쓴 성관(星冠)의 별 무늬는 오색찬란한 빛을 흩날리고, 몸에 두른 법의(法衣)는 새빨간 비단폭에 금줄 장식이 섬세하다.

   두 발에는 비단 바탕에 수놓은 운혜(雲鞋) 신었고, 허리에 찬 보대(寶帶)에는 영롱한 구슬이 눈부시게 박혀 있다.

   한 켤레 비단 버선 ‘능파말(凌波襪)’에는 물결무늬가 출렁대고, 절반쯤 드러낸 치맛자락에는 수놓은 융단폭이 번쩍거린다.

   손에 잡은 여의금구, 쇠갈고리 끝은 날카롭게 구부러져 서슬 퍼렇고 자루 긴 손잡이에는 구렁이 한 마리를 새겼다.

   딱 부릅뜬 봉의 눈망울에 번갯불이 번뜩이고, 쌍심지 돋은 두 눈썹은 연밥처럼 곤두섰으며,

   강철 같은 이빨은 송곳보다 더 예리하고, 딱 벌어진 아가리는 핏물을 머금은 듯 시뻘겋다.

   턱밑에 드리운 수염이 타는 불길처럼 나부끼고, 귀밑머리 붉은 털은 짧고도 텁수룩하다.

   생김새 흉악스럽기가 온원수(溫元帥, 도교에서 일컫는 천계의 호법신護法神)보다 더 사나우니 어쩌랴, 점잖은 옷차림새와 생판 어울리지 않는구나.



p.082

“여기 진선께서는 말이다, 불로장생의 단약은 연단하지 않고 복중태아가 떨어지는 환약이나 만들어 아낙네들에게 팔아 치우신단 말씀이야. 약뿐만 아니라 내밀히 중절 시술도 하신다지!”


   『서유기』에 있는 설명을 조금 붙인다면, 서량여국은 여인들의 나라인데, “이 고장의 사람들은 나이 스무 살을 넘기면 비로소 자모하 강변에 나가서 물을 마시는데, 그 강물을 마신 다음에는 이내 복통을 일으켜 잉태한 것을 알게(但得年登二十歲以上,方敢去吃那河裡水。吃水之後,便覺腹痛有胎。)” 된다고 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물이라면, 아이를 뗄 수도 있는 물이 있을 터, 여의진선은 바로 그 샘물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요원전』에서 여의진선이 ‘낙태’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서유기』에서 이야기하는 ‘서량여국’, 즉, 여자들만 사는 나라에 대한 기록은 현장 스님의 저서인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도 찾아볼 수 있다. 좀 길지만,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 옮겨 적는다.


其後南印度有女娉隣國,路逢師子王,侍送之人怖畏逃散,唯女獨在車中,師子來見,負女而去,遠入深山,採菓逐禽以用資給。歲月既淹,生育男女,形雖類人,而性暴惡。男漸長大,白其母曰:「我為何類?父獸母人。」母乃為陳昔事。子曰:「人畜既殊,何不捨去而相守耶?」母曰:「非不有心,但無由免脫。」子後逐父登履山谷,察其經涉。他日伺父去遠,即擔携母妹,下投人里,至母本國,訪問舅氏,宗嗣已絕,寄止村閭。其師子王還,不見妻子,憤恚出山,哮吼人里,男女往來多被其害。百姓以事啟王,王率四兵,簡募猛士,將欲圍射。師子見已,發聲瞋吼,人馬傾墜,無敢赴者。如是多日,竟無其功。王復標賞告令,有能殺師子者當賜億金。子白母曰:「飢寒難處,欲赴王募,如何?」母曰:「不可。彼雖是獸,仍為爾父,若其殺者,豈復名人?」子曰:「若不如是,彼終不去,或當尋逐我等來入村閭。一旦王知,我等還死,亦不相留。何者?師子為暴,緣孃及我,豈有為一而惱多人?二三思之,不如應募。」於是遂行。師子見已,馴伏歡喜,都無害心,子遂以利刀開喉破腹,雖加此苦,而慈愛情深,含忍不動,因即命絕。王聞歡喜,怪而問之:「何因爾也?」竟不實言。種種窮迫,方乃具述。王曰:「嗟乎!非畜種者,誰辦此心。雖然,我先許賞,終不違言。但汝殺父,勃逆之人,不得更居我國。」勅有司多與金寶,逐之荒外,即裝兩船,多置黃金及資糧等,送著海中,任隨流逝。男船泛海至此寶渚,見豐奇翫,即便止住。後商人將家屬採寶,復至其間,乃殺商人,留其婦女。如是產育子孫,經無量代,人眾漸多,乃立君臣。以其遠祖執殺師子,因為國稱。女船泛海至波剌斯西,為鬼魅所得,生育群女,今西大女國是也。

