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 용녀는 홀로 평정산을 제압하고 오공과 함께 오행산에 들어가다
p.337
“저 산채가 난공불락인 연유는 바로 배후에서 공격받을 염려가 없기 때문이지.”
난공불락인 평정산의 산채는 『수호전(水滸傳)』에서 화화상(花和尚) 노지심(魯智深)과 청면수(青面獸) 양지(楊志)가 두령으로 있는 이룡산(二龍山)의 산채가 떠오른다. 『요원전』에서 금각・은각 형제가 산채를 차지하고 산적질을 하는 것처럼 『수호전』에서도 노지심과 양지도 (의형제를 맺고!) 이룡산에서 산적질을 한다. 『수호전』에서는 노지심과 양지가 이룡산을 차지하는 과정까지만 나오는데, 그 후의 이야기는 금각・은각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수호전』 17회에서 이룡산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不若小人此間離不遠,卻是青州地面,有座山,喚做二龍山。山上有座寺,喚做寶珠寺。那座山生來卻好,裹著這座寺,只有一條路上的去。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인이 사는, 청주에 이룡산이 있습니다. 산 위에는 보주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보주사는 이룡산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올라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若是端的閉了關時,休說道你二位,便有一萬軍馬,也上去不得。似此只可智取,不可力求。
만일 정말로 문을 걸어 잠근다면, 두 분은 말할 것도 없고, 1만 군마가 와도,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오직 지혜로써 취해야지, 힘으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난공불락인 요새는 없듯이, 이룡산의 산채도 관군에 깨질 위험에 처하는 것처럼, 평정산의 산채 역시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 이것은 곧 뒤에 벌어질 이야기이다.
p.342
“다 왔어. 이제 이 돌다리를 건너면 백운동白雲洞이야.”
백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평요전』에도 나오지만, 『요원전』에서 다루는 내용은 『평요전』을 각색한 애니메이션 〈천서기담(天書奇譚)〉에 더 가까워 보인다. 〈천서기담〉에서 천궁의 비서각(秘書閣) 집사인 원공(袁公)이 옥황상제가 연회에 간 틈을 타 천서(天書)를 빼돌려 운몽산(雲夢山) 백운동(白雲洞) 석벽 위에 내용을 새겨 넣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원전』은 바로 그 모티프를 차용한 것 같다. 『평요전』에서 백운동은, 『여의보책(如意寶冊)』이라는 신서(神書)가 있는 장소로 등장한다.
〈천서기담〉의 원공과 단생(蛋生)
p.351
“그... 그렇다고 그런 계집애랑 꼬맹이한테 이 산채를 내주실거요?”
“염려마라. 공손한 척해서 방심시킬 뿐이다. 어차피 지금 녀석들은 단 둘 아니냐. 결국 빈틈이 생길 거야. 그보다 나는 일단 용아녀의 힘을 이용해 볼까 한다.”
『요원전』에서 은각은 감정적이고 무례한 난봉꾼 기질을 갖고 있는 반면, 금각은 진중한 성격으로 은각이 저지른 일을 뒷수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유기』에서 이 둘의 성격은 『요원전』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 은각은 감정적이긴 하지만,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인 반면, 금각은 진중하지만,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성격이다. 어쨌든, 두 작품 모두 은각 때문에 사단이 발생하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p.356
“내 사부 진원대선鎭元大仙이라는 분이셨어.”
진원대선은 『서유기』 24회~26회에 걸쳐 등장하는, 진원자(鎭元子) 또는 여세동군(與世同君)이라고 불리는 만수산(萬壽山) 오장관(五莊觀)에 사는 도사이다. 손오공 일행이 인삼과(人蔘果)를 훔쳐 먹고 도둑으로 몰리자, 홧김에 나무를 쓰러뜨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요원전』에서 63회~71회에 걸쳐 다루고 있다. 즉, 같은 인물이 둘로 나뉘어져 있는 셈이다. 이로보아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애초에 『요원전』의 이야기를 길게 다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대당편」만 4,0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 되어버렸다.
p.357
“그럴 리가! 이 고대 문자를 해서楷書로 번역해 놓은 건데.”
해서란 한자 서체(書體)의 하나로 금예(今隷)·정서(正書)·진서(眞書)라고도 하며 후한(後漢) 말에 한례(韓隷)의 파책(波磔)을 고치고 꺾고 치침을 더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예서(隷書)와 해서(楷書)로 나누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해서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① 법도(法度)를 갖추어서 해모(楷模:模範)가 되는 서법이라는 뜻이고, ② 정서 혹은 진서로서 자체가 단정하고 용필(用筆)이 법에 맞는다는 것으로 행서(行書)·초서(草書)와 같이 흘리지 아니한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간단하게 영어로 표현하면 regular script가 된다.
