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 이원길은 옥사에 목을 늘여놓고 이세적은 오공을 압송하다



p.057

살아있는 목


   잔인한 이원길의 처사에 맞서 억울하게 죽어 잘린 목들이 이원길을 방해하고 노려보는 모습은 공포를 넘어서서 처연함을 느낀다. 모로호시 선생은 인간의 역사에서 보이는 여러 희생 의례 중 유독 참수 의례(라기보다는 사람의 목)에 대해 관심을 많이 보였었는데, 『공자암흑전』에서 동남아시아 지방의 참수 의례를, 『머드멘』에서 파푸아뉴기니 마살라이 부족의 수급 사냥을, 『태공망전』에서 은(殷)나라의 인신공양(참수) 의식을 통해, 인간의 목에 깃든 생명력과 그 생명력-마나(mana)를 둘러싼 인간의 이기심을 이야기했다. 그 목에 깃든 마나를 차지해야만, 밭을 기름지게 할 수 있고, 악령을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요원전』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시오리와 시미코 살육시집(栞と紙魚子 殺戮詩集)』 「쿠비야마의 괴 병원(頸山の怪病院)」의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하는데, 2차 대전 때 군병원으로 사용되던 병원이 패전 후 민간 병원으로 바뀌면서 건강한 환자들의 장기를 몰래 이식해 밀매했다는 이야기로, 자신의 장기는 물론, 온 몸이 조각조각 해체되어 이식에 불필요한 머리만 남은 원혼들이 자신들의 장기를 차지하려고 난장판을 벌이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이다.

   좀 무시무시한 이야기만 나열한 것 같은데, 의외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몇 편 있다. 『시오리와 시미코』시리즈 중, 「살아있는 목(生首事件)」에서는 토막 살해된 사람의 목을 어항에서 키우다 바다로 방생하는 이야기를 다뤘고, 「파란 말(青い馬)」에서는 고기를 탐하다 고블린들에게 모조리 잡아먹히고 목만 남은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는데, 읽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이야기로만 정리하니 괴담이 따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품은 한 가지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작품인가 보다.


      




p.059

“어르신... 느, 늦었구나...!”


   유흑달의 죽음에 대해선 『자치통감』권190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유흑달이 처형을 당하기에 이르러서 한탄하여 말하였다. 「나는 행복하게 집에서 채소를 심고 있었는데 고아현(高訝賢)같은 무리들에게 오도(誤導)되어서 여기에 이르게 되었구나!」” 이 기록이 사실인지, 곡필인지는 알 수 없으나(아마도 곡필이 분명하겠지만), 뭐랄까 좀 허탈한 기분이 든다고 할까. 두건덕의 뒤를 이었으나, 그 그릇은 거의 우문화급(宇文化及) 수준이다. 우문화급은 수양제를 시해한 장수로, 처음에는 수양제를 죽일 생각도, 새 황제를 앞세워 군웅이 될 생각도 없었다. 그는 아랫사람들의 요청으로 떠밀리듯 그 자리에 올랐는데, 그 이후로도 되는 일이 없자, 스스로 양호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두건덕에게 생포되어 참수되었다. 그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유흑달이 했던 말을 하지 않았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홍해아는 유흑달의 이 마지막 절규를 듣지 못했다. 아마 이 말을 들었다면, 유흑달의 복수에 대해서 재고했을 것이다.



p.069

“운리무雲裏霧, 괜찮은가! 홍해아도 왔다네!”


   『서유기』에서 홍해아 측근의 여섯 마리 심복 부하를 가리켜 육건장(六健將)이라 하는데, 운리무는 그 중 한 명이다. 이들 여섯 명은 다들 재미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운리무는 ‘구름 속의 안개’, 무리운(霧裏雲)은 ‘안개 속의 구름’, 급여화(急如火)는 ‘성미 급하기가 불같다’, 쾌여풍(快如風)은 ‘빠르기가 바람 같다’, 흥홍흔(興烘掀)과 흔홍흥(掀烘興)은 ‘신바람이 나면 펄쩍 펄쩍 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요원전』에서는 무리운과 흔홍흥이 빠지는 네 명이 나오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p.074

“육 년만인가... 그 시절 장안에는 군마가 수없이 오가고 온통 난리법석이라 공부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일단 대각사大覺寺부터 들르자.”


   현장이 먼저 출가한 둘째 형 장첩(長捷)과 장안에 온 것은 618년이었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 따르면, “이때는 아직 나라가 건립된 초창기여서 전쟁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 익히는 것을 급선무로 삼는 시기였다. 그래서 한가하게 유교와 불교의 도를 배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장안에는 불교의 강석(講席)이 없었으니 법사가 이를 매우 개탄했다.(是時國基草創,兵甲尚興,孫、吳之術斯為急務,孔、釋之道有所未遑,以故京城未有講席,法師深以慨然。)”

   그렇기 때문에 현장과 장첩은 사천지방으로 가서 불법을 익혔는데, 현장이 워낙에 뛰어나 오(吳)・촉(蜀)・형초(荊楚)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622년에 구족계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고, 더 큰 배움을 찾아 사천지방을 떠난다. 형주(荊州)를 지나, “상주(相州)에 이르러 혜휴(慧休) 법사를 만나 의심나는 것을 질문했고, 또 조주(趙州)에 가서는 도심(道深) 법사를 뵙고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 그리고 장안에 들어가서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면서 도악(道岳) 법사에게서 『구사론(俱舍論)』을 배웠다.(至相州,造休法師,質問疑礙。又到趙州,謁深法師學《成實論》。又入長安,止大覺寺,就岳法師學《俱舍論》。)”

   『법사전』에는 정확한 연도 표시가 나와 있지 않아 현장이 사천을 언제 떠났는지, 장안에 언제 도착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요원전』에 따르면 현장이 장안에 온 것은 624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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