   어느 때인가 남인도의 한 처녀가 이웃 나라로 시집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사자왕(師子王)을 만나 함께 오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고 오직 처녀 혼자 가마 속에 남아 있었는데 사자가 와서 보고는 그 처녀를 업고 갔다. 멀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과일을 따오기도 하고 짐승을 잡아다가 먹도록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낳아 길렀는데, 모습은 사람 같았으나 성질이 포악했다. 사내아이가 성장하게 되자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종류이기에 아버지는 짐승이고 어머니는 사람인가요?”

   그러자 어머니는 옛날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더니 아들이 말했다.

   “사람과 짐승은 전혀 다른데 어찌하여 버리지 않고 서로 살고 있는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마음으로는 도망갈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벗어날 길이 없었단다.”

   그 뒤로 사내아이는 아버지를 따라 산을 오르고 계곡을 건너면서 도망갈 길을 익혀 놓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먼 데로 간 틈을 타서 즉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래서 어머니의 나라로 가서 외할아버지를 찾았으나 집안은 이미 대가 끊어지고 없었으므로 시골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한편 사자왕이 돌아와 보니 처자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크게 노하여 산을 뛰쳐나와 마을로 가서 울부짖으며 왕래하는 남녀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

   백성들이 이런 일을 왕에게 아뢰자 왕은 4병(상병象兵․마병馬兵․거병車兵보병步兵)을 이끌고 나가서 용맹한 장사를 뽑아 사자를 에워싸고 사살하려고 하였다. 사자가 이를 보고는 성난 소리로 울부짖자 사람과 말[馬]이 놀라 넘어지는 등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라서 비록 많은 날을 보냈으나 끝내 아무런 공력이 없었다. 왕은 다시 상금을 걸고, 만약 사자를 죽이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억금(億金)을 하사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이때 사내아이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굶주림과 추위로 어려움에 놓여 있으니 왕의 모집에 나갈까 하는데 어떠한가요?”

   어머니가 말했다.

   “안 된다. 그는 비록 짐승이지만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만약 아버지를 죽인 자라면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들이 말했다.

   “만약 죽이지 않는다면 그는 끝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들을 찾으러 이 마을로 들어올 것입니다. 일단 왕이 알게 된다면 우리들이 도리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만류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사자가 난폭하게 된 것은 어머니와 나 때문인데, 하나를 위해서 많은 사람을 괴롭혀서야 되겠습니까? 두 번을 생각해도 세 번을 생각해도 응모하는 것이 상책일 듯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떠나갔다.

   사자는 아들을 보자 온순해져서 기뻐할 뿐 전혀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 사내아이는 드디어 예리한 칼로 목을 찌르고 배를 갈라버렸다. 그러나 사자는 이러한 고통을 가해도 자애로운 정이 더욱 깊어 아무 저항도 없이 꾹 참더니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왕이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면서도 이상히 여겨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네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느냐?”

   끝내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왕이 갖가지 말로 추궁하고 협박하니 마침내 사실대로 전부 진술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저런, 너 같은 짐승의 종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마음을 낼 수 있겠느냐?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이미 상을 주기로 했으니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다. 그러나 너는 애비를 죽였으니 인륜에 어긋나고 나라에 반역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나의 나라에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는 유사(有司)에게 칙명을 내려 많은 금과 보화를 주고는 나라 밖으로 추방했다. 두 척의 배에다 많은 황금과 식량을 실어서 바다에 띄워 보내서 파도를 따라 흘러가도록 한 것이다.

   사내아이가 탄 배는 바다에 표류하다가 이 보물섬에 닿게 되었다. 그는 진기한 보물이 많은 것을 보고는 곧 여기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상인들이 가족을 데리고 보물을 캐러 다시 이곳에 찾아왔는데, 그는 상인들을 죽이고 부녀자들만 머물게 하면서 이처럼 자손을 낳아 길렀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자 인구가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군신(君臣)의 구별도 세우고, 먼 조상이 사자를 잡아서[執] 죽였다 하여 나라 이름도 집사자(執師子)라 하였다.

