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일, 드디어 그렇게도 보고 싶어했던 인도영화 <로봇(எந்திரன்)>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봤다. 인도 영화는, 거의 처음인 내게, 작년에 만들어져 엄청난 화제를 뿌린 이 최신 대중 영화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말 궁금했었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로봇>은 스즈키 세이준(鈴木清順), 미이케 다카시(三池崇史), 남기남, 심형래 감독 등의 작품들을 "애교" 수준으로 여기게 할 정도로 인간의 상상력(혹은 통속성)을 정말 끝까지 밀어 붙인 영화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로봇>을 보러 온 그 수많은 관객들 모두) 역시 이 말도 안 되는 영화를 진심으로 즐겼다.  

<로봇>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천재 과학자 바시 박사(라즈니칸뜨)는 자신의 모습을 본딴 안드로이드 치티(라즈니칸뜨의 1인 2X수백역!)를 발명한다. 치티는 인간의 능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군대 납품을 위해) 바시 박사는 치티에게 인간의 감정을 시물레이션 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늘의 도움을 받아) 개발하게 되고, 마침내 치티는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그리고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게 됐다). 그러나 치티가 바시 박사의 애인인 사나(아이쉬와라야 라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리고 바시 박사의 스승인 보라 박사(다니 덴종파)의 시기와 음모로, 치티는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병기가 된다.  

무척 짧게 요약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하다.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기본으로 삼고 , <터미네이터 2>,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아이 로봇> 같은 심오한 기계-자아 성찰 이야기가 양념으로 뿌려졌다. 영화의 주제 또한 이 영화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뻔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로봇>은 이 뻔한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관점이다.  

영화의 시작은 개발 중인 치티의 모습과 인도 영화답게 "노래"로 시작한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노래는 로봇을 "하늘에서 내려온 새로운 인류(혹은 신)"로 찬양하고 있다. 사나와의 에피소드에서, 치티가 모든 철붙이를 끌어모으고 그것들을 재분류하자 종교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신으로 여기고 의식을 행한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치티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구원의 신이자, 동시에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파멸의 신이기도 하다. 치티에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시키기 위해 바시 박사가 도서관에서 꺼낸 책 중 한 권은 『리그 베다』다. 그리고 치티는 (섹스 없이) 여자를 임신 시킬 수도 있고,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인류라기 보다는 신에 가깝다. 이런 치티가 신으로 여기는 존재는 자신을 창조한 바시 박사다. 안드로이드 개발 세미나에서 "신은 존재하나?"라는 한 사람의 질문을 받자, 치티는 "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되묻는다. 질문자가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존재"라고 대답하자, 치티는 "나를 창조한 것은 바시 박사다. 그렇다면 내게는 그가 신이다"라고 대답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바시는 치티를 제거하려고 하고, 치티는 바시 박사를 죽이려 한다. 이 두 신의 전쟁은 마치 『바가바드 기타』의 내용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문화권의 차이로 같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게 된다.  

치티가 인간의 모습(불완전한 모습)을 보일 때는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 후,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후다. 치티의 사랑은 욕망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결국 그는 파멸의 신이 되고 만다. 불편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여자(사나)"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바시 박사의 애인인) 사나는 이 영화에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캐릭터인데,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기만 하면, "남성"들은 모두 폭력적이 된다. 영화 중 가장 섬뜩했던 장면. 바시 박사가 치티 때문에 계속 고민을 하자, 사나가 "계속 이렇게 굴면 제일 먼저 지나가는 남자와 사귈 것"이라 얘기를 한다. 바로 그 때, 순박하게 생긴 한 지저분한 남자(감독인 S. 샹카르!)가 지나가자 사나는 그에게 다가가 하루 동안 남자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 사내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사나를 대접하지만, 수준이 맞지 않아, 그녀는 이 재미없는 놀이를 중단하고 바시에게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자, 그 순진했던 사내가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하고 심지어는 칼(이라기 보다는 낫!)까지 빼든다. 순박한 사람이 단숨에 난봉꾼이자 폭력배로 될 수 있는 것은 여자 때문이니, 특히 여자는 행실을 똑바로 하라는 것 같은, 불편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일까? 이것은 감독 특유의 여성관인지, 아니면 인도 문화의 무의식적인 단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둘 다 맞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왜냐하면 인도 영화에서의 검열은 키스신을 비롯, 여성(혹은 남성)의 나체(심지어 가슴조차도)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저런 심각한 이야기를 했지만, 영화는 전혀 심각하지 않다. <로봇>은 영화라기 보다는 왠지 "축제"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 이유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뮤지컬 장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로봇>의 뮤지컬은 다른 영화들의 뮤지컬과는 조금 다른데, 일반 뮤지컬 영화의 음악이 내러티브를 드러낸다면, <로봇>의 뮤지컬은 하나의 챕터가 정리될 때 마다 나온다. 즉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브릿지 형식"으로 뮤지컬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른 인도영화도 이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뮤지컬 장면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좀 뜬금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장면 자체만으로 굉장한 엔터테인먼트를 보여준다. 특히나 노래 가사들이 거의 쓰러지게 만드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인가 / 아이작 뉴턴의 작품인가" 뭐 이런 기상천외한 라임은 귀여운 수준이고 "당신은 식인종 / 나를 잡아 먹어요 / 뼈까지 씹어 먹어요" 이런 가사를 들으면, 점점 정신이 풀리기 시작하기 마련이다.  