唐‧禇遂良︰書倪寬傳贊
『요원전』에서는 ②의 뜻을 사용한 것 같은데, p.356~p.360에 걸쳐 있는 것을 보면, 너무 흘려 써서 해서가 맞는지 모르겠다. 아마 의도적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모로호시 선생이 일부러 흘려 쓴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미래의 일도 기록되어 있을 테니까.)
p.357
“그럼 설명해 주지. 동쪽 커다란 벽에는 일흔 두 명의 인물의 이름이 늘어서 있어. 사부께서 이들이 지살地煞 칠십이성七十二星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라 하시더군.”
“그럼 서쪽 벽에는?”
“천강天罡 삼십육성三十六星에 해당한다고 사부께서 말씀하셨는데... 이건 나도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야. 사부께서도 사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천강성은 북극성을 가리킨다. 도교에서는 북두를 중심으로 한 별들 중 36개의 천강성과 72개의 지살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천강36성, 지살72성이라 불렀다. 이들은 별의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라 각각의 이름은 없지만, 『수호전』에서 천강36성, 지살72성의 이름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요원전』에서 천강성과 지살성을 구별/차별하듯이 『수호전』에서도, 천강성에 이름을 올린 자들은 각 회차별로 중심 이야기가 있는 반면, 지살성은 거의 이름만 올리는 경우가 많다.
p. 358
“잘 들어, 진秦 말엽에 난을 일으킨 진승陳勝・오광吳廣, 신新 시절 거병한 여모呂母, 녹림綠林의 난을 주도한 왕림王匡・왕봉王鳳, 적미군赤眉軍을 이끈 번숭樊崇, 후한後漢 말 황건군黃巾軍의 주모자 장각張角,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 장노張魯, 북위北魏 시절 대승교大乘敎의 난을 일으킨 법경法慶...”
왕림王匡 → 왕광王匡
장노張魯 → 장로張魯 (p.359 장노 수정)
①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
진승과 오광은 옛 초나라의 땅이었던 하남성 남부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09년 7월, 북쪽 변방 수비의 명을 받고 어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여름 장마가 닥쳐 길이 막혀서 도저히 기일 안에 당도할 수 없게 되었다. 진의 엄한 법률은 어떠한 사정도 용납하지 않았기에 기일이 늦어지면 참수형에 처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뜻을 모은 두 사람이 농민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기한에 늦어버렸다. 어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 비록 사형을 면한다 하더라도, 변경의 수비를 맡는다면 두 번 다시 고향 땅을 밟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농민들은 모두 함성을 지르며 이들을 따랐다. 진승의 예견대로 봉기의 소식을 접한 전국 각지의 백성들은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이미 백성들은 깃발만 오르면 반란에 동참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진승은 초나라의 수도였던 진(陣)을 함락하여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없는 농민들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농민 주력군이 진의 장군 장감에게 패한 후에는 내부 동요까지 일어나 진승과 오광이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사상 최초의 농민정권은 불과 6개월 만에 몰락했다.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을 떠나 다른 이에게 돌아갔다.
진나라는 진승 · 오광의 난 이후 전국에서 빗발치는 반란의 물결에 휩싸였고, 기원전 206년 그 최후를 맞이했다. 통일을 이룬 지 불과 15년 만의 일이었다.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에서 인용)
② 왕망(王莽)의 찬탈, 여모(呂母)의 복수, 번숭(樊崇)의 난, 왕광(王匡)・왕봉(王鳳)의 난
한의 전성기였던 무제(武帝) 때에도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세력가가 있었다. 한편 궁정에서는 무제가 죽은 후 황후의 일족인 외척과 상궁을 관장하는 왕의 측근인 환관(宦官)이 일어나, 정치는 그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들 외척과 환관의 권력 다툼에다 더욱더 힘을 키우게 된 세력가 때문에 한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 서기 8년, 외척 중 한 명인 왕망(王莽)이 선양(禪讓)이라는 형태로 황제가 되어, 새로운 국가 신(新, 8~23)을 건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왕망은 토지의 국유령과 노비의 금지령을 내려 대토지 소유자인 세력가들을 단숨에 해체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를 실행할 만한 강대한 권력이 없었고, 법령은 세력가들의 반대에 부딪쳐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 법령은 4년 만에 철회되었다.
