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 처형장에 귀곡성鬼哭聲이 울려 퍼지고 황하黃河에서 오공이 크게 노하다


p.194

“우리는 수 양제의 압정에 맞서 싸웠다. 당을 세운 이연과 다를 바가 없거늘, 어째서 우리는 역도逆盜로 몰려 죽어야만 했단 말이냐. 대성이라면 원수를 갚아다오.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게...”


   이들 모두 무지기의 꾐에 넘어가 죽은 민중들이다.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무지기는 말을 잘하는 요물이다. 그는 항상 이치에 맞는 말을 한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중노동에 혹사당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끌려가고, 난세가 찾아오면 빼앗기고, 기근이 일어나면 굶어죽는 민중의 삶. 민중의 삶은 원통함과 억울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무지기는 바로 이런 민중들의 원통함과 억울함에 스며들어 민중들을 자각시켜 또 다른 난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무지기는 이러한 민중의 난이 성공을 하던, 실패를 하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무지기는 민중들의 원통함을 바탕으로 큰 난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죽은 민중들의 원통함으로 살아가는 요물이기 때문이다.

   원혼들이 지금 손오공/대성에게 접근하고 있고, 손오공은 이 원혼들로 인해 자아를 더욱 잃어가고 있다. 무지기가 물속에 잡혀 있어도 끊임없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윤회(輪廻, Saṃsāra) 때문이다.

   어쩌면 『요원전』은, 이러한 무지기의 윤회를 끊기 위한, 번뇌에 속박된 현상 세계인 차안(此岸, 이 언덕)에서 벗어나 열반(涅槃, Nirvāṇa)의 세계인 피안(彼岸, 저 언덕)으로 가고자하는 장대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p.196

“소승은 하직 수행 중인 몸입니다만 독경讀經쯤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보리菩提라도 빌어주도록 하지요.”


   드디어 등장한 현장(玄奬) 스님! 현장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을 소개하는 p.200에서 하기로 한다.

   보리란 산스크리트 보디(Bodhi)를 음역한 말로 수행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참다운 지혜, 깨달음, 또는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과정을 일컫는다. 이 보리를 얻은 뒤에는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현장이 망자들의 보리를 빌어준 것은 몸과 마음의 고뇌와 속박의 원인인 번뇌로부터 해방되는 것, 즉 망자들의 해탈(解脫, mokṣa )을 기도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p.197

“이시 무진의보살 즉종좌기 편단우견 합장향불 이작시언 세존 관세음보살 이하인연 명관세음 불고무진의보살... 爾時 無盡意菩薩 卽從座起 偏袒右肩 合掌向佛 而作是言 世尊 觀世音菩薩 以何因緣 名觀世音 佛告無盡意菩薩...”


해석: 그 때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어 드러내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여쭈시되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시되...


   망자들의 원한을 달래주기 위해 현장이 암송하는 것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 (제7권)의 제25품(品)인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다.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法華經)』으로 불리는데 이 명칭이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백련화(白蓮華)와 같은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제경(諸經)의 왕으로 생각되었고, 초기 대승경전(大乘經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은, 불타(佛陀)는 아득하게 멀고 오래된 옛날부터 미래 영겁(未來永劫)에 걸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超越的存在)로 되어 있고,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모든 인간들이 부처의 깨달음을 열 수 있는 대도(大道, 一乘)를 보이기 위함이며, 그 대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위키백과 묘법연화경 참조) 『묘법연화경』은 동국대학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클릭)에서 e-book으로 읽을 수 있다.

   『요원전』에서 현장이 독경하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주된 내용은 ‘옮긴이註’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중들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거나 생각하면 그 신통력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인데, 실제로 현장은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외우면서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긴다. 한 번은 『요원전』제99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다른 한 번은 『요원전』「서역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p.200

“아... 어찌된 영문일까... 머리가 맑아졌어... 그 무시무시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난 어찌 되었던 거지... 어째서 이런 곳에...”