   한편 누이동생이 탄 배는 표류하다가 파랄사(波剌斯, 현재의 이란) 서쪽에 이르러 귀매(鬼魅)에게 붙잡혀 많은 딸아이를 낳았다. 지금의 서대여국(西大女國)이 바로 그 나라이다.


   『서유기』를 번역한 임홍빈 선생의 주(註)에 따르면, 이 고사는 『서유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로 갈라져, 사자림(獅子林)의 사자왕은 사타국(獅駝國)의 사타왕으로, 서대여국은 송(宋)나라 때 『대당삼장취경시화』에서 현장 법사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환상으로 세운 여인지국(女人之國)으로, 그리고 다시 원(元)나라 때 『서유기잡극(西遊記雜劇)』에서는 “평생 남자의 모습을 보지 못한 여자들만 사는 인간 세계 여인국(女人國)”으로 변화, 발전해왔다고 한다.



p.082

“해아야! 하필 이런 놈들을 달고 오다니, 너도 정말 터무니없는 지리귀地裏鬼*가 다 되었구나!”

*『서유기』(오오타 타츠오太田辰夫・토리이 히사야스鳥居久靖 공역/헤이본사平凡社 발행)의 주석에 의하면 당시에는 타지에서 비적 따위를 끌어들여 악행을 일삼는 파락호, 무뢰한을 ‘지리귀’라 불렀다고 합디다. (이야기꾼 註)


   이 ‘지리귀(地裡鬼)’라는 표현은 『서유기』73회, 77회 두 번 나오는데, 문지사판에서 73회에서는 ‘지리귀’, 77회에서는 ‘두더지 귀신’이라고 번역 되어 있어 그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었는데, 모로호시 선생이 그 뜻을 언급함으로써 지리귀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서유기』 73회에서 지리귀가 쓰인 부분은 다음과 같다. 백안마군(白眼魔君)을 상대하기 위해서 비람파 보살(毘藍婆菩薩)을 만나러 간 손오공에게, 자신은 은둔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는 비람파 보살의 물음에 손오공이 대답하기를, “하하! 제가 누굽니까? 세상에 못 들어본 소문이 없는 ‘지리귀(地裡鬼)’가 바로 이 제천대성 손오공입니다. 보살님께서 어디 숨어 계시든지 다 알아내는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쉽사리 찾아뵙지 않았습니까?(我是個地裡鬼,不管那裡,自家都會訪著)” 여기서 쓰인 지리귀의 뜻은 파락호나 무뢰한과는 조금 떨어진 뜻으로도 보이는데, 『수호전』에서 양중서의 생신강을 훔친 조개 일당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 다름 아닌 별다른 직업 없이 노름방 뒷전이나 저자골목을 싸다니는 하청(何淸)이었으니, 그 의미가 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참고로 백안마군과 비람파 보살은 『요원전』「반사령盤絲嶺의 장章」에 등장한다.

   『서유기』 77회에서 지리귀가 쓰인 부분은 다음과 같다. 팔백 리 사타령(八百里獅駝嶺) 사타동(獅駝洞)에서 청모사자(靑毛獅子), 황아노상(黃牙老象), 대붕조(大鵬鳥)와 대결하던 손오공은 스승과 아우들이 잡혀가자 3:1의 싸움을 감당할 수 없어 석가여래를 찾아간다. 석가여래가 그 마귀들의 정체를 간파, 마귀들의 원래 주인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보내자 그것을 본 청모사자가 말하길, “여보게들, 이거 큰일 났네! 저놈의 원숭이 녀석, 정말 두더지 귀신(地裡鬼) 같은 놈일세. 어디 가서 우리 주인님을 모셔 가지고 데려왔지 뭔가!(兄弟,不好了,那猴子真是個地裡鬼,那裡請得個主人公來也。)” 여기서 쓰인 지리귀의 뜻은 말 그대로 ‘욕’임을 알 수 있다.



