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세포소녀』는 B급 달궁(채정택)의 온라인 연재만화로 시작했습니다. 딴지일보에서도 연재했던 기억이 있는데, 무쓸모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매회 풀었습니다. 교복 입은 고등학생과 한계를 넘어서는 수위 때문에 변태만화라는 오명도 들었지만, 명랑만화와 순정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필력 때문에 연재 당시 엄청난 열광을 이끌어냈던 만화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 이재용 감독이 만든 <다세포소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만화에서는 다 가능했던 이야기들이 배우들의 연기로 육신화하면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변질됐던 것이죠. 이재용 감독은 그동안 작업했던 로맨스라는 장르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다세포 소녀>를 선택했지만, 영화는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김옥빈)의 로맨스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장편 영화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원작은 에피소드별로 진행이 되지만, 장편 영화는 기승전결의 내러티브가 필요한 법이죠.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억지 결말식의 이무기(?!)의 등장은 이 영화를 더욱 기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극장판과 거의 같이 작업을 시도한 시리즈 <다세포소녀>는 원작의 흥취를 담으면서 시리즈의 매력을 흠뻑 맛보게 한 작품입니다. 원작의 인물과 상황을 차용하지만, 그 해석은 신선하고 각 에피소드별로 장르를 달리해 "골라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며칠 전 <다세포소녀> 시리즈를 보던 중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습니다. <똥파리>, <집나온 남자들>의 배우(이자 감독)인 양익준 씨의 모습이었죠. 물론 고등학생(!) 역입니다. 지금 본다면 뜨악한 설정이었겠지만, 당시엔 무명이라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호 감독의 <뽀르노의 추억> 에피소드는 말 그대로 학창시절의 포르노테이프에 대한 수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담론으로 가득한 무쓸모 고등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열남(양익준)은 이런 이야기들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열남은 포르노테이프에 대한 잊지 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열남이 어렸을 때, 열남의 아버지(박광정)는 장롱 속에 무엇인가를 숨겨놓고 있습니다. 열남은 장롱 속을 궁금해 하지만, 열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열남은 손재주가 좋은(?) 친구를 데려와 장롱을 열어봅니다. 그 안에는 엄청난 양의 비디오테이프가 있었고, 열남은 더 이상 장롱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열남은 친구들과 돈을 모아 세운상가에 가서 포르노를 살 계획을 합니다. 마침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어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이 열남이 아버지입니다.
<뽀르노의 추억>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대부분(?) 경험해봤음직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가 울림을 갖는 이유는 지금은 사라진 포르노‘테이프’, 세운상가, 그리고 연기자 박광정 씨에 대한 회한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선호 감독은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린 존재들에 대한 강한 회한을 학창시절의 포르노테이프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선호 감독은 세운상가가 철거될 줄은, 박광정 씨가 유명을 달리할 줄은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종묘를 앞에 두고 세운상가 계단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은 모두 사라진 풍경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련하고 애틋한, 상처뿐인 풍경.
이제 포르노테이프라는 물리적 저장매체는 야동이라는 파일로 존재합니다. 세운상가는 철거되었고 그 자리엔 공원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하지만 아들에게 욕구(포르노테이프)와 돈을 조달하는 아버지의 자리는 다른 것이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처음부터 빈자리로 남아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 자리를 채워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