   억울하게 죽은 망자들의 보리(菩提)를 빌어주기 위해 현장이 암송한 「관세음보살보문품」으로 손오공 또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는 손오공의 야성(野性)을 제어하기 위해서 긴고아주를 외우고, 고통으로 인해 그 야성을 컨트롤할 수 있는 반면, 『요원전』에서 현장의 독경은 망자들의 원혼으로 자아를 잃은 손오공이 고통을 벗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한다.



p.201

“저는 형주荊州에서 온 현장玄奬이라고 합니다. 겨우 전란이 가라앉아 상주相州를 순례하고 장안으로 들어가던 참입니다.”


   현장 스님에 대한 평가는 “중국은 물론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요 변역가이며 불교학자”란 첸원중(錢文忠) 교수의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에는 어떠한 과장도 들어가 있지 않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실상 『요원전』의 주인공이며, 왜 『요원전』이 『서유기』가 아니라 『대당삼장취경시화』를 이야기하는 지에 대한 이유가 바로 현장이라는 인물에 담겨 있다. 그의 대한 평가는 차차 해나가기로 하고 여기서는 현장 스님의 탄생에서부터 상주를 지나기까지의 행적을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현장법사는 수 문제(隋文帝) 개황(開皇) 20년(600년)에 태어났다. 속성(俗姓)은 진(陳)이고 진류(陳留) 사람으로 한(漢) 나라 태구(太丘)의 현장이었던 중궁(仲弓)의 후손이다. (法師諱玄奘,俗姓陳,陳留人也。漢太丘長仲弓之後。)

   사남매 중 막내였는데 둘째 형인 장첩(長捷)은 먼저 출가하여 동도(東都, 洛陽)에 있는 정토사(淨土寺)에 머물고 있었다. 현장이 능히 법을 가르치고 전할 만 하다는 것을 알고는 절로 데리고 가서 경전(經典)을 외우고 익히게 했다. (其第二兄長捷先出家,住東都淨土寺。察法師堪傳法教,因將詣道場,誦習經業。)

   현장은 13세에 대리경(大理卿) 정선과(鄭善果)의 특채로 승려로 뽑혔다. 이후 경 법사(景法師)에게 『열반경(涅槃經)』을, 엄 법사(嚴法師)에게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는데 한 번 들은 것은 다 알았으며, 두 번 본 뒤에는 다시 의심이 없었으므로 대중들은 모두 경탄했다. 그래서 법좌(法座)에 올라 그대로 강술하도록 하니 읽는 억양이나 해석하는 표현이 모두 스승과 똑같았다. 그의 훌륭한 소문과 명성은 이로부터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다. (一聞將盡,再覽之後,無復所遺。眾咸驚異,乃令昇座覆述,抑揚剖暢,備盡師宗。美問芳聲,從茲發矣。時年十三也。)

   그 뒤 수 양제가 암살당하고, 군웅들이 일어나 천하에 전란이 끊이지 않자 현장은 형에게 장안(長安)으로 가자고 했다. “이곳이 비록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긴 하지만 사람이 죽고 화란(禍亂)이 이처럼 심하니, 어찌 이곳을 지키다가 죽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당(唐)의 황제[高祖]가 진양(晋陽) 사람들을 데리고 이미 장안에 계시며 천하 사람들이 부모처럼 의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님, 함께 장안으로 갑시다. (此雖父母之邑,而喪亂若茲,豈可守而死也!余聞唐帝驅晉陽之眾,已據有長安,天下依歸如適父母,願與兄投也。)”

   하지만 현장과 그의 형이 장안으로 갔을 때는 중원 전체가 혼란에 휩쓸린 터라 도성에는 수업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승려들이 상대적으로 전란에서 벗어난 면촉(綿蜀, 四川)으로 떠났다. “장안에는 불법(佛法)을 강하는 일이 없으니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습니다. 촉나라로 가서 수업(受業)하도록 하십시다. (此無法事,不可虛度,願遊蜀受業焉。)”

   당시에는 천하가 기아로 허덕일 때였으나 그래도 촉(蜀) 지방만은 양식이 풍부했다. 이 때문에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몰려들어 강좌에는 항상 수백 명이 사람들이 모였다. 그 가운데 현장의 이지(理智)와 큰 재주가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오(吳)・촉(蜀)・형초(荊楚)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時天下饑亂,唯蜀中豐靜,故四方僧投之者眾,講座之下常數百人。法師理智宏才皆出其右,吳・蜀・荊・楚無不知聞)

