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 선경仙境에서 처녀가 천의天意를 가늠하고 촌리村里에서 흉도凶盜가 양민을 괴롭히다


p.375

“이 오행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지. 동쪽에는 목봉木峯, 북쪽에는 수봉水峯... 그리고 토봉土峯, 금봉金峯, 화봉花峯, 이렇게 다섯 봉우리에 둘러싸인 골짜기 한복판에 바로 백운동이 있단 말씀이야.”


   『서유기』7회에 오행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好大聖,急縱身又要跳出。被佛祖翻掌一撲,把這猴王推出西天門外,將五指化作金、木、水、火、土五座聯山,喚名「五行山」

앙큼스런 손대성, 황급히 몸을 솟구쳐 다시 빠져나오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부처님의 손바닥이 훌떡 뒤집히면서 “탁!” 하고 한 대 후려치니, 이 분수 모르는 원숭이 임금은 서천문 바깥으로 튕겨 날아가고, 이어서 다섯 손가락이 금・목・수・화・토의 봉우리가 잇따른 산악으로 변하여 그를 꼼짝 못하게 눌러버리고 말았다. 이 다섯 산봉우리가 이름하여 ‘오행산’이다.



p.387

“내 봉은 은고봉銀箍棒, 아직 임자가 없는 그 봉은 금고봉金箍棒이라고 한다더라.”


   『요원전』의 금고봉은『서유기』의 여의금고봉에서 따온 것이다. 여의금고봉은 대개 줄여서 여의봉이라 하는데, 『요원전』에서는 아예 금고봉이라 이름을 정하고, 은고봉이란 자매까지 만들어놨다.

   손오공이 여의봉을 얻는 이야기는 『서유기』 3회에 나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혼세마왕(混世魔王)을 물리친 손오공은 손에 맞는 병기를 구하기 위해 동해 용왕 오광(敖廣)을 찾아간다. 손오공이 하는 짓거리가 말만 얌전했지 거의 협박 수준이라, 용왕은 내키지 않지만 이런 저런 병기들을 손오공에게 보여주는데, 손오공은 가벼워서 쓸 수 없다 얘기하고 다른 것을 요구한다. 난감해하는 용왕에게 부인 용파(龍婆)와 딸 용녀(龍女)가 바다 창고에 비장해둔 큰 쇳덩어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용왕은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손오공에게 그 쇳덩어리를 준다. 그것은 굵기가 열 되들이 말[斗]만큼이나 되고 길이가 20척을 훨씬 넘게 기다란 쇠기둥이었는데, 손오공이 들어보니 무게는 적당하나, 너무 굵어서 사용하기에는 불편하더라. 그래서 손오공이 “조금만 가늘고 짧았으면 쓸 만하겠”다고 이야기하자, 손오공의 말대로 그 쇠기둥은 짧아지고 가늘어졌다. 말 한마디에 커지고 작아지기가 마음대로인, 이름하여 여의금고봉을 얻는 순간이었다.

   『서유기』에서 여의봉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原來兩頭是兩個金箍,中間乃一段烏鐵。緊挨箍有鐫成的一行字,喚做:「如意金箍棒,重一萬三千五百斤。」

철봉의 위아래 양 끝머리에는 금빛 테가 씌워져 있고 철봉대는 먹물보다 더 시커먼 오금(烏鐵)이다. 단단하게 조여진 금테 바로 밑에는 글씨 한 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무게 1만 3천 5백근.



p.388

“그걸 뽑을 수 있다면 네 것이 될 거야. 자, 뽑아보시지.”


   『요원전』에서 손오공이 금고봉을 얻는 이야기는, 아더왕 전설(Arthurian Legends)과 겹쳐진다. 가가미 다카코(鏡たか子)의 『영웅열전(英雄列傳)』서 묘사된, 소년 아더가 칼을 뽑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교회의 부지 안에는 대리석처럼 크고 네모난 바위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두꺼운 철판이 얹혀 있었다. 이 바위와 철판은 크리스마스 날 갑자기 교회 부지 안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철판의 중앙에는 아름다운 검이 한 자루 꽂혀 있었는데, 이 검에는 ‘이 검을 뽑는 자야말로 잉글랜드의 왕이다’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그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검을 뽑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도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검에 얽힌 사연은 전혀 모르는 아더가 칼자루를 잡았더니 검이 쑥 뽑혔다. 이 검도 명검이지만 그 유명한 엑스캘리버는 아니다. 아더는 나중에 이 검을 잃어버리고 엑스캘리버를 손에 넣게 된다.”

   후에 아더왕은 원탁의 기사단의 지도자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했다는 성배(聖杯)를 찾는 모험을 떠나기도 한다. 이는 신기하게도 『요원전』과 『서유기』에서 손오공의 행적과 유사하다.



p.394

“그렇게 되면 너도 이 봉에 담긴 힘을 깨닫게 될 걸. 천지의 영묘靈妙한 조화가 만들어낸 이 신진철神珍鐵의 힘을 말이야!”


   『서유기』에서 용파와 용녀가 용왕에게 얘기한 쇳덩이가 바로 신진철인데, 천하(天河)의 밑바닥을 다질 때 사용했으며, 우(禹) 임금이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을 때 강물과 바다 밑바닥을 다지는 데 썼던 것이라 한다. 하늘의 강바닥을 다지고 황하의 홍수를 다스릴 수 있는 쇳덩이라면 정말 엄청날 것이다. 『요원전』에서 금고봉의 힘은 실로 엄청난데, 그 힘의 바탕은 바로 제천대성 무지기의 힘이다. 금고봉은 평상시에는 평범한 막대이지만, 제천대성의 힘을 끌어냈을 때 그 파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p.399

“그건 나도 모르겠어. 사부께서도 읽지 못하셨다지. 천축天竺문자가 아닐까 하시던데...”