엎친 데 엎친 격으로 북방 흉노의 침입이 격화되었다. 왕망은 이를 단숨에 토벌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보냈으나, 흉노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막대한 국가재정만을 낭비해 재정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할 것이다. 어떤 빌미만 있으면 화약고에 불을 댕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그 빌미를 만든 것이 여모(呂母)라는 양조장 주인이었다. 여모의 아들은 지방 관리로 있었는데, 과실을 저질러 현의 장관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양조장을 경영하던 여모는 젊은이가 오면 돈을 받지 않고 술을 주곤 하였다. 이런 마음씨 좋은 주인이 복수를 외치고 나서자 많은 젊은이들이 그 깃발 아래 모이게 되었다. 여모는 전재산을 털어 무기를 구입하였다. 이리하여 여모 일당은 해곡현(海曲縣, 현재의 산둥성)을 습격하여 현의 장관의 목을 잘라 그 목을 아들의 무덤 앞에 바쳤다.
일당은 목적을 달성했으나 해산하지 않았다. 고용된 무장단은 곧 반란 집단으로 바뀌었다. 왕망 정권을 뒤흔든 '적미(赤眉)의 난'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다. 여모 일당은 적군 · 아군을 식별하기 위하여 벽에 바르는 붉은 물감을 자신들의 눈썹에 발랐다. '적미군'이라는 이름은 거기서 생겨난 것이다. 여모 다음으로 적미군을 지휘한 것은 번숭(樊崇)이라는 인물이었다.
화북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적미군과는 별도로 후베이성 당양현(當陽縣)의 녹림산(綠林山)을 거점으로 하여 왕광(王匡) · 왕봉(王鳳) · 성단(成丹) · 마무(馬武) 등이 녹림단(綠林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세력은 처음에 수백 명이었으나, 몇 달 새 8천 명에 이르렀고, 전성기에는 5만 명이나 되었다.
왕망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만 명의 군대를 보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정부군을 대파한 후 적미군의 수는 오히려 10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 위에 한의 일족인 유수(劉秀, 후의 광무제)가 세력가들을 결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서울 장안은 유수 등 토벌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반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왕망은 두오(杜吳)라는 상인의 손에 살해되어, 공빈취(公賓就)라는 자에 의해 목이 잘렸다. 이로써 왕망의 이상 국가는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전한에 이어 후한이 건국되기에 이른다. (김희보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에서 인용)
③ 황건군(黃巾軍)의 주모자 장각(張角)
후한 중기에는 호족이 대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촌락사회를 지배, 전통적인 촌락질서가 붕괴되었다. 천재와 기근도 빈발해서 궁핍해진 농민은 호족에 예속되거나 유망화에서 화북에는 방대한 몰락농민ㆍ유민이 발생하였다. 그때의 정권은 부패가 극도화하고 사태는 악화, 이에 저항한 유가ㆍ사대부의 운동도 금지당해서 좌절했다. 그 무렵 거록(하북성)의 장각(張角)이 '태평도(太平道)'를 창시, 죄의 참회에 의한 병이 칠와 윤리적인 삶을 주장, 열병의 만연에 괴로워하고, 촌락사회로부터 소외된 몰락농민ㆍ유민을 구제해서 수십 년에 수십만의 신도를 얻어서 각지에 교단을 조직하였다.