   현장은 출가한 지 8년 후, 2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도에서 정식으로 수계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여름 안거(安居) 때에는 율(律)을 배워 5편(篇) 7취(聚)의 종지(宗旨)를 한 번에 터득했다. 익주(益州)에서 경론(經論) 연구를 다 마치고 법사는 다시 장안으로 들어와 뛰어난 종지를 배울 생각이었으나 법률 조식(條式)에 어긋나기도 하고 또 형의 만류도 있어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即以武德五年於成都受具,坐夏學律,五篇七聚之宗,一遍斯得。益部經論研綜既窮,更思入京詢問殊旨。條式有礙,又為兄所留,不能遂意)

   이에 현장은 몰래 상인들과 더불어 일행이 되어 배를 타고 3협(峽)을 거쳐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가서 형주(荊州)의 천황사(天皇寺)에 이르렀다. 이곳의 승려나 속인들도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이던 터라 모두들 이렇게 오신 김에 설법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乃私與商人結侶,汎舟三峽K,沿江而遁。到荊州天皇寺,彼之道俗承風斯久,既屬來儀,咸請敷說。)

   강의가 끝나자 다시 북쪽으로 유람하면서 선덕(先德)들을 찾아 물었다. 먼저 상주(相州)에 이르러 혜휴(慧休) 법사를 만나 의심나는 것을 질문했고, 또 조주(趙州)에 가서는 도심(道深) 법사를 뵙고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 (罷講後,復北遊,詢求先德。至相州,造休法師,質問疑礙。又到趙州,謁深法師學《成實論》)

   『요원전』에 첫 등장한 현장은 바로 이 시기의 현장이다. 첫 등장에서 현장은 “수행중인 몸”이라며 자신을 한껏 낮추었지만, 그의 명성은 위에 기술한 대로 오(吳)・촉(蜀)・형초(荊楚) 지방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충분히 안주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현장은 불교에 대한 학구적・종교적인 열망으로,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인도로 기어이 간다. 바로 그 때문에 중국의 불교(와 한국과 일본의 불교)는 더욱 풍요로워졌으며, 부가적으로 장쾌한 신마소설(神魔小說) 『서유기』를 읽을 수 있게 됐다.



p.203

“두건덕의 잔당으로 당에 반기를 든 유흑달劉黑闥과 한패인 홍해아紅孩兒라는 녀석이외다. 나이는 젊지만 상당히 만만찮은 녀석이었지요. 이제 장안으로 호송되면 아마 참수될 겁니다.”


   ① 유흑달이 두건덕 휘하에 들어가게 된 경위는 『자치통감(資治通鑑)』권188에 나와있다. “유흑달은 장남(漳南)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날래고 용감하며 교활하였는데, 두건덕과 잘 지냈으며, 뒤에 도적떼가 되어, 학효덕, 이밀, 왕세충을 돌며 섬겼다. (...) 왕세충이 유흑달로 하여금 신향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당시 이세적은 위징과 함께 두건덕에게 투항한 상태였다)이 그를 쳐서 포로로 잡아 두건덕에게 바쳤다.” 유흑달의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1회 고아현 항목(p.037) 참조.

   ② 드디어 홍해아가 등장했다. 홍해아는 『요원전』에서 현장과 오공의 뒤를 숨이 막히게 쫓는, 참으로 지긋지긋하면서도 애처로운 캐릭터이다. (무려 85회까지 등장한다.) 『요원전』에서는 홍해아와 관련한 서브 캐릭터들이 마구 등장해 『요원전』의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이는 『서유기』에서도 그렇다. 『서유기』는 대부분이 단발성 캐릭터와 상황의 연속으로, 마치 게임에서 하나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게임 내러티브 방식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데,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연속성을 지닌 캐릭터가 바로 홍해아이다. 홍해아는 40~43회에 걸쳐 나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지만, 홍해아의 삼촌인 여의진선(如意眞仙)이 53회에, 59회~61회에 홍해아의 어머니인 나찰녀(羅刹女)와 우마왕(牛魔王)이 등장한다. 또 우마왕은 손오공의 의형제로 3회와 4회에 걸쳐서 등장하니 이정도면 『서유기』의 중심 플롯을 지탱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풀어나가기로 한다.