특수 효과를 뺄 수 없는데, 아쉽게도 인도 자체의 기술은 아니고, 할리우드의 스탠 윈스턴 스튜디오가 참여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영화에서 특수효과의 주체가 누구인지 보다는, 그 특수효과를 포장하는 그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후반부 로봇들이 벌이는 클라이맥스는 정말 입이 딱 벌어질만 하며, 그 놀라운 상상력에 경탄을 넘어서 경배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살아 생전에 모기와 로봇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 영화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영화가 한 편 있었던 것 같다. 춤과 노래, 그리고 말도 안 돼는 상상력으로 버무려진, (네이버 영화 사상) 가장 끔찍한 평점의 영화. 바로 이재용 감독의 <다세포 소녀>다.   

<다세포 소녀>는 개봉한지 5년이 지난, 그래서 B급 달궁의 무시무시한 원작의 흥취가 조금은 옅어진, 지금 보더라도 너무나 덜컥 거리는 장면이 많다. 말도 안 돼는 개그 작렬에, 엉뚱하게 수습되고 봉합되는 장면들, 그리고 중심 없는 내러티브와 장르의 쉴 새 없는 전환, 간간히 등장하는 뮤지컬 넘버까지, 이 영화는 당장 타밀어나 벵갈어로 더빙해서 인도에 개봉하면, 아마도 인도 영화라고 생각할 정도로 인도 영화의 그 정신 없는 전개와 너무나 쏙 빼 닮았다. 어쩌면 이재용 감독은 자신이 그동안 침잠했던 "개인과의 관계에만 집착하는, 서로간에 상처만 입히는" 지긋지긋한 연애(담)에서 벗어나, 그 모든 것을 감쌀 수 있고 모두들 즐길 수 있는 "축제"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국 워킹 타이틀에서 제안한 <오만과 편견>을 거부하고, 자신의 커리어에 불명예가 될 수도 있는(아, 실제로 그리 됐지만...) <다세포 소녀>를 택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다세포 소녀> 이후 이재용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유사) 다큐멘터리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다시는 가공된 연애담의 세계로 들어갈 마음이 없는 것일까?

<로봇>은 또 내게 다른 것을 생각할 기회를 줬다. 올 6월,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러 인도 첸나이에 가게 됐는데, 그곳 지방의 언어가 타밀어이고, <로봇>이 첸나이에서 주 로케이션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드디어 어쩌면, <로봇>을 볼/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결혼식의 바쁜 일정 속에 (감히) 매제에게 <로봇> DVD를 구할 수 없겠냐는 부탁을 했다. 그러자 매제는 "왜 그런 영화를 보려고 하는가? (인도 영화 중 특히) 그 영화는 쓰레기"라며, 나중에 자신이 더 좋은 영화를 선물하겠다며 나를 말렸다 (그렇게해서 받은 선물이 "사티야지트 레이 컬렉션"이다).  

그 나라의 대중 영화와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그 나라 감독의 영화의 갭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의 작품과 <로봇>의 느낌은 정말로 천지차이다.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의 작품은 인도 영화인 동시에 인도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영화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같은 예로, 한국의 대중 영화와 임권택,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의 작품들 역시 그 자체로 "따로" 존재하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나도, 매제한테 한국 영화를 권했을 때 (<헬로우 고스트>가 아니라)  <시>를 권했다. 그가 본 한국 영화 중 괜찮은 영화를 언급할 때 <쉬리>를 이야기하면, 반가움 보다는 이유 모를 탄식이 든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문화적인 자존심 혹은 스노브인지도 모르겠다. 대중 영화가 (여러 면에서, 꼭 수준이 아니라) 한심한 경우가 많지만, 그 자체가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혹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난 (대중) 영화에 대한 태도를 <로봇>이라는 인도 (대중) 영화를 통해, 저 멀리 돌아서 찾은 것이다. 그 어떤 영화도 편견을 갖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 이 대답이 <로봇>이 내게 전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이 영화를 만나지 않고 지금에서야 만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이 영화를  DVD로 샀으면, 영어 자막의 어설픈 이해와 이 영화의 축제 같은 느낌을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시 영화는 큰 화면에 다같이 모여서 즐겨야 한다. 그리고 <로봇>은 그 목적에 너무나도 잘 맞는 궁극의 엔터테인먼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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