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 백운白雲이 걷히니 길이 드러나고 허영虛影이 움직이니 어둠이 깊어지다


p.089

“용아녀의 원수는 수 양제잖아. 양제는 죽었고 수도 멸망했는데 왜 당과 싸우는 거야?

“수나 당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두건덕은 백성 출신이었고, 민중을 위해 일어선 의인義人이었어. 그 뒤를 계승한 유흑달도 그렇고...”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야? 공연히 전란을 키워 사람들만 괴롭게 할 뿐이잖아.”


   손오공의 의문과 용아녀의 고민이 부딪혔다. 엄청난 부역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짠 수양제가 죽었지만, 곳곳에서 발생한 민란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수에서 당으로 나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민중들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오공의 지적대로 용아녀는 싸움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오공처럼, 잃어버리지 않는 힘을 원할 뿐이다. 무지기는 그런 용아녀의 마음을 이용하면서, 그녀가 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후에 용아녀는 이런 고민을 스스로 끊지만, 이런 용아녀의 번민은 홍해아에게 옮겨진다. 홍해아 역시,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오공의 힘에 미혹(迷惑)되고 만다. 여러모로 비극인 셈이다.



p.107

“도적의 주모자는 어디 사는 누구냔 말이다!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이 꼴이 될 것이야!!”


   제왕 이원길의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땅에 묻어 목만 남겨놓고 말발굽으로 머리를 깨고 있다. 이원길이 실제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전의 남북조 시대 때, 북위(北魏)의 대장 후경(厚卿)이 주군(州軍)을 이끌고 양(梁)나라 무제(武帝)에게 투항한 후, 양나라를 배반, 10만 대군으로 도읍인 건강(建康, 南京)을 함락시켰을 때, 백성들을 거대한 맷돌에 갈아 죽이고, 하반신을 땅에 파묻고는 기마군을 풀어 재미 삼아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쩌면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치통감』권187에 기록된 이원길의 행적을 보면, “항상 두탄과 더불어 놀며 사냥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농작물을 유린하고 밟았다. 또 멋대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풀어놓아 백성들의 물건을 빼앗게 하고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활을 쏘아 그들이 화살을 피하는 것을 보았다.”, “백성들은 분하고 원망하였고,” 이렇듯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던 듯하다.



p.111

“오공, 분명히 보여줬다. 네가 처한 상황을 말이다... 이것은 환각이 아니야. 그 증거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도록 해라! 이런 일은 어쩌다 가끔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언제 어디서든 이와 유사한 일이 항시 일어나고 있단 말이다! 내가 어디에나 있다고 한 말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느냐!”


   오공은 제천대성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선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분노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수많은 민중들의 원념들을 이끌어내 대성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오공은 “그런 상황이 천년만년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라 일갈한다. 하지만, 무지기의 말대로 그런 상황은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나라로 통일될 때까지 전란이 그치지 않았던 약 400여 년간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기근, 질병, 동란 가운데 민중들이 있었으며, 계급과 민족의 압박, 착취는 물론이고 대규모적인 학살이 수시로 전개되던 상황이었다. 수문제의 치세는 짧았고, 수양제의 과도한 부역과 그로 인한 민란은 민중들에게, 또다시 지옥문이 열렸다는 공포와 낙담, 그리고 심한 허탈감과 분노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들이 무지기가 자신 있게 “내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점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 불교도 중국에서 힘을 얻었다. 이처럼 현실의 삶이 슬프고 고통스럽고, 내일의 삶을 기약할 수 없는 허망함이 가득한 시대, 선량한 사람이 가혹하게 살고, 악인이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회, 집안을 건사하기는커녕 내 한 몸조차 돌볼 수 없는 사회, 바로 이런 때 불교가 민중의 의식 깊숙이 파고들었다. 현실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으니, 인과응보를 윤회에 기탁하고 합리성을 ‘내세’와 ‘천국’에 맡기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무지기는 “불가에 속한 자를 조심하라”는 말을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어찌됐든 이 점은 생각을 해볼 주제가 된다. 혁명을 통한 민중의 자각, 그리고 종교를 통한 민중의 구원. 혁명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엄청난 피를 부른다. 종교적인 구원은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로 내 현실을 죽음에 저당을 잡히는 것이다. 혁명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혁명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 죽음 뒤에 있을지도 모를 내세나 천국을 위해서 현실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불안/불만들.

   결국 이 모든 것은 내 마음 속에서 결정해야 할 일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마邪魔안의 부처佛陀, 부처佛陀안의 사마邪魔’ 속에서 무엇을 봐야할지/선택해야 할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려있는 셈이다. 『요원전』에서 손오공이 천축에 가는 이유는 ‘원신을 만나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것’이지만, 천축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는, 때로는 무지기의 선택을 하고 때로는 불타의 선택을 하면서 ‘사마안의 부처, 부처안의 사마’를 깨달아 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는, 아마도 「천축편」의 마지막 회에서나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데... 죽기 전에 그걸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로호시 선생님 힘내세요!)



p.115~120

폭주하는 손오공


   민중들의 분노로 제천대성의 힘을 이끌어낸 손오공은 화과산에서 무지기가 행동한 것처럼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이는데, 이런 모습은 가이낙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이 떠오르는데, 감독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는 <에반게리온>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단편 「그림자의 거리(影の町)」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에반게리온의 이미지에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한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 『요원전』에서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 소년 만화의 형식, 손오공의 폭주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서 언급한 우주론, 혜안(惠岸) 행자가 자신의 망상들과 싸우는 모습 등이 그런 게 아닐까 하는데,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이 나올 때 언급하는 것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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