p.082

“과거 이연이 장안을 침범했을 때 당의 군사 놈들이 도관을 이 꼴로 만드는 바람에 숙부님께서도 놈들을 원망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唐)의 군사가 도관을 파괴했다는 사실은 좀 어폐가 있지 않는가 싶다. 왜냐하면 당이 국가적으로 신봉하는 종교가 바로 다름 아닌 도교(道敎)이기 때문이다. 수(隋)의 뒤를 이어 당을 세운 이씨 황실은 무언가 정통성이 필요했다. 또한 선비족의 피가 흐르는 뒤섞인 혈통과 출신을 감추기 위해 자기네들에게 역사적으로 명성 높은 선조를 하나 세워야했는데, 노자(老子)가 이씨 성을 가졌다 해서 스스로 노자의 후예라고 일컫기 시작, 황실을 비롯, 조정 대신과 정부 차원에서 도교를 제1종교로 신봉했다. 이는 법률로 정해졌는데, 종교의 서열에 있어서 도교를 우선하고 불교가 그 뒤에 오는 ‘선도후불(先道後佛)’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여의 진선이 행하는 도술(道術)이 정통 도교와 맞지 않는, 음란하고 불필요한 것이기에 국가적으로 철폐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자치통감』권191을 보면, 626년, 당고조 이연이 사문(沙門)과 도사(道士)들이 부세와 요역을 피하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을 싫어해 조서를 내린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사에게 명령하니 천하의 승(僧), 니(尼), 도사, 여관(女冠)을 조사하여 그 가운데 정근(精勤)하며 수행하는 사람들은 대사찰과 대도관으로 옮기고 의복과 먹을 것을 공급하며 부족하거나 빠지지 않게 하라. 용열하고 외쇄하고 거칠고 오염된 사람은 모두 도(道)를 철폐하게 하고 챙겨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경사에는 사찰 세 곳과 도관 두 곳만을 남겨 두고, 여러 주에서는 각기 한 곳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하라.”

   이것은 지독한 전란으로 세수가 부족해서 종교 시설을 일시적으로 철폐시킨 미봉책으로도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현무문의 변’ 이후 당태종이 즉위한 후 이 조서를 다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p.085

“그보다 건성이나 원길이에 대한 소문을 더욱 더 유포하도록 하게. 그리고...”


   이 소문이란 아주 추잡한 것으로 『구당서(舊唐書)』「은태자전(隱太子傳)」에, “건성과 원길은 또 밖으로 소인과 결탁하고, 안으로는 폐행(嬖幸, 황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과 관계하여, 고조가 사랑하는 장첩여(張婕妤)와 윤덕비(尹德妃)는 모두 이들과 음란했다.” 그리고 『자치통감』권190에 “이건성과 이원길은 뜻을 굽혀서 여러 비빈들을 섬기고 아첨하고 뇌물을 보내지 않는 곳이 없게 하여 황상에게 좋게 보이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장첩여와 윤덕비에게 증(蒸, 이건성과 이원길이 아버지 이연의 처첩과 사통私通하는 관계를 가졌다는 말)하였다고 말하였지만 궁중 깊숙한 곳의 비밀을 밝힐 수는 없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이세민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일 공산이 크다고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이세민이 이 내용으로 당고조에게 상소를 올려 아들들을 입궐시키는데, 바로 그 때 그 유명한 ‘현무문의 쿠데타’가 일어난다. 진순신 선생은 위에 기록된 내용을 보고, “건성과 원길의 이름을 나란히 적었는데, 음란한 상대가 어느 쪽인지 매우 모호하다”고 밝혀, 이 내용이 누군가의 조작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로호시 선생은? 작가들에게 있어, 이런 모호한 기록은 작가적 상상력을 넓히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모로호시 선생은, 이 모호한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력의 나래를 활짝 피웠다. 개인적으로, 『요원전』의 하이라이트는, 역사와 야담과 소설과 신화가 한데 섞여 폭발하는 「현무문의 장」과 「요천鬧天의 장章」이 아닐까 생각한다.



p.085

“이정李靖. 뭔가, 이자는?”


   이정을 간단히 얘기한다면, 당(唐)의 명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군웅들을 평정해 당왕조를 창업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당의 창업 후에는 지속적으로 당을 압박했던 돌궐을 소멸시켰다. 이정은 본래 수(隋)나라 마읍(馬邑)의 관리였는데, 이연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수도 장안에 알리려 했으나 길이 막혀 실패하고 만다. 장안을 함락한 이연이 이 사실을 알고 이정을 죽이려 했으나, 극적으로 죽음을 면제받고 이세민이 그의 신병을 인도 받는다. 이후 이세민 휘하에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발군의 군사적 재능을 발휘, 승승장구한다.



p.086

“실은 소신이 아는 자 가운데 상하常何라는 자가 있나이다. 그 자에게 소신이 잘 일러두겠사옵니다.”