184년 장각 등은 후한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사회인 '황천(黃天)'의 수립을 외치면서 일제히 봉기, 정부는 당금(黨禁)을 풀어 결속을 다져, 10개월 후에 진압하였다. 그렇지만 황건 여당이나 오두미도의 종교반란, 일반의 민중반란이 속발, 지방질서는 해체되어서 군웅 할거에 도래, 후한왕조는 멸망했다. (『종교학대사전』에서 인용)
④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 장로(張魯)
장로는 후한 말기 패국(沛國) 풍현(豊縣) 사람이며 오두미도(五斗米道) 교주로, 익주목(益州牧) 유언지(劉彦之)의 독의사마(督義司馬)를 지냈다. 헌제(獻帝) 초평(初平) 2년(191) 한중(漢中)에 웅거하여 오두미도로 주민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불렀다. 좨주(祭酒)를 두어 지방 정권을 관장하면서 파한(巴漢)에서 30년 동안 지배하자 한나라에서 진민중랑장(鎭民中郞將)으로 삼아 한녕태수(漢寧太守)로 임명했다. 지역이 비교적 안정을 누려 귀의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건안(建安) 20년(215) 조조(曹操)가 공격하자 파중(巴中)으로 달아나고 얼마 뒤 항복했다.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임명되고, 낭중후(閬中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원(原)이다. (『중국역대인명사전』에서 인용)
⑤ 대승교大乘敎의 난을 일으킨 법경法慶
법경은 북위(北魏) 때의 승려로 기주(冀州) 사람이다. 당시 조정에서 불교를 신봉해 사원마다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권력을 쥔 승인(僧人)들이 승려 지주가 되었다. 수많은 농민과 하층 승려들이 잔혹한 박해와 압박을 당하자 연창(延昌) 4년(515) 대승교(大乘敎)를 만들어 농민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모든 마군(魔軍)들을 없앤다.(新佛出世 除去衆魔)”고 외치면서 그들의 수령이 되었다. 또 발해 사람 이귀백(李歸伯)을 십선보살(十善菩薩)로 삼고 5만여 명을 대중을 모아 가는 곳마다 사원과 불상에 불을 지르고 승려 지주들을 살해했다. 북위가 원료(元遙)에게 보기(步騎) 10만 명을 주어 진압하게 했다. 전쟁에 패한 뒤 포로가 되어 죽었다. (『중국역대불교인명사전』에서 인용)
⑥ 그 외 p.358의 석벽에서 보이는 이름들 - 장수(張脩)와 유경휘(劉景暉)
장수는 동한 파군의 무당으로, 동한 초평 2년(191년)에 익주를 다스리는 (태수)유언의 별부사마였다. 유언이 독의사마 장로와 별부사마 장수를 보내 한중을 차지해 다스렸는데, 이 둘이 한중에서 오두미도를 창립했고, 장수는 부적 태운 물을 사용해 아픈 사람의 병을 낫게 했으며, 병이 나은 사람은 쌀 다섯 말을 내게 해서 “오두미사”라 불렸다. 후에 장수는 한중태수 소고를 죽였는데, 장로가 장수를 죽이고 그 무리를 거두었다. (張脩,東漢巴郡巫人,任益州牧(太守)劉焉的別部司馬,東漢初平二年,劉焉派督義司馬張魯與別部司馬張修攻佔漢中,兩人在漢中創立五斗米道,張脩用符水替人治病,痊癒者雇以白米五斗,故號曰“五斗米師”。後來張脩殺漢中太守蘇固,張魯殺張脩,奪其兵眾)
유경휘에 대한 기록은 과문한 탓에 찾지 못했는데, 위에 기술한 법경이 난을 일으킨 바로 그 다음 해에 난을 일으킨 것만 확인했다. (독수리님의 블로그 중국전란戰亂연표 참조)
p.358
“* 다들 아시겠지만, 황소는 이 이야기로부터 수백 년 뒤 당 말기를 뒤흔든 ‘황소의 난’의 주모자, 그리고 송강은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옮긴이 註)”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 북송(北宋) 말기의 도적으로 약 1년간 관군과 대치해 싸웠으나 결국 사로잡혀 항복한 인물로, 『수호전』의 송강은 바로 이 송강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올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송강은 역사 속의 인물인데, 설명은 『수호전』의 송강과 섞여 있다. 송강은 북송(北宋) 시절의 도적으로 조정의 착취에 못 이겨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과 함께 1119년 12월에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켜 하삭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10여개의 도시를 함락하고 이렇게 산동 지방을 휩쓸고 다녀 그 세력이 청주, 제주, 복주를 아우를 정도였다고 한다. 1120년에 조정에서 투항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하자 이 때문에 조정에서 증효온에게 군을 이끌도록 해서 파견하자 이를 피하면서 청주에서 남하해 기주(지금의 산동성 임기현)에서 약 1년 동안 관군과 대치했다. 1121년 2월에 회양군을 점령하고 술양을 거쳐서 해주로 갔다가 이듬해 5월에 상선 10여 척을 탈취하고 빼앗은 물품을 싣고 있던 도중에 첩자를 통해 동향을 파악한 장숙야가 육지로 유인하자 배에서 내리는 틈에 공격을 받아 복병으로 포위되고 부장이 사로잡히자 항복했으며, 그 이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엔하위키 미러에서 인용) 『송사(宋史)』에 “송강은 36인으로 제위를 횡행한다(言宋江以三十六人横行齐魏)”으로 나와있어 ‘양산박 108호걸’은 사료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황소(黄巢)는 중국 당(唐)나라 말기 반적의 우두머리로 875년에 일어났던 대농민 반란의 지도자이다. 