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 용녀는 무리를 이끌고 당군을 치고 오공은 아녀자를 업고 동굴로 돌아가다


p.013

“하북에는 기근이 들었다고 해도 다른 지방은 그렇지 않아. 특히 강남의 사정은 오히려 정반대라. 당군은 거기서 난 풍부한 양곡을 운하로 퍼 나르고 있단 말씀이야.”


   수나라 때 건설한 운하를 살펴보면, 우선 수문제가 584년에 광통거(廣通渠)를 개통해 황허[黃河]와 장안을 연결했고, 587년에 산양독(山陽瀆)을 열어 화이허[淮河, 淮水]와 창장[長江, 揚子江]을 연결했다. 그 후 수양제가 605년 통제거(通濟渠)를 완성해 화이허와 황허를 연결, 창장에서 장안까지 연결하는 수로가 개통되었다. 608년에는 황허와 탁군(涿郡, 베이징北京 부근)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건설했고, 611년에는 창장 남안으로부터 위항[余抗, 항저우抗洲]을 연결, 탁군, 장안, 위항을 물길로 이동할 수 있는 사통팔달의 수로가 완성이 되었다.



   수문제가 운하 공사에 착수한 것은, 수도 장안의 번영으로 인구가 증가해서,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광통거로 관동의 곡물을 관중으로 수송할 수 있었으며, 산양독으로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강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수양제의 대운하 공사 역시 기본적으로 수문제와 같은 이유에서였지만, 너무나 무리한 공사 진행으로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사역을 당해, 그 원한이 끊임이 없었다. 그런데 운하가 완성된 611년에, 수양제는 양주(揚州, 장쑤성江苏省)에서 탁군까지 용주(龍舟)로 행차를 했는데, 이 배는 높이가 45척, 길이가 200척, 총 4층 규모에 2층에만 120개의 방이 있고, 노를 젓는 데만 8만명의 인부가 필요했다니, 그 꼴을 봤던 민중들이 충분히 피를 토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수양제의 대운하 사업은 자신의 유람 시설을 위한 공사라고 백성들에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영제거의 경우는 고구려 원정을 위해 개통한 것이었고, 이후 612년부터 3년간 고구려 원정에 나서니, 바로 이런 이유들로 민란이 봉기하여 수나라가 멸망하는 시작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수양제의 대운하 사업의 진위야 어찌됐든, 이 대운하로 중국의 남북교류는 경제적인 것은 물론, 문화적인 것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요원전』에서는 멸망한 수에 이어 곧 통일을 눈앞에 둔 당이 이 운하를 십분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p.038

“이... 이만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더 이상 들어갔다간 오리무중에 빠질 걸세.”


   오리무중(五里霧中)이란 ‘짙은 안개가 5 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 대하여 방향이나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권36 「장해전(張楷傳)」에 나오는 오리무(五里霧)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다.

   장해(張楷)는 후한 순제(順帝)때 선비로, 학문이 뛰어나고 도술(道術)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벼슬에 관심이 없어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명성이 높아져 그를 찾아온 문하생과 학자들이 얼마나 많던지 은둔한 곳 근처에 그의 자를 딴 공초(公超)라는 거리가 생길 정도였다. 게다가 장해를 찾는 사람 가운데는 학문을 숭상하는 부류만 있는 게 아니라 도술을 배우려는 무리도 많았다. 그 중 관서(關西) 출신의 배우(裴優)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삼 리를 안개로 덮을 수 있는(三里霧) 능력이 있었지만, 스스로 장해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 배우기를 청했다. 장해는 능히 오 리를 안개로 덮을 수 있었기(五里霧) 때문이다. 그러나 장해는 몸을 피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후 배우는 안개를 일으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는데, 안개를 일으키는 도술을 장해에게서 배웠다고 진술해 장해도 2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장해는 옥중에서도 고전을 읽고, 『상서(尚書)』의 주석을 달았는데, 배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일흔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리무중의 연원은 ‘(장해)는 성정이 도술을 좋아하여 능히 오 리를 안개로 덮을 수 있었다. (性好道術,能作五里霧。)’, 바로 이 말에서 비롯된 것인데, 왠지 느낌이 확 와 닿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오리무중’에 가까운 이야기로는, 먼 옛날 신화의 시대에 치우(蚩尤)가 타 부족과의 전쟁 중에, 천지를 뒤덮는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 못하게 했다던 이야기가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치우의 안개는 나중에 황제黃帝에게 깨지고 만다.) 고우영 선생께서도 그렇게 느끼셨는지 『십팔사략』 1권 「치우(蚩尤)」편에서 이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활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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