“상하라?”

“본디 태자 밑에 있다가 지금은 대궐문을 지키는 수위대장守衛大將으로 지내는 사내입니다.”


   상하는 본디 황태자 이건성의 부하로 태극궁(太極宮)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의 수비대장이다. 본래 황궁에는 황제를 호위하는 군대를 제외하고 사병(私兵)을 들일 수 없었다. 당시 궁성의 북문인 현무문이 주출입문이었고, 정문은 남문인 주작문(朱雀門)이었다. 그 점을 착안해, 이세민은 북문의 수비대장인 상하를 매수, 현무문에서 무방비상태인 형과 아우를 죽인다. 이 모든 게 상하를 매수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자세한 것은 뒤에서 다루도록 한다.



p.088

“저게 안복문安福門이야. 문을 지나면 횡위橫衛라고 하는 관원대기소가 나오지. 황위를 끼고 남북으로는 궁성宮城과 황성皇城이 있고.”


   운리무가 손오공과 함께 태극궁을 살펴보고 있다. 침입 루트를 찾고 있는 것인데, 지도상으로 보면 서쪽에 안복문(安福門)이 있고, 동쪽에 연희문(延喜門)이, 북쪽에 현무문(玄武門), 남쪽에 주작문(朱雀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작문을 통해 황성을 지나 승천문을 통해야 비로소 궁성(宮城), 즉 태극궁(太極宮)에 들어갈 수 있는데, 자세한 것은 지도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빨간색 네모 칸이 이번 회에 나오는 이름들이고, 파란색 네모 칸은 다음 회에 나오는 이름들이다.



圖 7 8 世紀前半的長安宮城、皇城에서 발췌



p.090

“...이들 육식六識의 작용을 인해 인연因緣이 비롯되는 것이니라.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망妄... ...이들 육식 외에 제칠식第七識이 있으니 이를 일컬어 말나식末那識이라 하노라. 이 말나식이 자아에 집착함을 인해 윤회輪廻가 비롯되는 것이니라. 그러나 말나식이 진여眞如는 아닌즉, 제팔식第八識이 또 있으니 이를 일컫기를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노라...”


육식六識의 작용을 인해 → 육식六識의 작용으로 인해

집착함을 인해 → 집착함으로 인해

아뢰야식阿賴耶識 → 아라야식阿羅耶識 or 아랄야식阿剌耶識 or 아려야식阿黎耶識 or 아리야식阿梨耶識


   제8식을 칭하는 여러 명칭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인데, 이는 산스크리트어 'ālaya vijñāna, 알라야 비즈냐나'의 음을 따라 표기한 것으로, 현장이 번역한 신역어(新譯語)이다. 이전까지는 지론종(地論宗)・섭론종(攝論宗)・천태종(天台宗) 등에서 아라야식(阿羅耶識)・아랄야식(阿剌耶識)・아려야식(阿黎耶識)・아리야식(阿梨耶識) 등으로 표기 되었으며, 이 번역어에 담긴 뜻의 차이에 따라 각 종파의 견해가 갈린다. 즉, ‘아뢰야식’이란 단어는 645년, 현장이 인도 유학을 마치고 당나라에 귀국한 후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 번역 사업을 시작한 후에야 나오는 단어이므로, 이전 구역어(舊譯語)로 수정해야 한다.



p.091

“이들 팔식은 모두 망... 실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섭대승사攝大乘師께서는 또한 이르셨느니라. 팔식에는 이의가 있도다. 하나는 망이요, 둘은 진眞이니라라고...”


섭대승사攝大乘師께서는 또한 이르셨느니라. → 『섭대승론(攝大乘論)』에 또한 언급됐노라.


   ‘섭대승사’라는 말은 없다. 아마도 『섭대승론』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섭대승론(攝大乘論, Mahāyāna-saṃgraha)’은 “대승(大乘)을 포섭(包攝)한 논(論)”이라는 뜻으로 무착(無着, Asaṅga) 법사가 저술한 대승불교의 논서이다.