처음에는 소금장사를 하여 큰돈을 벌다가 벼슬의 길에 올라갈 생각으로 여러 번 과거 시험을 쳤으나 번번이 떨어지기만 하였다. 875년에 왕선지(王仙之)의 난이 일어나자 산둥 서부에서 병사를 일으키고 왕선지가 죽은 뒤에는 그를 대신하여 수 천 명의 망명자 유민군을 지휘하여 거의 중국 땅 대부분을 휩쓸었다. 880년에는 장안에 들어가 휘종을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제(齊)라 불렀는데 뒤에 이극용(李克用) 등의 관군에 반격을 받고 싸우다 패하여 진산(秦山)에서 사망했다. (『새로 나온 인명사전』에서 인용)
p.360
“봐라, 여기 손은孫恩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손은은 중국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동진(東晉, 316~420)의 도사(道士)로 자(字)는 영수(靈秀)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의 손견(孫堅, 155~191)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낭야(琅琊, 지금의 山東省 膠南) 출신이다. 숙부(叔父)인 손태(孫泰, ?~398)가 두자공(杜子恭)에게 비술(秘術)을 배워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敎主)가 되자, 그를 도와 강남(江南) 지역에서 교세(敎勢)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98년(晋 安帝 隆安 2년), 손태(孫泰)가 회계내사(會稽內史) 사유(謝輶)에게 모반(謀叛) 혐의로 고발(告發)되어 처형되자, 손은(孫恩)은 교도(敎徒)들을 이끌고 저장성[浙江省] 해역(海域)의 주산군도(舟山群島)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399년 봉기하여 협구(浹口, 지금의 鎭海口)를 거쳐 회계(會稽, 지금의 浙江省 紹興)를 공격해 점령했다. 회계(會稽)를 점령한 뒤에 손은은 스스로를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고 칭했으며, 교도(敎徒)들은 그를 ‘장생인(長生人)’이라고 불렀다.
민란(民亂)은 옛 오(吳)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곳곳에서 백성들의 봉기가 이어져 반군(叛軍)의 규모는 수십만에 이르렀다. 동진(東晉) 조정(朝廷)은 민란(民亂) 진압(鎭壓)을 위해 서주자사(徐州刺史) 사염(謝琰, ?~400)과 도독오군군사(都督吳郡軍事) 유뢰지(劉牢之, ?~402)를 파견하였다. 400년(隆安 4년), 손은(孫恩)의 반군(叛軍)은 여요(餘姚, 지금의 浙江省 余姚)와 상우(上虞, 지금의 浙江省 上虞)를 공격했으며, 산음(山陰, 지금의 山西省 朔州) 북쪽의 형포(邢浦)에서 진군(晉軍)을 기습하여 사염(謝琰)과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아들인 회계내사(會稽內史) 왕응지(王凝之) 등을 죽였다. 그러나 유뢰지(劉牢之)가 이끈 진군(晉軍)에 패하여 해상(海上)의 섬으로 피신하였으나, 임해(臨海) 등 저장성[浙江省] 동부 해안 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402년(晋 安帝 元興 원년), 손은(孫恩)은 임해태수(臨海太守) 신경(辛景)에게 패하여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손은(孫恩)이 ‘수선(水仙)’이 되었다며 교도(敎徒) 100여명이 함께 죽었고, 손은(孫恩)의 매부(妹夫)인 노순(盧循, ?~411)과 서도복(徐道覆, ?~411)이 남은 무리를 이끌었다. 동진(東晋) 조정(朝廷)은 노순(盧循)과 서도복(徐道覆)을 회유하기 위해 광주자사(廣州刺史)와 시흥상(始興相)의 직위(職位)를 주기도 했지만, 민란(民亂)은 411년(義熙 7년)까지 지속되었다. (두피디아에서 인용)
p.361
“봐라, 여기 천강 목록 한참 아래쪽에 손문이라고 있지 않느냐. 이 자가 네 자손일 수도 있어.”
용아녀가 처음 언급했던 진승・오광의 난부터 통비공이 언급한 쑨원(孫文)까지의 연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진(秦) BCE 209 진승・오광의 난
신(新) CE 17 여모의 난, 녹림군의 난
신(新) 18 적미의 난
동한(東漢) 184 황건의 난
동한(東漢) 215 장로 투항
5호16국(五胡十六國) 동진(東晋) 399 손은・노순의 난
북위(北魏) 량(粱) 515 법경의 난
북위(北魏) 량(粱) 516 유경휘의 난
당(唐) 875 황소의 난
북송(北宋) 1121년 송강 진압
청(淸) 1911 신해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