   드디어 천축이 언급됐다.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는데, 이 말의 어원은 인더스강의 옛 페르시아어인 ‘헨뚜(Henttu)’나, 아니면 미얀마어인 ‘턴뚜(Tenttu)’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대 이란 지방에서 침입한 아리안족이 최초로 자리 잡았던 곳이 Shindhu(지금의 인더스강) 강가라 그 지역과 사람들을 통칭하여 Shindhu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명칭을 외국에서 인도를 부르는 데 주로 사용되어 왔다. Shindhu라는 말은 고대 이란어의 특성에 따라 Hindu로도 통용되었는데, 후일 페르시아인들로부터 이 Hindu가 그리스어에 전해졌으나, 그리스어에 H가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국명 India나 강 이름 Indus가 여기에서부터 유래하게 되었다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인도(印度)라는 명칭이 바로 현장 스님이 붙인 것이라는 점이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현장이 기록한 천축의 명칭과 인도의 연원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詳夫天竺之稱,異議糺紛,舊云身毒,或曰賢豆,今從正音,宜云印度。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印度者,唐言月。月有多名,斯其一稱。言諸群生輪迴不息,無明長夜莫有司晨,其猶白日既隱,宵燭斯繼,雖有星光之照,豈如朗月之明。苟緣斯致,因而譬月。良以其土聖E賢繼軌,導凡御物,如月照臨。由是義故,謂之印度。

천축(天竺)이라는 호칭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면 의견이 갖가지로 분분하다. 구역(舊譯)에서는 신독(身毒)이라고 하였고 혹은 현두(賢豆)라고도 불렀는데, 이제는 정음(正音)을 따라서 인도(印度)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인도 사람은 지역에 따라서 나라를 부르는데,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체로서의 이름을 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일컬어 인도라고 부르고 있다. 인도라는 말은 당나라에서는 달[月]을 의미한다. 달에는 많은 이름이 있는데 인도는 바로 그 명칭들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중생들은 쉬지 않고 윤회하며 무명(無明)의 밤은 길고 길어서 새벽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밝은 태양이 숨으면 달빛이 그 빛을 잇는 것과 같다. 비록 별빛이 빛난다고 하더라도 어찌 환한 달빛의 밝기만 하겠는가? 오직 이 같은 이치에 따라서 달에 비유하는 것이다. 실로 그 땅의 성현들이 궤적을 잇고 범부들을 이끌고 만물을 인도하는 것은 마치 달이 천지를 환히 비추는 것과 같으니 이런 뜻으로 말미암아 인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현장은 아마 Shindhu 혹은 Hindu라고 불리는 것을 Indu로 받아들여 천축을 인도라고 명명한 것 같다. (범어로 Indu는 달을 뜻한다.) 이 인도라는 명칭은, 당시에 잘못 받아들여졌던 불교의 용어를 바로잡고 반절법(反切法)을 사용해 원음에 가까운 발음을 기록한 현장의 (유일한) 실수이자 착오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나름 어원을 추리해서 명명한 것이라 하는데, 어쨌든 인도라는 단어는 그 후로 굳어져 오늘에까지 불리고 있다.

   1608년에 편찬된 『법계안립도(法界安立圖)』라는 3권짜리 지리책 상권에 수록되어 있는 남염부주도(南閻浮州圖, Jambudikā)를 보면 현장이 기록한 인도와 서역의 나라와 지명들이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크로드 고전총서 시리즈를 펴낸 다정 김규현 선생은 이 지도를 “7세기 중반의 중화권의 우주관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른바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전도”라 정의했는데, 그 가르침에 십분 동의한다.


남염부주도(南閻浮州圖, Jambudikā)



p.407

수말당초隋末唐初 군웅할거도群雄割據圖


서원랑徐円朗 → 서원랑徐圓朗 으로 수정

임자홍林子弘 → 임사홍林士弘 으로 수정

이자통李子通 아래 그림 밑에 심법흥(沈法興) 추가




p.408

623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 유흑달, 제갈덕위(諸葛德威)의 배반으로 사로잡힘. 이건성, 유흑달을 참수


   『자치통감』 권190을 보면, 당시 유흑달을 토벌하러 가는 것은 이세민이 아니라 태자 이건성이다. 이건성이 유흑달 토벌에 지원한 것은, 뛰어난 무공으로 당(唐)의 기반을 굳건하게 세운 이세민을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짐작된다. 이런 가운데, 무덕(武德) 6년 (623년), 정월 기묘일(3일)에 유흑달이 임명한 요주(饒主, 허베이성河北省 헝수이시衡水市 라오양현饶阳县) 자사 제갈덕위가 유흑달을 배신해 생포한 후, 이건성에게 호송해갔다. 유흑달과, 함께 잡힌 유흑달의 동생 유십선(劉十善)은 유흑달의 도읍지였던 명주에서 목이 베어 죽었는데, 이런 정황으로 보아 당시 토벌군의 책임자였던 이건성이 유흑달의 참수를 지시했던 것으로 본다.

   『요원전』에서는 이세민이 유흑달을 죽인 것으로 설정이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3권 이후로 홍해아가 더 이상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권말 부록 부분은 역사를 정리한 것이라 생각되어 일부러 오류를 잡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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