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의 시 2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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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 요시이에의 『자학의 시』를 지난 주말간 침대에 뒹굴거리면서 읽었다. 그 전에도 종종 트윗에 "폭풍감동"이라는 멘션 감상이 올라왔던지라 궁금하던 차에 이번에 큰 맘 먹고 감상을 했다. 4컷(가끔 5컷, 8컷이 있긴 하지만) 구성에 귀여운(혹은 성의 없는) 그림체인지라 읽는데 그리 큰 불편함은 없었다. 정독한 후, 책을 다 덮고 큰 한숨을 쉬었다. 

정말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 두 권의 책은 모리타 유키에의 끔찍한 인생을 담고 있다. 1권의 내용이 남편 하야마 이사오가 그녀를 착취하지만, 부인 모리타 유키에는 그 끔찍한 착취를 견뎌내고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미친 순애보"를 그 어떤 설명 없이 담고 있다면, 2권에서는 불쌍한 그녀, 유키에의 과거사가 담겨 있다. 그러니까 『자학의 시』는 1권과 2권 모두를 한달음에 읽어야 하는 책이다. 1권만 읽고 그 잔혹함에 못이겨 2권을 포기한다면, 소위 그 "폭풍감동"을 절대 느낄 수 없다. 그토록 착취만 당하는 유키에가 왜 그렇게 이사오를 사랑하고, 이사오에게 사랑을 갈구하는지, 그런 이해못할 유키에의 근원이 바로 『자학의 시』 2권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인생에 있어 나락의 끝이란 게 있는지, 있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끝인지는 그 누구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법하지만, 유키에의 경우라면, 충분히 그 끝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저리까지는 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살기위해 스스로 우윳병을 집어 드는 갓난 아기 유키에, 무능력한 아버지에게 착취당하고, 여러 남성-어른들에게 착취당하는 어린 유키에, 단지 사랑받고 싶어서 물건을 훔치는 유키에, 그리고 기억을 지우듯 고향을 떠나는 10대 유키에, 도쿄에서 파란만장한 20대를 보내는 유키에, 그런 그녀를 쫓아 다닌 하야마 이사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서 삶의 이유와 살아가야 할 이유를 깨닫는 엄마 유키에. 그녀의 삶은 세상에 쉽게 편입한 나 따위가 이러쿵저러쿵하기엔 왠지 숭고해보이기까지 하다. 정말로 인간의 삶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도덕이나, 법 따위를 넘어선, 어떤 초월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그런데, 꼭 이랬어야만 했을까? 

꼭 이렇게 한 여인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그것을 킬킬거리며 즐기게 한 후에 마치 인생의 큰 깨달음인양 "재회 장면"을 슬쩍 삽입해 그것을 감동으로 끌어냈어야 했을까? 책을 읽는 동안에는 무언가 가슴에 뜨거운 것이 출렁거렸지만, 그 뜨거움이 정말 감동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난 이 감동을 정말로 느끼고 있는 것인가? 유키에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사오는 여전히 도박에 관심이 있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제 딸의 집에 얹혀 살기로 작정한 것 같다. 산달이 다가오지만, 유키에는 여전히 식당-배달일을 한다. 그녀가 애를 낳아도 아마 현실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아마 옆집 아줌마의 상상처럼, 후에 자식과 아비가 쌍으로 유키에에게 밥상을 뒤집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가슴이 뜨겁다. 

아마도 그 이유는, 김기덕의 <나쁜 남자>처럼, 나카야마 테츠야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인생>처럼, 『자학의 시』도 한 사람의 삶의 일관성에서 느끼는 어떤 "경건함" 때문이 아닐까? 선과 악, 호와 오를 벗어난, 일관된 삶의 태도에서 오는 숭고함. 바로 그런 감동. 

그런 면에서 『자학의 시』는 이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등장인물들은 스스로를 자학하듯 끊임없이 반복된 -잔인한- 행동을 하지만, 바로 그 행동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확인에 다름 없으니까. 어떻게 그게 사랑이 되느냐고 반문하지는 말자. 그것은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니까. 사디즘/마조히즘이 대부분에겐 고통이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기쁨이니까. 

분명한 것은, 이런 삶도 있고, 이런 삶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며, 이런 삶의 모습에서도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쓰레기통에서도 장미는 영롱하게 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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