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작가 - The Ghost Writ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는 주인이 없는 자동차와 파도에 밀려온 한 시체로 시작합니다. 죽은 사람은 영국의 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작가였으며, 그의 죽음으로 새로운 대필 작가(이완 맥그리거)가 수상의 자서전을 대필합니다. 수상은 이라크 전쟁 포로들을 고문하는 것을 용인해, 그들 중 일부가 살해당한 혐의로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고, 대필 작가는 그의 자서전의 내용과 그의 전임자가 발견한 사실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는 전임자가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타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수상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나가는 중, 그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유령 작가>는 늘 자신이 만드는 영화보다 더 큰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입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삶을 들추어보면, 한 사람의 인생이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간단하게 굵직한 사건만 언급해보면, 그는 폴란드계 유태인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수용소에 부모와 함께 끌려갔습니다. 한창 아름다워야 할 유년기에 그는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종내에는 그의 어머니 또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배우로써 영화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연출에 관심을 두어 데뷔작 <물속의 칼>로 이름을 알립니다(이 영화는 배라는 한정된 공간과 단 세 명의 배우만 등장하는 영화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긴장감은 정말 뛰어납니다). 할리우드에 정착해 <악마의 씨>라는 걸출한 작품을 만들지만, 배우이자 아내인 샤론 테이트가 연쇄 살인마 찰스 맨슨과 그의 패거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으로 충격을 받습니다. <차이나타운>이라는 느와르 걸작을 만들지만, 이후에 그는 13살 미성년자 강간혐의로 미국에 추방당하고, 유배를 돌 듯,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다국적 자본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합니다. 추방과 동시에 미국 사법당국은 미성년 강간 처벌을 위해 그를 30여 년간 추적하지만, 그가 거주하는 국가에서 수사를 공조하지 않아 체포를 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다룬 <피아니스트>로 칸느와 아카데미에서도 수상을 해 어느 정도 화해의 제스처를 보여준 듯 했으나, 200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구금상태입니다.    

영화 <유령 작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굳이 감독의 일화를 언급한 것은 그가 이번에 만든 영화가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유령 작가의 정확한 표현은 ‘대필 작가’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유령 작가'라는 작명이 원래의 뜻보다 영화의 내용을 더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 존재성을 드러내지 않는(혹은 못하는) 유령 같은 존재. 로만 폴란스키 감독 역시 그의 이름은 있지만,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 삶을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홀로코스트의 경험과, 아내의 잔혹한 죽음, 미성년 강간 그리고 정착할 수 없는 유배의 삶. 하지만 영화가 있는 곳엔 언제나 존재감을 드러내는 감독. 존경할 수도 그렇다고 경멸할 수도 없는 이율배반적인 인물. 그는 언제나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그의 신작 <유령 작가>는 <물속의 칼>, <시고니 위버의 진실> 이후로 한정된 장소와 소수의 배우들만으로 만든 스릴러입니다. 그의 전작들을 보신 분들은 눈치 채셨겠지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스릴러는 (거의 언제나) 느릿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스릴러처럼 정신없이 진행하고 관객의 뒤통수를 치기 보다는 이야기와 미스터리를 쌓아가는 고전적인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할리우드 영화 문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같은 진행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조바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 느릿한 진행이기 때문이지요. <유령작가>의 영화평을 보면 "이게 무슨 스릴러야", "정말 지루하다"는 평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요즘 관객들은 괴롭힘을 당하기 원하지 유혹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로저 에버트 옹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지루함을 전적으로 관객의 잘못이라고도 미룰 수가 없습니다. <유령작가>는 미스터리의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최종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추리 소설의 클리쉐입니다. 이 간단한 트릭을 그 날고 기는 CIA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미스터리 장르로서는 힘이 빠지는 구성입니다. 물론 이렇게 평이한 내용을 최고의 배우들로 극을 이끌어가는 솜씨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정작 관심이 있었던 것은 '유령'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주인공 말고(그는 스스로를 ‘유령’이라 소개합니다) 수많은 유령들이 나옵니다. 주인공 유령은 아무런 힘도 없는 작가이지만, 다른 유령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주인공인 유령작가 같이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이 진실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그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그 진실을 덮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령작가는 움직이고 행동했습니다. 물론 그의 행동은 그를 진짜 유령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유령들은 그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을 겁니다.  

<유령 작가>는 누가 진짜 유령인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령들을 어떻게 몰아낼지에 대한 영화입니다. 물론 이들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영매가 되어 이들을 보고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그의 커리어에 부끄럽지 않은 묵직한 '정치'선동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덧붙임:  

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 늦게 우리에게 도착한 것 같습니다. 6월 2일이 아닌, 그 전 주에 도착했더라면, 선거 결과는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땅의 유령들은 정말 영악합니다(혹은 겁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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