p.206

“나리, 이제 곧 삼문협三門峽의 난소難所에 들어서는뎁쇼.”


   p.202에서 교위의 말을 보면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황하를 거슬러 올라갈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으므로, 이들은 지금 황허[黃河]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뱃사공의 말을 보면 이들은 창장[長江, 陽長江]에 있다. 삼협은 창장에 있는 쥐탕샤[瞿塘峽, 구당협], 우샤[巫峽, 무협], 시링샤[西陵峽, 서릉협]의 세 협곡을 말한다. 쓰촨성[四川省, 사천성] 펑제[奉節, 봉절]에서 후베이성[湖北省, 호북성] 이창[宜昌, 의창]에 이르는 사이에 있으며, 옛날부터 항해가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며 총 길이가 204km에 달한다. 난소는 이창의 옛 이름을 말하므로, 이들은 황허를 거슬러 오르는 게 아니라 창장을 거슬러 오르는 셈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루트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먼저 삼문협을 지나 난소에 들른 후 창장을 계속 따라 내려가다가 산양독(山陽瀆)을 타고 화이허[淮河, 淮水]에서 통제거(通濟渠)를 이용, 황허로 빠져서 거슬러 올라가 광통거(廣通渠)를 이용해 장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는데, 이런 루트를 사용할 바에는 차라리 육로가 낫겠다. 엄청난 물량도 아니고, 고작 죄수 한 명에 야인 하나를 호송하는데 이런 불합리한 루트를 이용할 이유는 없다. 그냥 황허와 창장을 합쳐버린 모로호시 다이지로 선생의 대륙적 기상이라 퉁치고 넘어가도 무방할 듯하다.


수 대운하 지도



p.215

“제... 제기랄... 하백河伯... 용왕龍王... 아니면 하다못해 그 어떤 요물이라도 좋다... 나의... 나의 이 원한을 풀어다오... 그리 하면 내 오장육부를 바칠 테니... 제기랄... ”


   하백과 용왕은 모두 물의 신이다. 둘 다 『산해경』에 기록이 있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소박한 모습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는 하백은 음탕하고 탐욕스런 강의 신이며, 용왕은 사해바다를 다스리는 바다의 신이다. 물론 둘 다 물의 신이므로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거처를 마련해놓고 살고 있다.

   『서유기』에서도 하백과 용왕이 등장하는데, 하백은 46회에 영감대왕(靈感大王)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며, 용왕은, 2회에서 손오공에게 삥을 뜯기고, 10회에선 승상 위징(魏徵)에게 목이 베이며, 14회에선 욱하고 뛰쳐나온 손오공을 달래서 다시 삼장법사에게 돌아가도록 권유하기도 하지만, 43화에선 외질 소타룡(小鼉龍)이 친 사고를 수습하고, 45회에선 도가와 불가의 법력대결로 끌려나오며, 63회에선 잘못 들인 사위 때문에 온 집안이 깡그리 도륙당한다.

   『요원전』에서는 이런 깊은 원한으로 무지기가 응답을 하는데, 무지기는 황허 밑바닥에 묶인 무지기이기도 하지만, 제천대성의 칭호를 내려 받은 손오공이기도 하다. (물론 무지기는 황허에서 사로잡혔다는 고사는 없지만, 수괴이기 때문에 용왕과 같이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이 저주로 두 무지기가 응답하고 일어선다.



p.226~227

원한으로 불러낸 무지기와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왕 교위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제괴지이』「요괴잉어[妖鯉, 요이]」편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금초(金焦)라는 사내가 굉욱(轟郁)을 죽이고 양식어장을 빼앗자, 굉욱은 잉어로 변해 금초의 잔칫상에 올라 기어이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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