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길 - Hosu-gi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은 단순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견디기) 힘든 영화입니다. 먼저 단순한 이유. <호수길>은 서울 은평구 응암 2동 골목 '호수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정재훈 감독은 재개발이 결정난 응암 2동의 호수길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동시에 동네가 철거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힘든 이유. <호수길>은 다큐멘터리이지만,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는 전혀 다른 형식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는 (사람들의) 대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수길>은 마치 해설자의 내레이션이 빠진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상황을 지켜 보고 들을 수만 있습니다.  

영화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집니다. 전반부는 호수길의 평화로운 일상입니다. 정재훈 감독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호수길의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일상의 연속. 하지만 우리는 이미 동네 어귀에 걸려있는 "경축 재개발 확정"이라는 플랜카드를 봤습니다. 이 평화로운 일상은 철거와 이주라는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지만, 그 천진난만한 얼굴은 언젠가 일어날 사건에 대한 불안으로 일그러져 보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 줄 알고 있습니다. 굳이 용산의 비극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철거와 재개발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재훈 감독은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는 철거 예정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게 아니라, 그들이 사는 장소를 담았습니다.  

영화는 낮과 밤을 오가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던 어느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경고하는 듯한, 혹은 경계하는 듯한 불길한 개 짓는 소리가 들리고, 영화는 갑자기 장르를 달리합니다. 평화로운 일상의 다큐멘터리는 초현실적인 공포영화로 돌변합니다. 아이들이 뛰놀던 동네는 텅 비어있고, 거리는 온통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포클레인의 굉음으로 가득합니다. 주인 없는 폐허가 된 집과 바람에 열리고 닫히는 문, 그리고 기괴한 소리들이 덧붙여져 영화는 점점 우리가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40여 분간 (졸음을 참으며) 지켜봤던 일상은 순식간에 악몽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는 장면이었습니다. 일반적인 화면이라면 포클레인 옆에서 로우 앵글로 잡았을 장면을 정재훈 감독은 멀리 떨어져 위에서, 그리고 뒤에서 찍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포클레인이라는 기계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거대한 괴수가 지구를 파괴하는 장면이랄까. 할리우드 영화의 괴수는 지구를 파괴하지만, 정재훈 감독이 찍는 괴수는 소박하게(?!) 응암 2동 호수길을 파괴합니다. 할리우드의 괴수는 물리치면 (영화는) 끝이지만, 정재훈 감독이 찍는 괴수는 끝이 없습니다. 괴수라기보다는 좀비에 가깝습니다. 재개발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라도 무덤에서 기어올라 기어이 부숴버리고 마는 공포영화 같은 악령들. 하지만 <호수길>에는 이 괴수를 물리칠 용사나 과학자 혹은 지구방위대는 없습니다. 정재훈 감독은 이 참혹한 현장을 그저 바라만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은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 같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극영화입니다. 다만,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가짜를 진짜인양 담은 것이라면, <호수길>은 현실을 그저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다만 현실의 초현실성과 장르성을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죠. 정말이지 현실은 영화를 압도합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비몽사몽간에 봤습니다. "소리는 있지만 대사는 없는 침묵에 가까운 다큐멘터리"인지라 보는 게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에는 "도대체 왜 이렇게 영화를 찍었나"하는 감독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까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조금씩 영화를 떠올리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제가 오해를 하지 않았나 생각을 했습니다. <호수길>은 명백히 경험의 영화입니다. 관객은 속절없이 40여분에 가까운 의미 없는 (사건 없는) 평화로운 호수길의 일상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이후의 철거 현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현실을 체험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불꽃의 이미지와 (비명에 가까운) 개짓는 소리로 끝납니다. (정재훈 감독에 따르면) 철거 현장에서는 불이 자주 난다고 합니다. 개는 낯선 사람을 가장 빨리 알아채는 존재입니다. <호수길>은 여전히 재개발 중이고, 여전히 불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호수길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영화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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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7-01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나라의 재개발과 난개발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래도 없습니다.
말못하는 자연이라고 그 순수함까지 포크레인의 굉음에 묻혀 온나라가 파헤쳐지고 있으니 이를 어쩐답니까?

Tomek 2010-07-01 13:34   좋아요 0 | URL
이제 토건이 끝을 향하고 있다는 우석훈 교수의 말을 믿어야지요. 한 순간의 실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경험적으로 각인하는 요즘인 것 같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