   ‘미륵(彌勒, Maitreya, ?~?) → 무착(300?~390?) → 세친(世親, Vasubandhu, 320?~400?)’의 기본 틀에서,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가 지론종이고, 진제(眞諦, 499~569)가 번역한 무착의『섭대승론』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가 섭론종이며,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유식10대논사(唯識十大論師)의 학설을 취사선택, 현장(玄奬)이 번역・편집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가 법상종이다.



p.091

“팔식이 모두 망이라면서 어찌하여 아뢰야식에는 진과 망이 있단 말인지...”


   지론종에서는 아뢰야식이 진식(眞識)이냐 망식(妄識)이냐를 놓고 견해 차이를 보였는데, 진식으로 본 자들은 상주남도파(相州南道派)로, 망식으로 본 자들은 상주북도파(相州北道派)로 나뉘었다. 섭론종에서는 아뢰야식을 망식(妄識), 즉 번뇌망상(煩惱妄想)에 의해 더럽혀진 식(識)이라고 보았다. 현장이 창설한 법상종에서는 아뢰야식을 경공심유(境空心有), 즉, 청정해진 마음이 곧 진여라는 식(識), 진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이해하기 힘든 깊은 내용을 무리하게 압축하니 더 아리송한데, 간단히 상황을 설명한다면, 진리는 하나인데 이렇게 종파에 따라 해석이 다른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바로 이런 일들 때문에, 진실을 확인하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현장이 인도로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p.094

“이쪽 젊은 친구랑 같이 오셨나?”

“그... 그렇수... 우리 아들이우. 나는 이 근처 마을에 사는 운... 아니 무리운이라 하는 사냥꾼올시다.”


   앞서 이야기했듯, 『요원전』에 등장하는 육건장에는 『서유기』와 달리 두 명이 빠지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운리무의 이름을 뒤집은 무리운, 그리고 흥홍흔의 이름을 뒤집은 흔홍흥이다. 운리무가 역술가 원수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바로 대지 않고 재치 있게 뒤집어 말하는데, 그 뒤집은 이름이 육건장 중 죽은 두 장수라는 사실과 겹쳐져 묘한 재미를 이끌어낸다.



p.094

“찾으시는 것은 동쪽도 서쪽도 아닌 남쪽에서 올 거요. 주작대가朱雀大街 길거리를 살펴보면 찾으시게 될 것이외다.”


주작대가朱雀大街 길거리를 → 주작문가朱雀門街를 (맨 아래 지도 참조)



p.095

“거 참 되는 대로 지껄이는 역술가로군. 남쪽 주작문은 황성의 정문이란 말이야. 하고 많은 데 중 하필 그런데 궁성에 잠입할 틈이 있을 리 있나. 게다가 찾는 게 사람도 아닌데 남쪽에서 오기는 뭐가 온다는 소린지...”


   『요원전』에 언급한 지리를 확인하기 위해 아래 지도를 첨부한다. (맨 아래 지도 참조.) 지도가 커서 둘로 나눴는데, 앞서 게시했던 지도와 합쳐서 보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p.100

“웬 놈이 천가天街 노상에서 진상품으로 올라온 곰을 운반하던 관원에게 활을 쐈다 하더이다.”


천가天街 → 주작문가朱雀門街


   천가는 아마도 승천문가(承天門街)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승천문가는 황성 안의 대로다. (※아래 지도 참조.) 즉, 황성의 정문인 주작문을 들어가야 지나갈 수 있는 게 승천문가인데, 황성을 들어가 궁성을 침입하려는 육건장들이, 이렇게 쉽게 황성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천가는 주작문가라 바꿔야 한다.


圖 7 8 世紀前半的長安宮城、皇城에서 발췌



p.106

안인문安仁門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아 지금 손오공이 태극궁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에 안인문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지금은 고작 승천문을 넘은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지도 참조) 궁이 워낙 넓고 미로처럼 복잡하기 때문에, 지리를 익히지 않고 동선을 확보하지 못하면, 쉽게 잡혀버리기 십상이다. 『수호전』에서도 고태위가 임충(林冲)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때, 고태위의 사주를 받은 승국들이 임충을 이리 데리고 저리 데리고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혼을 빼어 놓아 백호절당(白虎節堂)에 칼을 들고 오게 했던 게 가능했던 것이, 중국의 건축물이 이런 미로 같은 큰 건물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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